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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Sep 22. 2022

나는 또 왜 이리 생겨먹었을까?-7

중년의 문제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호기심과 즐거움이 발동하자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서둘렀다. 첫 책에서 접했던 그리스 3대 비극이 그리스 신화를 공부하게 만들었다. 트로이 전쟁 이야기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를 끌어당겼다. 신기하게도 이 책들에는 따로 삽화가가 없었다.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부터 인상파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지막지하게 유명한 화가들이 역사와 신화를 소재로 그려 놓은 명화들이 삽화로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읽던 책을 떨어뜨릴 만큼 아름다운 그림들에 빠진 나는 느닷없이 미술사 책들을 구해 읽었다. 화가와 명화들은 어느 날 난데없이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환희와 애환을 겪으면서 그것들이 묻어난 그림을 그려왔던 것이다. 그래서 미술사에서 붙은 불은 역사로 옮겨간다. 역사는 시대를 선도하는 위인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렇게 위인전과 그들의 업적을 찾아보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그리스 신화가 씌어진 책에 라파엘로가 그린 '요정 갈라테아'라는 그림이 나온다. 그러면 라파엘로에 대해 공부하게 되고 그 결과 그가 르네상스 3대 화가 중 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나머지 두 명의 화가는 그 유명한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이다. 당연히 그들의 작품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작품을 설명하는 책에 생각지도 못했던 마키아벨리가 등장한다. 그러면 관심은 갑자기 그가 쓴 '군주론'과 '로마사론'으로 옮겨 간다. 군주론은 메디치가의 군주를 위해 씌어졌다. 결국 메디치가 사람들을 알지 않을 수 없다.....


라파엘로의 요정 갈라테아. 이 그림에서부터 나비효과가 비롯된 겁니다.


'사고의 비약'이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관심과 열정의 비약'이라는 말은 익히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 나의 모습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게걸스럽게 책을 구하여 중독된 것처럼 글을 탐하였다. 책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히지 않았다. 워낙에 어려운 주제들이었던 데다가 뇌세포에 남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내용들이었다. 오랜 시간 읽어도 목이 아프지 않도록 책은 독서대에 비스듬히 누여졌고 한 손에는 사색 볼펜이 들렸다. 내가 모르던 것들에는 모두 밑줄을 그었다. 그 방면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은 없었다. 따라서 책의 모든 문장에 밑줄이 표시되었다. 그 결과 두 번은 읽지 못할 정도로 지저분한 책들이 만들어졌다. 처음 접한 사실은 무작정 외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동안 퇴화된 내 기억력은 더러워진 지면만큼 흔적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어렵게나마 남겨놓은 단편적인 기억들을 이리저리 맞추어가며 많은 생각을 하였다. 나이가 들어 그동안 경험이 쌓여서인지 작가들이 알려주지 않았던 여백이 내 추리로 메꿔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던 그림이 보였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나는 새로운 깨우침을 얻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 정도의 얕은 지식과 감정의 축적이 나를 건방지게 만들 줄 몰랐다. 원래 어쭙잖게 알수록 교만해지는 법이다. 책 몇 권 읽고 난 후가 가장 자신감이 붙을 때이다. 그러니 요즘도 코미디언이 헌법 강의를 겸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드넓은 바다가 시냇물처럼 얕아 보이고 높다란 하늘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실감 나지 않는다. 그때의 내가 그랬다. 나는 내가 느끼고 배운 것들을 기록하고 싶었다. 노쇠해져 가는 뇌세포에서 언제 사라져 버릴지 모르는 그것들을, 잊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어린 시절 꿈꾸었던 시나 소설로 풀어내길 원했다. 그래서 허접한 글 몇 편을 끄적였다. 그 글들을 읽고 고치고, 고치고 또 읽었다. 그리고 스스로 감동했다. 정말로 눈물을 흘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자신이 쓴 글을 직접 읽어보면 재미가 없을 수 없다. 씌어진 글과는 무관하게 '쓰고 싶던 생각들'이 이미 머릿속에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는 의도와 줄거리, 그리고 간간이 섞이는 유머를 낱낱이 알고 있는 사람은 글쓴이뿐이다. 필력이 따라가지 못하면 독자는 알아채지 못한다. 그래서 작가와 독자 간의 괴리가 생긴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재미난 글이 독자들에게는 하품을 유발하는 지루한 잡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친구들을 상대로, 얼마 전 재미있게 들었던 농담을 전해줄 때와 마찬가지이다. 내가 들을 때는 자지러질 듯이 웃겼지만 똑같은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 해주면 그들은 웃지 않고 오히려 무안해한다. 그 자리에서 웃고 있는 사람은 말하는 나뿐이다. 입담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이야기 도중에도 스스로 웃겨 낄낄거리느라 김을 다 빼놓으니 들어주는 사람들도 고역일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이 그러했던 것 같다.  


나는 나의 역작들(?)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권하였다. 아이들은 당연히 거부했다. 아내는 마지못해 읽어줬고 조언도 해줬다. 지금 생각해도 내 아내는 참 착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가여워서 쉽게 호의를 보여주면 안 된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무례하게 부탁하고 또한 강요까지 할 수 있다. 나는 아내에게 내가 쓴 글들을, 그리고 쓰고 있는 글들을 읽어 보라고 당당히 요구하게 되었다. 그것에 지친 아내는 나에게 브런치에 내 글들을 올려볼 것을 제안하였다. 참으로 현명한 작전이었다. 그 시답지 않은 글들을 읽는 고통, 그리고 모진 말을 해주고 싶으나 가족이라 차마 그럴 수 없는 난처함을 누군가에게 떠맡기고 싶을 것이었다. 그 누군가가 바로 브런치의 독자들이었다. 그들은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고 내 글에 냉정한 평가를 해줄 것이다. 그들에게서 혹독한 매질을 당하고 나는 다시 돈키호테 같은 작가가 아닌 순한 독자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계속)


*표지 이미지 출처: 서강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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