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문제아
나 말고도 똑같은 메일을 받아본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말로 시작하는 것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두둥)
이 문장의 뒤에는 "sorry"라는 커다란 초록색 영문이 필기체로 흐릿하게 배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기분 나쁜 말일수록 표현은 매우 정중하다. 요즘 강조되는 공감의 표현을 첫머리에 앞세우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깜냥도 안 되는 내 솜씨가 안타깝다는 것인지, 재능 있는 작가 지망생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는 그네들의 심정이 안타깝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묘하게 기분 상하는 표현이었다.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브런치팀에게 나를 떠받들어 달라고도 안 했고 그저 글 몇 편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것뿐인데 누구를 모시고, 못 모시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뒤따라오는 말들도 심사를 뒤틀리게 할 만했다.
"신청서에 성심성의껏 적어주신 내용을 고심하여 검토하였으나
보내주신 신청 내용만으로는 브런치에서 좋은 활동을 보여주시리라 판단하기 어려워
부득이하게 모시지 못하게 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보내주신 신청 내용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워..." 이 말도 모순이 있다. 내가 적어낸 신청서와 보낸 글 만으로 판단하기 힘들다면 처음부터 더 자세히 적으라고 하거나 더 많은 글을 보내달라고 했으면 되지 않는가?
"브런치에서 좋은 활동을 보여주시리라....", 도대체 '좋은 활동'이라는 게 무엇인가? 구독 수를 늘리는 것인가, 독자들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이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주는 것인가? 아니, 기준이라도 정확히 알려줘야 나도 소위 '좋은 활동'이라는 것을 해볼 수 있을 것 아닌가?
불합격 소식에 심사가 꼬일 대로 꼬인 나는 이메일의 문장 하나하나를 꼬투리 잡으며 투덜거렸다. 최근 몇 주 동안 직원들의 응원에 한껏 고무된 기분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는 실망감과 분노로 손을 떨면서 그날 하루를 보냈다. 브런치 낙방이 나의 인생을 갉아먹을 정도로 큰 사건은 아니었지만 왠지 어깨를 떨어뜨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기운이 나지 않았고 흥도 잃어버렸다. 쉽게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오랫동안 봐왔던 아내는 금세 눈치를 챘다.
"브런치에서 연락 왔어?"
"몰라.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현실 부정이자 마지막 자존심)"
"아직 연락 안 왔을 리가 있나. 이메일 한번 들여다 보지 그래?"
"나중에 보지 뭐. 급하게 챙겨야 할 일들도 있고.... (들킬까 봐 불안)"
사실 한밤중에, 그것도 침대 위에서 급하게 챙길 일이 뭐가 있으랴. 궁색한 변명일 뿐이었다. 그런 것에 속을 아내가 아니다.
"아니야, 생각난 김에 지금 찾아봐. 궁금하잖아. (집요)"
"음... 나중에 볼게. (난처)"
"나중에 볼 게 뭐 있어? 지금 봐봐. (집요 x2)"
더 이상 변명하기 어려웠던 나는 이미 열어봤던 이메일을 그제야 찾아보는 척했다. 다시 본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질 턱이 없다. 물끄러미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며 애써 담담한 체했다. 아내는 내 손에서 폰을 낚아채어 직접 확인하였다.
"푸하하하.... 떨어졌네. 거봐. 브런치 수준이 꽤 높다니까... 어쩐지 자기가 요즘 너무 기고만장하더라니."
한편으로는 창피하고 한편으로는 분해서 나는 바로 베개를 베고 모로 누웠다. 아내에게 등을 돌린 채 말이다. 더 이상의 조롱은 듣고 싶지 않아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듣는 것은 귀인데 듣기 싫은 말을 안 들으려고 눈을 감는 것은 억지이자 회피이다. 눈치 빠른 아내는 더 이상 놀리지 않았다. 낙담은 제법 심했지만 잠은 잘 왔다.
다음 날 아침에도 나는 일찍 출근했다. 이대로는 분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브런치의 작가 신청을 다시 하고 싶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신청서를 적었다. 지난번과는 다르게 좀 더 길고 자세하게 말이다. 지금은 오래되어 정확히 무슨 말을 적어 넣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동안 브런치의 훌륭한 글들을 보면서 제 인생을 돌아볼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글들에 감동받아 눈물을 훔친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 같습니다..... 저도 저의 글을 통해 다른 이들의 가슴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고, 팔다리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런 좋은 글들을 선정하고 발행해주시는 브런치팀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저에게도 글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마치 만년 백수가 원하던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간절한 자기소개서를 쓴 것 같다. 어제까지 그렇게 브런치팀을 욕하던 사람의 글은 아니었다. 브런치 작가가 되기 위해 나는 자존심을 팽개쳤고 비굴함에 빙의되었다. 누구인지, 몇 명인지도 알 수 없는 그 '브런치팀'의 안목과 비전을 극찬하면서 나는 내 열 손가락이 오그라드는 경험을 했다. 그 굽은 손가락들을 연신 펴가면서 '브런치팀'이 '죽은 사람'도 아닌 '산 사람'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길 읍소했다. 그런 나의 아부가 통했을까? 며칠 후 나는 결국 이런 이메일을 받게 되었다.
(계속)
*표지 이미지 출처: 서강학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