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모먼츠 (perfect moments)
동료: “어차피 더러워질건데, 뭘 그렇게 열심히 해요?”
히라야마: .......
과묵한 도쿄 시부야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는 기계처럼 정확한 루틴을 지키며 살아간다. 주택의 2층 다다미방에 머물며 차로 출퇴근한다.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차 안에서 더 미끄러지듯 흘러나오는 올드팝. 압도당한다. 툭 갑자기 시동이 꺼지고 음악도 뚝 끊긴다. 마음도 급정거한다. 청소도구까지 만들고 반사경을 비춰가며 변기 속 구석구석을 안방처럼 닦는 히라야마.
스토리는 이보다 더 심플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열심히 일상을 사는 남자에게 갑자기 조카가 찾아와 며칠 머물다 엄마가 데려가고 단골 가게 여주인의 전남편이 다가와 함께 맥주를 마시는 것 정도가 스토리의 전부다. 스포는 아니다. 스토리는 나무로 치면 큰 나뭇가지다. 열매와 나뭇잎은 보아야 알 수 있다. 스토리가 전부가 아닌 영화니까.
이 영화는 스토리를 위해 있지 않다. 영상과 히라야마의 표정과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더 크다.
아침에 벌떡 일어나 단번에 이불을 개고 개운한 얼굴로 출근길을 나서는 미소는 다소 비정상적이다. 공중화장실 청소가 뭐 그리 좋다고 아침에 단박에 일어나지고 나오면서 맑은 미소를 짓는단 말인가? 아침식사는 스킵하고 자판기 커피한모금으로 대신한다. 점심은 공원 벤치에서 샌드위치 한쪽, 저녁은 퇴근 후 지하철 역사안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하이볼 한잔을 곁들이며 해결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감독은 다르게 찍어낸다. 찍는 방향과 각도에 따라 같은 정물과 사람이 다르게 다가와 지루함은 찾아볼 수 없다. 주말은 조금 다르게 보낸다. 일상복을 입고 빨래방으로 향한다. 빨래를 기다리는 대신 근처 식당으로 가 여주인과 잡담을 나누며 식사한다.
또 다시 일상. 갑자기 일하던 동료가 그만두고 느닷없이 여조카가 찾아와 엄마와 삼촌은 많이 다르다며 간접적인 불만을 토한다. 며칠 머물겠다며 삼촌 일터에도 따라간다. 총도 칼도 로봇도 무너짐도 부서짐도 피도 한 방울 나오지 않았고 흔한 키스신 하나 나오지 않았는데 마음이 울렁울렁하다.
저렇게 살 수 있다면 지루한걸까? 평온한걸까?
왜 하필 화장실 청소부를 직업으로 설정했을까?
등의 질문은 의미있는걸까?
나의 삶은 지루한걸까? 평온한걸까?
왜 하필 나는 이 직업을 가지고 있을까?
등의 질문은 의미있는걸까?
빔 벤더스는 실망시키지 않았고 2시간이 아니라 12시간동안 상영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크래딧이 다 올라가도록 일어나지 않고 여운을 즐겼다. 오랜만이다. 마음 속 현을 건드리는 영화, 깊은 바닥을 긁어대는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을 만든 빔 벤더스의 일본합작 영화.
열쇠로 차를 여는 아날로그 방식, 다다미 방의 어두운 조명, 카세트 테이프로 음악을 듣는 주인공, ‘Olympus 카메라’로 찍는 일상, 년,월을 구분하여 사진을 저장하는 모습. 현상한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찢어버리고 마음에 드는 것은 틴박스에 구별하여 저장한다. 한참 어린 동료의 여자친구가 테이프로 음악을 한 번 더 듣겠다고 찾아와 차 안에서 갑자기 볼 뽀뽀를 한다.
주인공의 마지막 표정으로 영화는 끝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주인공은 해맑은 미소와 슬픈 표정을 번갈아 짓는다. 눈물이 고여있지만 흐르지는 않는다. 표정의 변화도 갑작스럽지 않아 슬픈 건지 좋은 건지 알 수 없다. 일상이 힘든 걸까? 만족스러운 걸까?
화장실 청소가 좋아서 할 리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일상을 살아내고 그 외의 시간은 모두 자유인 사람, 그러나 동료와의 짧은 대화, 식당 주인과의 실없는 농담, 인사 외에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없는 주인공의 삶과 일상.
그는 행복한 걸까? 불행한 걸까? 그의 일상은 퍼펙트한 걸까? 부족한 걸까?
그도 모르고 우리도 모르지 않을까?
좋은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이 있는 것이 아닐까?
청소할 때는 좋지 않을 거고, 일이 끝나고 하이볼에 저녁을 먹을 때, 귀갓길, 대중목욕탕 열탕에 몸을 담글 때는 퍼펙트한 순간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퍼펙트 모먼츠다. (perfect momonts)
감독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파악할 의지가 없고 보는 내내 영상미에 정신을 뺏겼다. 다음 장면이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영화. 공원의 녹음이, 녹음을 비추는 햇살이, 히라야마의 꿈에 찾아오는 설명되지 않는 기억의 패턴이 모든 것을 미화시키는 영화다. ‘헤어질 결심’ 이후 오래 여운이 남을 작품을 만났다. ‘Nina Simone’의 ‘Feeling Good’을 틀어놓고 마지막 장면 히라야마의 표정을 흉내내본다. 어렵지는 않다. 조절해야 하는데 그만 눈물이 흘렀다. 울 듯 하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아야하는데. 그래야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잘 모를텐데. 눈물이 흘러버려 우는 것이 되었다. 명배우다. 칸느 남우주연상 쉽게 받은 게 아니다. ‘대사 몇마디 안하고 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던 의심은 마지막 장면의 표정 짓기로 일시에 감탄으로 바뀐다.
조용헌의 ‘내공’에 나오는 이야기다. 홍수가 나면 소는 둥둥 물을 타고 떠내려가 지붕 위에 올라가 살아남는다. 말은 살려고 필사적으로 네 발을 허우적거리다가 탈진해서 죽는다. 삶이 흘러가는 대로 순응하고 자신만의 리추얼을 지키며 만족하는 삶이 가장 만족스러운 완벽한 삶이 아닐까? 말처럼 허우적거리지 않고 소처럼 삶을 사는 부력을 지니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