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작가의 고백-4
나는 직업 작가가 아니다. 얼마 전 흥행에 실패한 전공 분야의 서적 세 권을 출판한 것이 전부다. 그리고 이제 전공과는 무관한 소설 몇 편을 끄적이고 있다. 나의 소설들은 몇몇 굵직한 문학상, 신인작가상에 응모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응모(應募) 한 것이지 수상(受賞)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당연히 등단(登壇)도 하지 못하였다. 몇 분의 지인은 잘못 알아듣고 수상이나 등단을 축하하는 축전과 선물을 보내기도 하였다. 다시 돌려드리기 부끄러워 간직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죄송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는다. ‘그까짓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씀으로써 얻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글을 통해 자신을 고해(告解)한다. 아무리 친한 친구나 가족에게도 하지 못할 말들이 있다. 그것을 나는 글에게 고백한다. 조용히 나의 과거와 잘못을 되뇐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혼자만의 비밀을, 바람 부는 갈대밭에 외치고 나서야 해방을 얻은 그 이발사가 된 느낌이다. 아무도 용서해 주지 않았지만 고백한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나의 상처를 드러내고 어루만지며 새살이 돋아 덮이도록 도와준다. 물론 그러는 과정에서 날카로운 통증의 기억이 다시 살아나기도 하지만 그 통증은 이전에 느끼던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 치유로 향하는 기분 좋은 것이다. 다음은 나의 소설 ‘백한 번째 사람들’의 결말의 일부이다.
그래, 귀먹은 내가 거실에서 들리는 그 조그만 소리를 들을 리 없었다. 그것도 잠에 취해 비몽사몽 중이던 새벽에. 나는 그저 내 마음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나 자신을 스스로 탓하며 미워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던 나를, 나의 아내는, 아들은, 그리고 딸은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아무 일 기억 안 난다는 듯 쉽게 용서해주었다. 그들은, … 내가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자신했던 그 백 명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 너무나도 낯선 백한 번째 사람들이었다.
고통과 위안, 용서와 치유가 반드시 실존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나는 글을 통해 일부러 더 큰 아픔의 극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으며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낄 수도 있다. 50대의 보수적이고 조용한 아저씨인 내가 20대의 아리따운 처녀가 되어 그들만이 만끽하고 있을 만한 발랄함과 설렘을 경험할 수도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내가 동경하던 역사 속의 인물이 될 수 있으며 마치 그들처럼 고풍 창연 한 건물 속에 기거하며 그들에게 닥친 치열한 갈등과 고뇌를 대신 느껴볼 수도 있다. 다음은 나의 소설 ‘미켈란젤로의 고백’의 일부이다. 이 소설에서 나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삶을 살아볼 수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지 아십니까? 한낱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미켈란젤로)의 무릎을 꿇게 만들고, 내 눈에 눈물을 터뜨리게 했던 당신(레오나르도)의 선과 당신의 색을 따라 해 보려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오, 하느님, 그리고 나는 ‘천지창조’(시스티나 천장화)를 통해 그것이 내 손으로 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천장화는 미켈란젤로의 선과 색이 아닙니다. 레오나르도가 미켈란젤로를 통해 자신의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 내가 다시 팔라치오(피렌체시 시의회당)에 서서 벽화를 완성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미켈란젤로의 또 하나의 ‘다비드’가 될 수 없습니다. 레오나르도의 또 다른 ‘최후의 만찬’이 될 것입니다.
이렇듯 글은 내가 살지 못했던 또 다른 인생에 다다르게 한다. 혹자는 물을 지도 모른다. ‘그런 경험은 글을 읽으면서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남이 쓴 글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간접 경험은 이미 깔려있는 선로를 따라 운행하는 기차 여행만큼이나 단조롭다. 반면에 글을 쓰면서 느끼는 상상력의 자유로움은 아무런 길도 나지 않은 황량한 벌판에, 나만의 길을 내었다 지우며 또 그려나가는 것처럼 거의 무한대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나의 소설 ‘도와줘요, 하이드 양’의 일부를 소개한다. 어두운 성장 과정을 거친 내성적인 여대생이 우연한 기회에 활달하고 매력적인 처녀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면서 벌어지는 상황이다.
와인이 혀를 간지럽히다가 목으로 넘어갔어요. 정말 맛있긴 맛있더군요. 그 거무튀튀한 액체가 왜 ‘신의 물방울’이라고까지 불리는지 알겠더라니까요. 와인이 식도를 타고 뱃속에 다다를 무렵 갑자기 꿈틀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 나는 깨달았어요. 그 녀석이 다시 깨어나고 있다는 것을. … 녀석은 술을 마시면 나타나는 거였어요. 뱃속에 숨어 사는 또 다른 … ‘미스 하이드’ 가요.… 나에게서 나왔지만 나와는 완전히 다른 녀석이거든요. 나는 그제야 무겁던 입술을 떼었어요. … “나, 선배랑 키스하고 싶어요.”
글이 반드시 과거와 현재에만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글은 예상외로 미래지향적이다. 글을 씀으로써, 일인칭인 나의 밖에 존재하는 삼인칭인 내가 매우 객관적인 시각으로 새로운 길을 제시해주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글은 나를 인도한다. 나는 한동안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던 적이 있다. 뜬금없이 새벽 2~3시경에 잠이 깨어 다시 잠들기 어려웠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덩그러니 혼자 내던져지는 기분이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혼자만의 시간에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했던 나는 불면증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 그리고 그 소설의 주인공이 나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었다.
… 새벽에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히프노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잠의 신)의 은총을 받은 것이고, 새벽잠을 거른 동준 씨(주인공, 신경외과 의사)와 윤 선배는 모이라이(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들, 실을 나누어 주는데 이것이 곧 생명이다)로부터 몇 시간 치의 생명의 실을 더 받은 것뿐이다. 누구든 축복받지 않은 사람은 없고, 또 축복받은 것을 감사하며 살아가면 된다. 오늘은 뇌종양 환자 두 명의 수술이 있는 날이다. … 오늘 세 시간 치의 생명의 실(불면증)을 더 받은 동준 씨는 몇 시간 후, 그들에게 수십 년 치의 실을 더 나누어 주려고 한다.
주인공은 나에게 불면증을 운명의 여신들로부터 받은 몇 시간의 추가 생명, 즉 축복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 소중한 시간을 충실히 보내려고 노력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불면증도 거의 완치되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글이라고 실망하지는 않는다. 수백만의 독자가 쏟아내는 찬사 이상으로 내가 쓴 변변치 않은 글은 이미 나에게 큰 위안과 용기, 지혜를 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