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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Sep 29. 2020

한국 미술계의 대장

김환기의 미술 읽기

판자집, 캔버스에 유채, 73x90cm, 1951©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한국 근현대 미술의 포문을 연 미술가 중 하나인 수화 김환기는 오늘날 그림 시장에서 주인공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경매 기록을 지속적으로 갈아치우며 한국 미술계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였다. 덕분에 김환기라는 이름에는 늘 수십억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곤 한다. 그러나 수치로 기억되는 화려한 이면에 김환기라는 미술가가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의 미술 세계를 개척해 나갔는지에 대한 이목은 덜하다. 왜 수많은 평론가들과 미술 시장이 그를 앞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과 도쿄

   전남 신안의 바닷가에서 태어난 김환기는 서울에서 중학교를 중퇴한 후 일본 유학을 떠난다. 1933년에서 1936년까지 일본 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서 공부하고 연구과를 수료한 후 귀국하였다. 1930년 당시 일본에는 19세기 말에 유입된 서구의 다양한 미술이 한꺼번에 현대화되는 과정에 있었다. 따라서 야수파, 미래주의, 초현실주의와 같은 다양한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미술 장르가 일본에서 동시에 실험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김환기는 입체파와 추상 미술의 경향을 수용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미술 활동은 1940년 <자유 미술 경성전>과 정자옥 화랑에서 열린 김환기의 개인전을 통하여 서울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1945년 해방 이후 서울대와 이화여대, 홍익대에 차례로 미술 대학이 설립되는 시기에 서울대와 홍익대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또한, 김환기가 주도하여 1948년에 결성한 ‘신사실파’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미술 그룹이었다. 이 그룹의 구성원이었던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장욱진, 이중섭, 백영수 등이 각자 개인작업을 선보였으며 순수하게 조형적인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한국 전쟁을 경험하며 표현한 김환기의 작품에는 비교적 구체적으로 사물이 드러나고 있다. 전쟁과 피난이라는 외적인 상황은 김환기에게 내재된 서정성을 모색하기에는 극단적이었다. 그래서 피난 열차를 비롯하여 판잣집과 같은 소재는 평면성을 유지하고는 있으나 사물의 형태를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를 대표하는 항아리를 비롯한 민속물과 자연 역시 등장하기 시작하며 그의 내면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산월, 캔버스에 유채, 97x162cm, 1960, 국립현대미술관


파리 시대의 김환기

   전쟁 후 프랑스로 떠난 김환기는 더욱 스스로의 정체성을 모색한다. 그는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기 전까지 아무 전시회도 관람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에 집중했다고 한다. 당시 “나는 동양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한다 해도 내 이상의 것은 할 수가 없다. 세계적이기에는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말은 그 의지를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김환기는 1950년대 전통 민속물들과 자연의 풍경을 지속적으로 그린다. 또한 기물과 풍경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도자기 속 풍경이 다시 풍경이 되기도 하며 달 속에 도자기 문양이 등장한다. 이는 서구의 문명을 경험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어떻게 하면 조화롭게 발전할 것인가를 모색하던 미술가의 의지가 엿보이는 점이다. 당시 프랑스는 앵포르멜 미술이 지배적인 경향이었다. 프랑스도 세계 2차 대전을 경험한 직후여서 전쟁의 폐해를 고발하는 미술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김환기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 주변에,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산과 달 그리고 민속물을 지속적으로 등장시키고 변주하며 자신의 내면세계에 집중하였다. 이는 무차별적인 서구 미술의 수용 및 답습이 아니라 차이점을 모색하고 자신 스스로 융합될 가능성을 실험하였다는 것이기도 하다.


새벽 #3, 1964-65, 캔버스에 유채, 176.9 ×109.6cm, 국립현대미술관


뉴욕시대의 김환기

   김환기는 파리에서 귀국 후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커미셔너로 참가를 하였다. 당시 예술의 변방국이라는 한계를 느껴 김환기는 안주하지 않고 또다시 뉴욕에 직접 가서 경험하고 부딪치며 새로운 경험을 하고자 하였다. 당시 일기에 “뉴욕에 나가자, 나가서 싸우자”라고 다짐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 결심의 정도를 유추할 수 있다. 김환기는 뉴욕에서 작업을 하며 그의 조형은 점차 간소화되는 것이 특징이다. 구체적 형태는 거의 사라지고 점과 색으로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1960년대 말의 작품들은 당시 미니멀리즘의 화풍을 연상시키는데, 이들과는 다르게 번지기, 얼룩, 중첩 등 다양한 기법으로 삭면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의 색채가 이전에 그려온 도자기, 달, 산, 바다, 구름과 같은 자연과 기물의 형상을 연상시킨다. 1965~7년에는 보다 형태와 색이 단순해지고 화폭은 커진다. 화면 내에 격자무늬가 등장하며 물감의 번지기 기법을 적극 활용하였다. 나아가 이 기법은 1970년 격자무늬에 점을 반복해서 찍어가는 점화로 완성된다. 당시의 그림들을 살펴보면 화면에는 중심이 사라져 재현의 요소는 사라지고 캔버스 가득 점과 선으로 메워버렸다. 1970년 1월의 그의 일기를 살펴보면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림에서 구체적인 형상이 사라진 대신 작가의 마음속 그리움으로 흩어지고 모인 점들로 다시 화폭에 펼쳐진 것이다. 미술을 향한 그의 열정은 조금 이른 나이에 1974년 뉴욕의 작업실에서 사그라졌다. 당시의 김환기의 미술은 서구의 경향을 받아들이되 동양의 문인화와 서예 같은 전통적인 요소를 활용하여 주체적으로 재해석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사고 있다.    


수화, 별이 되다

   김환기는 도쿄, 파리, 뉴욕에 이르기까지 세계 미술계의 중심에 끊임없이 다가가고자 했다. 그러나 표면적인 서구 미술의 답습이 아닌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과정을 통하였다. 그의 작품은 무엇보다 훌륭한 미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세계 미술계의 보편성과 자신의 특징을 더하여 조화로이 풀어냈다. 추상 미술이라는 장르는 그 과정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동양의 전통적 예술 정신과 현대적 양식이 만나는 접점으로 활용되었다. 김환기의 미술이 한국 근현대 미술의 포문을 연 중요한 미술가로서 마땅히 대접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수화의 미술은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적극적으로 세계의 미술들과 마주하며 치열하게 고뇌하여 창조된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의 미술은 오늘날 우리의 미술이 위상을 갖추게 된 초석이 되고 있다.  


12-V-70 #172, 1970, 코튼에 유채, 236x173cm,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이 글은 월간 비자트와 중기 이코노미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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