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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Sep 23. 2022

나는 또 왜 이리 생겨먹었을까?-8

중년의 문제아

막상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플랫폼에 글을 올리자니 선뜻 내키지는 않았다. 시장통에 좌판을 벌이고 준비해온 상품을 팔러 나온 상인의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귀찮은 가입 절차도 거쳐야 했다(나는 게을러서 웬만한 온라인 계정도 잘 만들려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불쾌했던 것은 그깟 게 뭐 그리 대단한 사이트라고 글을 올릴 자격을 얻기 위해서 사전에 심사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오래된 습관대로 다른 일을 하며 이 일을 뭉갰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갑자기 방안의 전화벨이 울렸다. 교제가 활발하지 않은 나에게 휴대폰이나 사무실 전화가 걸려 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평균 하루에 한 통이 채 되지 않고 그나마 그것도 잘못 걸린 전화이거나, 광고 전화, 혹은 여론 조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약간의 통화 공포증(call phobia)이 있기 때문에 가족을 포함해서 아는 사람들과의 연락은 주로 메시지나 이메일을 이용한다. 또 엉뚱한 사람을 찾는 전화가 분명할 것이라는 생각에 짜증스럽게 수화기를 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나를 찾는 전화였다. 


"선생님, 홍보팀 ㅇㅇㅇ입니다."

"네, 무슨 일이신지?"

"저희가 한 달에 두 번씩 병원보 발행하는 건 알고 계시죠? 거기 실을 원고를 부탁드릴까 하고요."


잘 알고 지내던 홍보팀 직원이었다. 오랜만에 전화를 해서 갑자기 원고를 부탁한다. 그렇다면 내가 요즘 소설을 쓰고 있다는 정보를 어디선가 들었다는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주변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흘린 적은 없었다. 설마 내 글을 읽어주는 데 질린 아내가 병원 홍보팀에 제보를 한 것일까? 아니, 그 정도로 내 글을 혐오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생각해 보니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리는 격으로, 준비된 자에게 청해지는 부탁이었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었다. 좋은 기회였다. 그렇다고 너무 선뜻 응하면 체면이 없어 보인다. 


"제 소설들을 연재하고 싶다는 말인가요? 하지만 그것들은 그저 저만 읽고 즐기려고 쓴 것인데요.(한번 튕기기)"

"네?"

"차곡차곡 모아서 문학상 응모하려고 준비 중인데 어디에라도 미리 발표하면 김이 빠질 것 같아서요.(과대과장 광고)"

"무슨 말씀이신지?"

"그래도 홍보팀에서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보내드리겠습니다.(목적 달성) 그런데 얇은 병원보에 싣기에는 분량이 좀 되는데요.(거드름)"


이 정도면 적당히 빼는 척하면서 의도했던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알맞은 수의 제3의 독자들에게 내 글을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홍보팀 직원은 당황했고 그녀의 당황은 곧 다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 그런 게 아니고요, 선생님. 저희가 '이야기가 있는 산책'이라고 흥미로운 취미를 가진 직원들의 취미 소개를 매회 두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4-5회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걸 부탁드리려고요."

"네?(큰 실망)... 어(당황)... 그런데... 제가 별다른 취미가 없는데요.(민망함에 빨리 전화 끊을 생각뿐)"

"취미가 전혀 없으세요? 여가 시간에 무어라도 즐기시는 일이 있지 않으세요?"

"여가 시간에는 주로 누워있는데요.(현실고백)"

"음... 그러시구나... 취미가 아예 없는 분도 처음 뵙는 거 같아요... 어쩌나... "

"죄송합니다.(수치심에 통곡)"

"아참, 그렇지. 아까 소설 쓰신다고 하셨잖아요? 그것도 보기 드문 취미인데 그걸 소개해 주시는 것은 어떨까요?"

"아.... 그건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자포자기)"


나는 부정의 언질을 주었으나 그녀는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펑크 난 원고가 급했던 홍보팀의 의지가 더 강했다. 타의 반에 또 타의 반으로 나는 청탁받은 원고를 쓸 수밖에 없었다. 소설 습작이라는 취미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막막했다. 글쓰기를 취미로 한다는 사람이 한 줄도 글을 못 쓰고 있는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나는 큰 고민을 가진 사람처럼 밤마다 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낌새를 눈치챈 아내가 조용히 다가왔다.


"요즘 무슨 걱정거리 있어? 왜, 환자가 안 좋아?"


나는 이차저차 설명을 하였다. 그동안 내 글을 읽어주기에 지쳤던 아내는 마침내 큰 짐을 던 것처럼 기뻐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몇 달 동안 물먹은 솜처럼 자기에게 더 무거운 짐이 되리라는 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억지로 몇 줄씩 원고를 썼고 실시간으로 아내에게 검사를 받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정성껏 조언을 해주고 원고를 다듬어주던 아내의 인내심은 금세 바닥이 났다. 도움을 청하는 메시지에 대한 답신이 점점 더뎌졌고, 읽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더니, 나중에는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쓴 글이 내 글 목록 앞부분에 실린 '초보 작가의 고백' 시리즈 5편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아내가 잘 봐주지 않았기 때문에 글의 질이 점점 퇴보한다. 관심 있는 독자님들은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란다. (안 읽으실까봐 링크해 드립니다.)


https://brunch.co.kr/@osdlee/2

https://brunch.co.kr/@osdlee/5

https://brunch.co.kr/@osdlee/6

https://brunch.co.kr/@osdlee/33

https://brunch.co.kr/@osdlee/34

(계속)


*표지 이미지 출처: 서강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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