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란 벽돌 Sep 21. 2022

나는 또 왜 이리 생겨먹었을까?-4

중년의 문제아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책에 재미를 단단히 붙였던 초등학교 때에 어른들이 흔히 물어보던 말이다. 그때는 남이 뭐가 되고 싶든, 무엇이 될 거든 그것이 왜 그리 궁금할까 싶었는데 내가 어른이 되고 보니 꼬맹이들이 자그마한 주먹 속에 숨겨놓은 '은밀한 야망'을 펼쳐 보고 싶은 적이 무척 많았다. 이제는 그 어른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당시 나는 말 잘 듣고 예의 바른 아이였기 때문에 "내가 무엇이 되고 싶든 그게 아저씨랑 무슨 상관이에요?"라며 본심을 그대로 내비치지는 않았다. 약간의 짜증을 숨기고 물어보는 만큼만 억지로 대답해 주었다. 잠재력이 무궁무진하고 현실 감각이 없었던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의 꿈은 자고 나면 달라졌다. 어제까지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가, 오늘 아침에는 법관을 동경하고, 점심 먹고 나면 돈 많이 버는 사장님이 좋아 보이다가, 저녁때에는 유명한 작가를 꿈꾸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의사가 멋있어 보였다. 나의 장래 희망은 아이들 백 명 중 99명 이상이 말하는 이런 것들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특이점을 넘나들기도 했다. 모처럼 만에 어머니와 택시를 타고 놀러 갈 때에는 마음대로 차를 몰고 하루 종일 달릴 수 있는 택시 기사를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인근 공사장에서 무거운 등짐을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왜소한 인부를 보고 나서는, 커서 몸을 울퉁불퉁하게 키워 힘든 일도 척척 해내는 공사장 인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적도 있었다. 내가 특별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직업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친구 누구에게서도 이런 장래 희망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어른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따라서 이 정도로만 대답해줘도 그들은 만족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왜 어른들은 아이들이 중년기에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물어도, 즉 중년기의 직업은 알고 싶어 하면서도, 나이가 들어 은퇴를 하였을 때 무엇이 되고 싶고,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는 궁금해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때는 지금처럼 수명이 길 때가 아니었다. 70세만 넘으면 언제 죽어도 호상이라고 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60-65세경에 종사하던 직업을 은퇴하고 나서는 남은 기간이 길지 않았다. 노년기에 다른 일을 다시 시작할 이유도 없었고 시작하더라도 그것을 유지할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였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이 노년기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어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은 꿈이고, 희망은 희망이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도 소망하는 것이 꿈이자 희망이다. 나는 이런 면으로서는 상당히 어른스러웠나 보다. 아니면 너무 어려서 세상 물정을 잘 몰라 그랬을 수도 있다. 나는 노년기의 꿈이 있었다. 


"너는 나이 들어서 뭐가 되고 싶니?"

누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봤다면 답은 하나였다. 중년기에 가지고 싶은 직업은 죽 끓듯 변덕이 심하였지만 노년기의 나의 모습은 언제나 한 가지였다. 그것은 '책방 주인'이었다.


제가 꾸미고 싶은 책방이에요. 그런데 요즘은 인터넷 서점때문에 동네 책방이 다 망하는 분위기라서 차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나는 중년기에 충분한 돈을 벌고 싶었다. 그 이유는 나이 들어 책방을 마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많은' 돈이 아니라 '충분한' 돈이라고 표현한 것은 내가 원하는 책방이 지나치게 크고 화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0평 정도의 공간만 마련되면 만족스러울 것이다. 사방의 벽들을 둘러 책들을 빼곡히 꽂아 놓고 가운데에는 진열대를 차려 추천할 만한 책들을 펼쳐 놓는다. 그리고 어디든 한 구석에 나의 책상을 놓는다. 책상 위에는 독서대가 놓여 있고 내가 읽는 책이 펼쳐져 있다. 옆에는 방금 읽었던 책들과 앞으로 읽을 책들이 몇 권 정도 차곡차곡 쌓여있다. 또 그 옆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이 하나 놓여 있다. 


잘 익은 과일에서 달콤한 향이 배어 나오는 것처럼 책도 익으면 좋은 향을 낸다. 아마도 지면에 인쇄된 잉크에서 나는 냄새와 신선한 종이 냄새, 그리고 그것들이 산화되어 새로이 만들어지는 냄새가 섞여서 풍겨지는 향이리라. 이것은 향수의 향처럼 자극적이고 매혹적이지는 않다. 약간은 비릿하고 텁텁한 냄새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렇게 야릇한 냄새가 값비싼 향수 이상으로 후각을 자극하고 기분을 편안하게 만든다. 이것은 매우 중독성이 있어서 한 번 맡으면 그만두기 어렵고, 책방을 떠나고 나서는 그리워져 조만간 다시 찾아 코를 들이밀게 만든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좋은 냄새가 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많이 하고, 생각을 많이 하면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다. 이것은 삶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삶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얼굴에는 그윽한 미소가 지어지고 행동은 세련되고 성급하지 않으며 말은 적절하고 또한 정중하다. 이것은 시각적으로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들에게서는 잘 익은 향취가 느껴진다. 이런 사람들이 아마도 나의 책방을 많이 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책방은 농익은 책의 향기와 아름다운 사람들의 향취, 그리고 갓 끓인 차의 향으로 가득 찰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할 정도로 행복해진다.


책방 안에는 꼭 볕이 잘 들어야 한다. 그래서 책방 안은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어야 한다. 나의 소중한 책들이, 그리고 함께 하고픈 아름다운 사람들이 어우러져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입구 쪽으로 난 벽은 유리로 만들 것이다. 나의 아늑한 공간이 책방 앞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훤히 보여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행복을 자랑하고 그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도시켜야 한다. 무심히 지나치던 사람들이 나와 내 책들, 그리고 그곳을 드나드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고 궁금해해서 책방 문을 열고 들어오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나의 길동무가 되길 원한다. 그들이 책에 빠져들어 자신의 모습을 바꿔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나는 그렇게 늙어가고 나의 인생의 마지막 장을 메꿔나가고 싶다. 그것이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나의 말년의 꿈이다.

(계속)


*표지 이미지 출처: 서강학보

작가의 이전글 나는 또 왜 이리 생겨먹었을까?-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