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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벽돌 Sep 28. 2021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있는가

초보 작가의 고백-3


별을 따고 싶다면 역설적으로 내 발끝이 지금 어디 닿아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내가 원하는 색깔의 글을 쓰고 싶다면 지금 쓰고 있는 내 글이 어떤 색깔을 띠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어떤 물감을 더 풀고 얼마만큼의 물을 더 타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보통 자기 글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있다. 아무리 허접한 글도 자기가 써 놓은 것이면 마치 문학상 수상작이나 되는 것처럼 감동을 받기 십상이다. 나도 내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독자가 없는 나의 글은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기회도 없다. 거의 유일한 독자는 내 아내일 뿐이다 (내 아이들도 내 글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다행히도 아내는 과거에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쓰며 지내던 사람이었다. 이건 비밀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내도 글에 대해 그렇게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마다 아내에게 우선 심사를 받는다. 어떨 때는 조바심이 나서 한 구절, 한 구절 쓸 때마다 심사받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다른 일로 바쁜 아내는 짜증을 겨우 감추고 단호한 평가를 내려준다. 그 심사평은 보통 말을 막 배운 어린아이들이 쓰는 말들처럼 외마디 문장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다시 써’, ‘재미없어’, ‘그건 지워’ 같은 식이다. 그런 아내의 평가와 그동안 내 소설을 슬그머니 보여줬던 몇몇 지인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나의 글의 색깔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1. 재미없다.

내 글은 재미가 없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다빈치 코드’만큼이나 흥미진진한데 말이다. 공통된 의견은 내 소설은 갈등과 기승전결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소설은 등장인물 간의 갈등 구조를 어떻게 증폭시키고 폭발시켜 마무리 짓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그것이 쉽다면 우리나라 사람 반은 작가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쉽게 풀어내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우리가 삼류 만화, 무협지, 막장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소재들 말이다. 출생의 비밀, 우연의 일치, 음모, 권력자나 거부(巨富), 복수, 연애, 신분 상승, 일확천금이나 내공 습득 같은 것들을 곁들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사용하면 갈등도 쉽게 만들 수 있고 알아서 분위기가 고조되며 해결하기도 한결 간편해진다. 맛이 덤덤한 국물을 단번에 ‘그래, 이 맛이야’로 바꿔 줄 수 있는 마법의 조미료, 라면 스프와 같은 것이다 (저렴한 비유 죄송합니다). 저질이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누구나 명작으로 꼽는 고전 중 하나 알렉산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보라. 위에 말한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들어 있다. 어렸을 적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감옥을 탈출하는 장면이나 통쾌한 복수로 원수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리는 장면을 읽다가 남의 일인 양 무심히 책을 놓고 잠을 이룰 수 있었던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소재들로부터 강한 흥미를 느끼고 흥분하고 또 통쾌해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막 걸음마를 시작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부터 우리 혈관 속을 타고 흐르는 변하지 않는 흥미 유발 인자들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앞으로는 나도 이런 요소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글의 재미를 배가시키기로 하였다.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서운 법이라 여러분은 곧 ‘막장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2. 너무 논리적이다. 

감성과 이성은 항상 반대말처럼 사용된다. 이성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과학이며 과학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논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리로 감성을 자극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이 문장들도 삼단논법으로 구성되었다). 30년 동안 순수 문학보다는 과학 논문에 친숙해 있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논리적 표현에 길들여져 있다. 목줄에 매여있는 맹수는 처음에는 탈출하려 발버둥 치다가도 적응이 되면  줄이 없어져도 그 길이 밖으로 벗어나기를 불안해한다. 학창 시절 상상력이라면 남부럽지 않았던 나이건만 이제는 과학과 논리에 어긋나는 생각만 하여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그런데 이런 습관이 글을 쓰는 중에도 아무 때나 튀어나와 산통을 깬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 내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작품을 구상해 내었다고 하자. 하지만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놈의 논리와 과학이 끼어들어 ‘14살짜리가 어떻게 목숨을 건 사랑을 해?’ ‘하필이면 왜 원수 집안사람을 사귀어? 결혼해봐, 다 똑같은데’ ‘죽었다 깨어나는 약이 어디 있어? 성분이 뭐야?’ 이런 식으로 딴죽을 거는 것이다. 이러니 아무리 감동적인 줄거리와 문장이 구슬처럼 머릿속을 돌아다녀도 그것들을 값비싼 보석으로 꿰어낼 수 없다. 훌륭한 소설을 쓰기 위해서라면 때로는 논리를 건너뛰어 억지를 부릴 줄도, 짐짓 모르는 체하며 딴청을 피울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르겠다. 50대 아재에게 라면 누구에게나 무료 아이템으로 장착되는 최강의 무기 ‘뻔뻔함’이라는 것이 해결해 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변변한 작품 하나 없는 내가 병원보에 이런 글을 싣고 있다는 것이 바로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용기가 생긴다.


3. 입담이 부족하다. 

소설가는 입담꾼이다. 똑같은 얘기라도 누구는 더럽게 재미없게 하고, 누구는 귀를 쫑긋 세우게도, 자지러지게도 하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그 차이가 바로 입담이다. 입담은 소설에서는 소위 글발 (흔히 글빨로 발음된다)로 발휘된다. 등장인물들이 마음속으로 하는 생각, 입으로 하는 말, 그리고 몸으로 하는 행동 등을 문장으로 잘 엮어내는 것이 글발이다. 생각, 말, 행동이 맛깔스레 표현되려면 그 인물의 성격이 잘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많은 작가들은 말한다. ‘등장인물들을 확실히 만들어 놓으면 그들이 알아서 말을 하고, 행동한다. 작가가 하는 일은 그저 그것들을 받아 적는 것뿐이다’. 이른바 인물들의 캐릭터 설정이 완벽하게 되어 있으면 그들이 살아나서 작가의 귀에 대고 끊임없이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것이다. 보통 이런 상황에 놓이면 등장인물들이 쏟아 내는 말들이 너무 빠르고 많아 받아 적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나는 물론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랬다면 입담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받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노력하다 보면 그런 날이 한 번쯤은 오지 않을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많고 빠른 대사를 제대로 받아 적기 위해 타이핑 연습을 열심히 하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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