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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Sep 28. 2021

나는 왜 글을 쓰려했는가

초보 작가의 고백-1


공자(孔子)님은 “나이 오십에 천명(天命)을 깨달았다”라고 했다. 그래서 쉰을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고 한다. 솔직히 나는 우둔(愚鈍)하여 아직 천명을 모른다. 남들이 천명을 깨우칠 그 나이에 대신 나는 제2의 사춘기(思春期)를 심하게 겪었다. 가까운 글씨가 먹물로 쓴 것처럼 번져 보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그렇게도 탐닉(耽溺)했던 전문 분야의 공부와 논문, 밤을 새우면서도 할 수 있을 것같이 재미있던 수술들이 왠지 소원(疏遠)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 놓은 것들이 하찮게 생각되었다. 그 하찮은 것마저도 무슨 쓸모가 있을지 혼란스러웠다. 나의 일생을 거부당한 것 같았다. 진짜 사춘기 소년처럼 이런 글도 끄적였다. 유치하고 쓴웃음 나지만 그래도 들이밀어 본다.


... 고독감이 깊어지면 자기 몸이, 영혼이 조각조각 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그 조각 중의 하나가 되어서 나머지 조각 들과도 떨어져 있게 되는 거지요. 나 혼자보다도 더 외로운 거예요. 저기 떨어져 있는 나의 조각 들이 나를 도와줄 수 없어요. 도와주기는커녕 보이지도 않을 거예요. 철저히 혼자, 아니 한 조각뿐인 거지요. 나의 한 조각. 지금 나는 그런 고독을 느끼고 있어요. 가끔 있는 일이죠....


나는 나의 영혼(靈魂)이 조각난 듯한 고독감(孤獨感)을 느꼈고, 그것은 우울함으로 이어졌다. 수렁에서 빠져나올 밧줄이 필요했고 그것이 나를 즐겁게 해 줄 취미 생활들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얼마 되지 않는 여가(餘暇)를 메꿔왔던 취미들을 돌아보고,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 보려고도 했다. 첫 번째는 골프였다. 전공의 2년 차에 골프 천재라 불리며 처음 클럽을 잡았던 나의 구력(球歷)은 이미 25년이 넘었다. 하지만 데뷔 초기의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실력은 소위 백돌이(百乭伊?)를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선천적으로 몸의 회전이 잘되지 않는다. 그 결과, 한참 뒤늦게 골프를 시작한 동료들에게 추월당하고, 내기 골프에서 기부(寄附)에 가까운 일방적 착취를 당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역시 골프는 돈이 많이 드는 운동이었다. 그렇게 나는 골프에 흥미를 잃었고, 사실 최근 10년간 클럽을 잡지 않았다. 두 번째로 생각한 것은 등산이었다. 하지만 두 발바닥의 전면(全面)이 지면에 닿지 않으면 심한 현기증을 일으키는 특이한 신체 구조 때문에 산길을 한가로이 걸으며 자연을 만끽하는 것도 자신이 없었다. 다음 생각한 것은 달리기를 포함한 운동들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운동 유발성 천식과 땀으로 인해 악화되는 아토피성 피부염이 있다. 현기증과 함께 천식과 피부염이 겹친다면 생명이 위독할 가능성도 있다. 이 역시 나만을 의지하고 있는 가족들을 위해 포기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말하면 사람들은 내가 군대 가기 싫어 꾀병을 만들어내는 사람처럼 운동하기 싫은 핑계를 댄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사실이다.


두 발바닥이 땅에 닿고, 몸을 회전시킬 필요도 없으면서, 심박수가 증가하지 않고, 땀도 나지 않는 취미라면 독서(讀書)가 있었다. 자연스레 나의 관심은 책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사나흘에 한 권꼴로 이런저런 책을 읽었다. 주제를 정하여 읽기보다는 말 그대로 잡식성(雜食性)이었고 굶주린 듯 게걸스러웠다. 수개월의 독서 끝에 허기(虛飢)를 조금 면한 듯 하자 난데없는 한 가지 욕구가 생겨났다. 내 글을 써보고 싶다는 것, 내 책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실 누구나 그렇듯 나는 어려서부터 문학 소년이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아니다) 5학년 때 서울시 어린이 글짓기 대회에서 동시 부문 가작을 수상했다. 으레 서정시(抒情詩)만 쓸 줄 알았던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나는 놀랍게도 참여시(參與詩; 현실 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고 그 변혁을 촉구하는 내용의 시)로 상을 탔다. 시의 제목은 휴지통, 내용은 길거리 쓰레기를 휴지통에 제대로 버리자는 것이었다. 국민학교 학생이 쉽게 쓸 수 없는 시였다. 심사위원들은 나의 작품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사회에 미칠 여파를 두려워하여 차마 장원에 올리지는 못하였다는 소문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될 성 부른 떡잎이었던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몇 번의 백일장에서 시 부문 장원(壯元)을 수상했다. 여기서 잠시 고백하지만 내가 산문(散文) 대신 시(詩)에 주력하였던 데에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천성적인 게으름이 한몫하였다. 아무래도 시는 산문보다 빨리 쓸 수 있고 따라서 남은 시간을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학창 시절부터 글쓰기는 나의 꿈이었고 언젠가 성인이 되면 셰익스피어처럼 대사가 시로 이루어진 멋진 희곡을 쓰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꿈은 잊혀졌다. 격정(激情)이 뿜어져 나오는 무대 위 대사(臺詞) 대신 메마른 의학 논문만을 쓰고 있었다. 내 글을 읽고 눈물 흘려줄 독자들의 얼굴을 떠올리기는커녕, 내 논문에 토 달기 좋아하는 심사위원들을 구슬릴 궁리만 하였다. 그렇게 삼십 년이 흘렀던 것이다. 그 오래전 잊혀졌던 꿈이 책을 읽으면서 불현듯 다시 살아났다. 나는 다짐했다. “내 글을 쓰자. 내 책을 만들자.”

우습게도 나의 비장한 글쓰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이 글에 한자(漢字)를 많이 사용한 이유는 상당수(相當數)가 한자로 이루어진 우리말의 미묘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도,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의 혼동을 막아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도 아니다. 사실 나의 한자 실력을 자랑하기 위해서이다. 그 내막은 2편에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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