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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Oct 15. 2021

나는 오늘도 쓰고 또 묻는다.

초보 작가의 고백-5

1) 오늘도 쓰고 묻는다(埋, bury).

시경(詩經)으로부터 이어진 약 3천 년간의 한시(漢詩)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을 꼽으라면 이백(李白, 흔히 이태백으로 불림)과 두보(杜甫)가 서로 첫손가락을 다툴 것이다. 이 두 시인은 공교롭게도 1천4백 년 전 중국 당나라 시대에 12년 차이를 두고 함께 태어나 같은 시공간에서 활동했다. 심지어 두 사람은 사이도 좋아서 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었던 적도 여러 번이다. 이백은 술(酒)과 달(月)의 시인이었다. 말 그대로 술 거나한 달밤만 되면 단숨에 명시 한편을 지어내는 것이 특기인지라 그 모습이 마치 신선과 같다고 하여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반면에 두보는 시 한 편을 지어놓고 수십, 수백 번의 퇴고(推敲, 원고의 수정)를 거듭해 완성형으로 만들어 내는 시인이었다. 오죽하면 두보가 죽은 후 그의 집 마당을 파보니 그동안 시구(詩句)를 수정하느라 씌어진 파지(破紙)가 몇십 항아리 나왔다고도 한다. 이렇듯 마치 수행 과정과도 같은 그의 시작(詩作) 습관 때문인지 그를 시의 성인, 시성(詩聖)이라 부른다. 나는 한시를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시가 어떻게 차이 나는지 잘 모른다. 다만 중국사 전체를 통해 한시의 쌍벽으로 불리는 두 시인의 작업 스타일이 너무 대조적이라 그것이 흥미로울 뿐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일필휘지(一筆揮之)의 능력을 가진 이백이 천부적 천재라고 하면 좀 더 나은 시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시구를 맞추어 나가는 두보는 노력형 천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 중에도 특정 분야에서 남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천재들이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 중 대부분은 이백형 천재가 아닌 두보형 천재에 가까울 것이다. 역사상 우리가 알고 있는, 아니 현재에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천재들은 그저 남보다 조금 우수한 능력을 타고 태어나 그것을 훌륭하게 잘 갈고닦아서 그 가치를 극대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백보다는 두보를 흉내 내려 노력한다. 물론 두보를 흉내 낸다고 해서 천재가 되겠다거나 명작을 남기겠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글을 쓰는 데에 있어 결코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지 못하였다. 지금 쓰고 있는 글들이 형편없기는 하지만 그것들을 갈고 다듬어서 그나마 조금 덜 부끄러운 글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더 많은 글을 쓴다면 그러한 확률은 더 높아질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글을 부지런히 쓰고, 지우며, 읽고, 고친다. 그래서 나의 마음속 마당에는 구겨버린 습작으로 가득 찬 채 묻혀버리는 파지 항아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쓰고 또 묻는다.


2) 오늘도 쓰고 묻는다(問, ask).

나의 글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자신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서 호응을 얻는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글은 일차적으로 나를 위해,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것이다. 글을 준비하면서, 글을 쓰면서, 쓴 글을 읽으면서 매번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나는 무엇을 쓰고, 나는 왜 쓰며, 나는 어떻게 쓰는지.’ 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나는 발전하다. 나는 위로받는다. 가끔은 나의 재미난 말버릇을 찾아내어 혼자 웃기도 하고, 내가 많이 쓰고 있는 단어들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헤아려 보아 그 당시의 심경을 파악해 보기도 한다. 반복적으로 물어보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상처를 찾아내기도 하며, 그것을 쓰다듬어 주기도 한다. 때로는 이미 딱지가 앉은 상처를 다시 헤집어 덧내기도 하고, 꾸짖고 분노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나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기에 글을 쓰면서 되도록 자신을 용서하고 이해하려 한다. 상처를 아프지 않게 흉터 없이 낫게 치료하려 한다. 또한 또 다른 상흔을 입지 않도록 소중히 보듬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도 쓰고 또 묻는다.  


3) 오늘도 쓰고 묻는다(染, stained).

나는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나의 책상에 홀로 앉아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나만의 일에 열중하거나 공상에 빠져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한때는 내가 대인기피증이 있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 걱정했을 정도였다. 무인도에 혼자 떨어져도 외롭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는 허황된 자신감을 상당히 오래 지니고 산 적도 있다.

글을 쓰다 보면 주인공 주변에 그와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다. 흔히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수많은 갈등을 형성하고 이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느 소설, 희곡에나 기본 줄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사람만이 등장하는 모노드라마(monodrama)를 쓸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등장하는 사람은 한 사람일지 몰라도 그가 털어놓는 갈등과 고통, 화해와 만족은 반드시 등장하지 않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나는 가족, 동료, 그리고 모르는 타인들을 생각할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다. 내가 바라보는 그들의 희로애락이 내가 쓰는 글 속에 그대로 녹아들기를 바란다. 또한 글을 쓰면서 느끼는 나만의 감정이 그대로 그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나는 그들을 품고, 때로는 그들의 품속에 안긴다. 글을 쓰면서 나는 주변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그들에게 더욱 동화될 수 있었다. 결국 그들에게 나의 색을 물들이며, 그들의 색을 나에게 물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쓰고 또 묻는다.  


* 초보 작가의 고백을 마치며- 지금까지 두서없이 지껄인 혼자만의 넋두리를 참고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전에 쓴 글에서 미리 자수(自首)했듯이 저는 아직 글로 어떠한 업적도 내지 못한 견습 작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글이 실리는 동안 여러분들이 분에 넘치는 응원을 보내주셔서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병원에는 저보다 글을 더 잘 쓰시는 분들도 많고, 더 나아가 이미 등단까지 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공자님 앞에서 문자 쓰듯, 그분들이 읽어보실지도 모르는 병원보에 이렇게 장시간 못난 글을 게재하게 되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아울러 소중한 지면을 축낸 것 같아 직원 여러분께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빈 수레가 더 요란하듯, 이제 막 글쓰기를 시작한 유치한 애송이 시절이 가장 입이 근질거릴 때이려니 생각하시고 너그러이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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