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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Sep 20. 2022

나는 또 왜 이리 생겨먹었을까?-3

중년의 문제아

나는 요즘 왜 이리 책에 집착하는가?

소위 '딴생각'을 시작하자마자 든 의문이었다. 문득 내가 요즘 좋아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위화감이 들었다. 무엇에 쫓기듯이 책을 들고 읽는다. 평상시에는 읽지 않던 추천사, 서문, 서평, 심지어는 참고 문헌까지도 빼놓지 않고 밑줄을 긋는다. 어찌 보면 활자 중독증 환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재미있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읽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편집증 같은 병이 있어서 그런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도 변명할 거리는 조금 있다.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챙겨서 읽다 보니 책의 서문이나 추천사 중에는 보기 드문 명문이 많다. 당연하다. 책 한 권 이상을 온전히 완성할 정도의 필력을 가진 사람들이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내는 단문들이기 때문이다. 머리말은 책의 맨 앞에 실린다. 책을 써 본 분들은 알겠지만, 독자들이 가장 먼저 읽게 되는 이 머리말은 오히려 작가가 책의 내용을 모두 완성한 후 쓰게 된다. 그 어려운 책 한 권을 멋지게 마무리 짓고, 뿌듯한 마음에 술 한 잔이나 시가 한 대를 태우면서 작가가 가졌던 그간의 소회를 들려주는 것이다.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그 책을 썼는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독자들이 그 책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읽어야 하는지, 출판을 준비하면서 곤란했던 점은 무엇이었지 밝힌다. (또한 '책 한 권을 낸다'는 힘든 작업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친지와 관계자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따라서 서문은 독자들이 그 책을 읽는 길잡이이기도 하고 안내서이기도 하다. 서문을 읽고 나면 책의 이해가 한층 쉬워진다. 추천사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도 흔히 서문의 바로 앞이나 뒤에 실리기는 매일반이지만 작가의 원고를 가장 먼저 독파한 몇 사람 중의 하나가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작가의 노고와 책의 우수함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추천사를 쓰는 사람은 그 분야의 대표적 유명인 중의 하나인 경우가 많으며 그렇듯 이미 자신의 책을 출간한 경험이 다분할 것이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명문장들을 감상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기도 하다.


나에게 다시 묻는다. 책의 구석구석을 놓치지 않고 읽는 것은 그렇다 치고 정말로 즐거워서 읽고 있는가? 즐거워서 읽는다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스트레스는 어떻게 설명되는가? 왜 편안히 읽지 않고 항상 긴장해서 글을 해부하고, 낱장에 표시하고, 외우려 하고, 흔적을 남기려 하는가?


답을 찾기 위해 생각해 본다. 나는 언제 책을 가장 즐겁게 읽었는가? 글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마음속에 띄우며 몸서리치게 기뻐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그것은 아마도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어머니를 도와 제법 벅찬 심부름을 할 때마다 어머니는 내 손에 얼마의 용돈을 쥐어 주셨다. 그리고 그 용돈을 어느 정도 모았을 때쯤이면 책방에 데리고 가셨다. 거기서 내가 읽고 싶어 하는 책을 고르게 하셨고 모아놓은 용돈으로 책값을 내게 하셨다. 긴 글을 좋아하지 않을 때였고 삽화 없는 책은 베개인 줄로만 알던 어린 시절이었다. 나는 표지가 화려하게 그려진 책을 우선 쥐어 들었다. 그리고 페이지를 후루룩 훑어 삽화가 얼마나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림이 너무 많으면 시시하였고 너무 적으면 지루할 것이라 겁내었다. 적당한 책을 골라 구입하고 어머니 손을 잡고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던 시절이 기억난다. 그 책을 쥐고 어머니 옆에 누워 읽었다. 내가 산 책이었고 나의 책이었다. 나는 나의 책을 읽으면서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면서 책의 권수는 점차 늘었다. 그런 내가 대견했는지 어머니는 심부름도 마치지 않은 나에게 후한 용돈을 주셨다.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때 즐겨 읽었던 책은 계림 문고에서 나온 세계 명작 전집이었어요. 제 또래의 분들은 기억하실 거예요. 표지나 사이 그림을 보건대 아마도 외국 서적을 무단 번역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작은 머리로 책들을 읽으면서 넓은 세상을 배웠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여행했다. 그리고 때때로 글을 썼다.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쓰게 만드는 일기를 제외하고도 나는 끄적끄적 여러 가지 글들을 만들었다. 어린아이답게 긴 글은 없었고 대부분 단편적이고 즉흥적인 것이었다. 읽기와 쓰기의 습관은 꽤 오래갔다. 중, 고등학교에 올라가 입시 공부에 치이게 될 때까지는 자투리 시간들을 모아 열중했던 것 같다. 


새 학년에 올라가면 적어내는 학적부의 기본 사항에는 항상 취미와 특기를 적어내게 되어 있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특별히 내세울 만한 것들이 없었다. 어떤 아이들은 축구를 좋아하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피아노를 잘 치기도 했지만 나는 모든 것들에 젬병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취미는 독서, 특기는 글쓰기라고 적어내곤 했다. 취미가 독서인 것은 맞는 것 같지만 특기가 글쓰기라고는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그 정도라도 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취미가 독서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독서는 사람이라면 꼭 해야 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의무가 취미가 될 수는 없었다. 만약 아버지가 나에게 취미를 왜 독서로 적어내었냐고 꾸중하셨다면 내가 드릴 말씀은 마땅치 않았다. 무척 곤란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아버지는 나의 취미를 따로 물어보신 적이 없었고, 내가 학적부에 독서를 취미로 올린 것을 알지 못하셨다.


그때는 교과서 이외의 책을 보면서 긴장감을 느끼거나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없다. 책을 읽는 것은 순수하게 즐거움의 덩어리였다. 부담 없이 배우고, 깨닫고, 상상하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깨어서 꿈을 꾸는 것처럼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한 번 쥔 책은 도중에 다른 것으로 바꾸는 적이 없었다. 그만큼 재미있었기 때문에 다른 내용의 책이나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시절 내가 대하던 책은 확실히 지금과는 다르다. 지금은 책이 부담스럽고 자주 지루하며 무겁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계속)


*표지 이미지 출처: 서강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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