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번째 노래
5번째 노래를 녹음하러 가는 길인데 왠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어떻게 불러야할지, 어떤 분위기를 내야할지 아직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조금은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잘 끝마칠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어본다.
한편 그렇게 절망적이지도 아닌 것이 내게는 H와 J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왕은 아니지만 영의정, 좌의정이 곁에 있어 조언을 구할 수 있는 느낌이다. 이 두 사람이 아니면 한마디도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노래라는 것이 듣기는 쉬워도 부르는 건 대단히 어려운 줄 녹음하기 전에는 몰랐다.
축구경기를 볼 때는 ‘왜 저렇게 골을 못넣나?’ 하겠지만 과연 국가대표 선수만큼 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왜 우리 부모는 나에게 이렇게밖에 못 해주나? 불만이 있다가도 자식을 낳아 키워보면 양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찌어찌 언덕을 넘어 시냇물도 만나고 다시 평탄한 길을 걸으며 녹음은 끝이 났다. 든든한 두 사람 덕분에 만족스러운 작품이 또 하나 탄생했다. 실상 노래 하나가 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꽤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처음 H를 만났을 때는 평범한 피아노 선생님인줄 알았다. 알고보니 작곡을 전공한 프로 작곡가였다. 조신하고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선생님이 깍쟁이인줄 알고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나 톤만 조용할 뿐 내용은 언제나 따뜻했다. 소리 안나는 박수를 쳐주며 나를 응원해주었다. 덕분에 꽤 긴 시간동안 피아노를 배웠다. 더구나 내가 쓴 가사에 음을 찰떡같이 붙여 노래를 만들어주었다.
전문적으로 음악을 하는 사람이 아닌 내가 뮤지션들이 드나드는 녹음실에 출입하도록 만들어 준 H는 온갖 궂은일을 불평없이 해주었다. 의견충돌이 있을 법도 한데 언제나 말없이 웃어주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H 덕분에 즐겁게 녹음에 임할 수 있다.
또 다른 한 사람, J는 H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같은 대학 후배의 인연으로 오랫동안 음악작업을 같이 하는 동료다. 역삼동에 개인스튜디오를 갖고 있는 보컬 트레이너다. J의 노래는 한 소절만 들어도 ‘아! 전문가구나’ 라는 걸 알 수 있게 해준다. 갓 담근 포도주가 아니라 우아하게 그러나 날카롭고 예리하게 숙성된 깊은 포도주의 맛을 낸다. H는 노래 실력은 기본인데다가 가르치는 실력또한 뛰어나다. 어려운 걸 쉽게 풀어내 알려준다.
문외한인 나도 한 번에 이해하고 따라할 수 있게 길을 안내한다. 아무나 갖고 있는 능력은 아니다. 매번 노래를 녹음할 때 디렉팅을 해준다. 한마디 한 단어씩을 끊어 이어 붙이고 선택하는 어려운 작업을 능수능란하게 처리한다. 이 둘만 있으면 어떤 노래든 못할 것이 없다.
어려운 노래든 스킬이 필요한 노래든, 찬양이든 재즈든 기어코 노래를 완성하게 해준다. 옆에서 거들어주고 부축해주니 원하는 곳까지 기꺼이 이동할 수 있다.
둘에게 천사라는 별명도 지어주었다. 천사가 아니면 이렇게 나에게 평안함과 기쁨과 안정감을 줄 수는 없을 듯하다. 속내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이 세상의 것은 아니다. 못난 내 노래를 기꺼이 예뻐지도록 만들고 지도하고 완성해주는 사람들이다.
녹음하는 날은 내게 있어 결혼식과도 같은 날이다. 결혼식은 누구나에게 일생일대의 중요하고 행복한 사건이다. 마치 그런 날과도 같은 거대하고 장엄한 날이다. 누구도 이 기쁨을 뺏어갈 수 없는 나만이 누릴 수 있는 지상에서 최고로 기쁜 날이다. 태어나 누릴 수 있는 행복 중 가장 크고 찬란한 행복을 느끼는 날이다.
영상촬영도 하기로 했으니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으러 간다. 두 시간을 꼼짝없이 거울앞에 앉아있자니 나른하고 졸립다. 잘 버티고 있으면 조금 예뻐진 얼굴로 나올 수 있다. 스튜디오로 들어가 녹음실 엔지니어와 H, J를 만난다. 커피와 간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눈다.
이제 시작이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찬란하고 기쁜 순간들이 펼쳐진다. 서퍼가 파도를 타듯이 넘어지고 일어서고 다시 넘어지고 파도를 타는 작업이 이어진다. 둘은 나의 서핑을 지켜보며 응원한다. 저기서는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었는데... 다시 해보면 좋겠다. 하며 녹음실 밖 디렉팅공간에서 안타까워하며 파이팅을 손으로 보여준다.
넘어지면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두 사람, 자칫 우울함의 나락으로 빠질 수도 있었던 중년의 나를 두 예쁜 젊은이들이 기쁨의 세계로 데려가 주었다. 일 년에 이틀은 최고의 행복 예약이다. 이 행복은 강도가 세서 유통기한이 일 년이나 된다. 다음 일 년까지 나를 거뜬히 버티게 해준다. 이 둘은 분명히 보이지 않는 날개가 있을 것이다. 내게는 보인다. 투명하지만 알 수 있다. 그들의 눈빛이, 말투가, 마음이 투명하지만 날개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좋은 사람 옆에서는 나쁜 사람이 될 수 없다. 좋은 사람 옆에서는 좋은 척이라도 해야한다. 뇌를 속일 수도 있다고 했던가? 그 둘을 만나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다. 간절히 원하면 온 세상이 도와준다고 했던가? 예전에는 뜬구름 잡는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체험하고 나니 맞는 말이라는 확신이 든다. H와 J의 작업이 수월하도록 노래연습을 조금 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