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식의 미술 읽기
QUAK, 인 식
삶에서 진리의 법칙은 예나 지금이나 불변하기에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불교 경전이나 성경을 꾸준히 읽고 있다. 미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까지 미술의 사상이 유효하다면 꾸준히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곽인식이 지속적으로 표현한 사물의 물성 탐구와 관련된 작품과 이론은 오늘날 되짚어 보기에도 전혀 낡은 생각이라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다소 생소한 이름의 그는 그 이론의 가치만큼 한국의 개념미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미술가 중 하나이다. 1919년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미술을 배우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한 곽인식은 재일 동포의 위치에서 있기에 일본 미술계에서 그의 미술이 다소 평가 저하되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도 그의 민주화 운동 및 통일 활동을 비롯하여 개인의 신념에 따라 곡해될 만한 이력이 있기에 올바른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한국의 개념미술의 도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또 일본 ‘모노하’의 화파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미술의 확장
1950년대에 일본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수학한 후 당시 일본의 급진적인 미술을 추구하는 ‘이과회’와 ‘요미우리 앙데팡당’전시에서 수상을 하며 곽인식의 미술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곽인식은 초현실주의적인 추상화를 주로 그렸으며 눈과 손, 원형과 같은 그림을 그리고 감상하는데 필요한 생물학적인 요소들을 주제로 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친척이 좌익 활동으로 목숨을 잃은 사건 등을 계기로 조총련계에서 활동하며 군사정권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당시 일본에 소개된 프랑스의 앵포르멜 사조와 이브 클라인과 아르망, 폰타나의 공간에 대한 개념 등을 접하며 작품 내에 직접적인 사물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미술의 기존 형식을 뒤엎는 시도를 하였다. 1960년대 초 이러한 작품을 마주하게 된 곽인식도 미술에서 다양한 소재에 대한 실험을 시작하였는데, 그중 유리와 종이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의미있게 다가온다. 곽인식의 유리 깨기 작업은 일본 모노하‘ 화파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우환의 돌과 유리 작업도 이와 형식적으로 유사한 측면이 있다. 곽인식은 단순히 유리를 미술의 재료로 쓴 것이 아닌, 넓은 유리 판이라는 물질적 범주를 예술의 범위로 끌고 들어와 기존 미술 행위의 범위였던 캔버스의 사각형에서 장소로 개념을 변화 시켰다. 여기서 유리의 투명하고 깨지기 쉬운 물질성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이 조각들을 다시 화면 안으로 봉합시킨 작업은 일본 미술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리는 인공물인데 반해 이를 파괴하는 자연물로 이루어진 돌은 상반된 물질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상반된 소재를 극대화할 수 있는 장소에서 유리를 깨트리는 작업까지도 하나의 상황이 되어 새로운 미술을 표현하였다. 유리를 깨는 그만의 방법도 있었는데, 내리치는 것이 아닌 가볍게 툭 내려놔야 방사형으로 깨져나가며, 그 행위 자체도 퍼포먼스화하여 미술의 언어를 확장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우환에게 이 방법을 전해주었다고도 한다.
유리 이외에도 종이, 금속 등에도 곽인식의 작업은 확장되었으나 종이 작업에서 많은 이들의 감응을 얻었다. 곽인식의 종이는 폰타나의 찢는 행위와 결과가 아닌, 종이에 새겨지고 번지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종이는 목재의 펄프를 합쳐진 유기체로 종이에 물을 더하면 종이의 표면이 약해져 쉽게 변형을 줄 수 있다. 그리고 물기가 마르면 압력을 가한 그대로 흔적이 남은 종이가 된다. 곽인식은 물러진 종이에 원을 새기듯 끌로 그었고 물기가 마르면 이 원형이 마치 종이에서 떨어져 나갈 듯 아슬아슬해지는 작품을 선보였다. 곽인식의 종이에 그어진 원은 강한 혹은 부드러운 종이의 물성을 활용하여 표면의 영역을 모호하게 하여 물성과 표현 사이의 간극에 대한 통찰력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원형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근원적인 것의 모티브로 지속적으로 활용한다. 곽인식의 후기 작업에서 여러 색점이 중첩되어 화면을 채워 나가는 회화 작업을 선보였는데, 이는 화선지와 같은 얇은 동양의 종이 특성을 살려 그린 작품들로 붓질의 중첩 역시 그대로 종이 위에 흔적이 되며 공간을 이룬다. 또한 평면의 종이 위에서 점들의 중첩으로 깊어진 공간은 앞으로도 보이고 뒤로 보아도 같은 그저 방향만 다른 그림을 그린 것이다.
사물의 언어를 탐구한 미술가
곽인식의 사물에 대한 고찰은 미술 활동 당시 일본의 미술 잡지인 <미술 수첩>, <미즈에>, <예술 신조> 등에 꾸준히 등장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미술 잡지들은 1960년대에 서구의 미술을 접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많은 당시 한국의 미술가들이 이를 탐독하곤 하였다. 이런 잡지에 곽인식이 빈번히 등장한 이유도 그의 사물론을 일본어로 한 ‘모노파’의 탄생에 영향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이우환의 일본 미술계 내에서의 활동은 이러한 ‘모노파’의 확장을 꾀할 수 있었다. 타계 전까지 곽인식은 일본에서 지속적으로 활동을 이어갔으나 사후, 재일교포라는 신분 때문에서인지 일본 내에서 그의 활동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사그라들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지난해 곽인식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국립현대미술관과 대구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하며 곽인식의 미술을 한국에 적극 편입시키고 있다.
1969년 일본의 잡지 <미술 수첩>에 ‘사물의 언어를 듣는다’라는 칼럼을 기고한 곽인식은 “우주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물이 존재한다. 이토록 많은 사물들에게 무언가 말하게 해주고 또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현재 우리가 상상도 다 못할 많은 일들이 가능해 질 수도 있다”고 하였다. 오늘날 IT기술로 곽인식이 꿈꾸는 사물 간의 대화는 실제로 가능해졌다. 인터넷망으로 연결된 가전제품들은 언제든 작동 여부와 상태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향후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더 많은 사물과 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실화는 곽인식의 미학 이론인 사물과의 대화와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무관한 맥락으로도 볼 수 없다. 그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은 다를지라도 대화와 소통이라는 근본은 같기 때문이다. 그가 사물의 성질을 관찰하고 실험하고 파악한 것들에 그만의 개입방법으로 새로운 표현의 미술 활동을 하였듯, 인간 역시 인간의 개입으로 사물을 활용하며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펼쳐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곽인식의 미술이 세월이 지날수록 빛날 수 있는 이유도 그의 통찰력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통하는 사상적 근간에 귀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월간 비자트와 중기 이코노미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