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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Sep 20. 2022

나는 또 왜 이리 생겨먹었을까?-2

중년의 문제아

다시 눈을 뜬 것은 12시였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에는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내가 어디에 누워있었던 것인지 알아채지 못해 당황스러웠다. 잠깐 숨을 고르고 나서야 내가 어제 이른 저녁에 배부른 식사와 술을 마시고 책 읽는 척을 하다가 정신을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뜨기에도, 일어나서 활동을 시작하기에도 너무 이른 시간이다. 아니 오히려 이제 잠을 청하기 위해 누워야 적당한 시간이다. 안방으로 들어가 간신히 잠이 들었을 아내를 방해하기도 미안해 다시 소파 위에 다리를 뻗었다. 하지만 진하게 내린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막 들이켠 듯 정신이 말짱해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약 6시간 정도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숙면을 취했기 때문이다. 어정쩡한 기분이 들었다. 남들이 자기 시작하려는 한밤중에 나는 잠에서 완전히 깬 것이다. 자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몸을 세웠다. 어제저녁 조느라고 배 위에 놓아두었던 책이 도르르 굴러 떨어진다. 당연하게도 책갈피를 꽂아놓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읽던 페이지는 책장들 속에 어지러이 묻혀버렸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작은 스탠드의 불빛을 켠다. 적당히 환한 조명에 기대어 다시 읽기 시작할 부분을 주섬주섬 쥐어 편다. 그것을 찾기는 매우 쉽다. 내가 읽은 부분에는 연필로 까맣게 밑줄이 그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지러이 발자국이 난 눈밭 옆에 아무도 밟지 않은 한 귀퉁이가 남은 것처럼 나의 손길이 닿지 않은 페이지는 하얗게 빛난다. 나는 한 손에 연필을 쥐었다.


몇 년 전부터인지 나는 책을 읽는 습관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주어진 시간에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얻으려 했고 또 그것이 토막토막 머릿속으로 들어와 머물렀다. 읽은 것들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도, 또 읽은 것들을 기억하지 못해도 크게 아쉽지 않았다. 내게 남은 시간은 많기 때문에 언제든 그 책은 다시 읽을 수 있을 것이며 그때 이해하고 기억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책의 한 장 한 장이 절실하다. 읽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나에게는 아직도 그 책을 다시 들쳐볼 시간이 많이 남았건만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도 되는 듯 모든 것을 머리에 담으려 한다. 그렇게 나는 마음으로 글을 읽는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부분에 밑줄을 긋는다. 중요한 내용은 정리해서 문단 옆에 적어놓기도 한다. 당연히 책을 읽는 속도는 느려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젊었을 때 보다 책의 내용이 확연히 더 내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다. 그저 눈이 아닌 손으로 책을 대하면 책이 그 정성에 보답하여 나를 더 특별히 대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미신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공부하듯이 책을 읽고 중요한 부위를 표시했어요. 밑줄이 없는 데가 없죠? 공부 못하는 사람의 특징이죠. 다 중요해 보이거든요.


처음 이렇게 공부하듯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에는 그 강박증이 조금 심하였다. 나는 사색 볼펜을 구해 들고 네 가지 색으로 밑줄을 그었다. 밑줄이 삐뚤빼뚤 그려지는 것이 싫어서 자를 대고 긋기도 했다. 색깔은 중요도를 표시했다. 검은색은 조금 중요, 파란색은 더욱 중요, 빨간색은 반드시 기억하고 싶은 부위, 그리고 초록색은 나의 글을 쓸 때 인용하고 싶은 문장들이었다. 이렇게 표시하다 보니 책의 거의 모든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다 중요하게 생각되고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찍이 내가 경험했던 공부 못하던 친구들의 특징이었다. 그 친구들은 모처럼만에 책을 들고 공부를 시작하면 무엇이 시험에 나올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 한 줄 한 줄 모두 중요해 보이고 또 외워야 될 것처럼 생각이 드니 시간은 항상 모자라고 뇌는 과부하가 걸린다. 내가 그 짓을 하고 있었다. 부작용은 또 있었다. 한 번 정독한 책을 오랜만에 되새기고 싶어 다시 펴면 온갖 색으로 꾸며진 지면이 눈을 현란하게 하고 정신 사납게 만들어 책의 내용이 들어오지 않았다. 책 몇 권을 그런 식으로 읽다가 나는 사색 볼펜을 버리고 연필을 쥐었다. 밑줄은 핵심 문장에만 그으려고 노력하였다. 섣불리 나서려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말려가면서 불필요한 표시를 자제하였다. 그래도 책 내용을 모두 암기하려고 대드는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암기할 수만 있었다면 나도 말리고 싶지 않았으나 그러지도 못하면서 시간만 낭비하니 반드시 고쳐야 할 습관이다.


오늘도 나는 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고 있다. 마치 얼마 후에 이 책으로 큰 시험이나 치러야 할 것 같은 기세로 말이다. 문장 중에 연도라도 나올라 치면 동그라미 치고 외운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 이름이 나오면 옆에 둔 메모지에 적어본다. 주관식 문제의 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책의 내용이 무척 무겁고 어렵다. 문장은 무미건조하고 단어는 생소하다. 원문이 그러한 것인지 미숙한 번역 때문인지 우리말 해석이 매끄럽게 되지 않는다. 갑자기 깬 잠 때문인가, 아니면 지나치게 조용하고 어두운 주변 때문인가, 아니면 난해한 책에 대한 반항심 때문인가, 나는 그만 고개를 들고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계속)


* 표지 이미지 출처: 서강 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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