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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Sep 24. 2020

한국의 모던보이

구본웅의 미술 읽기

   1906년 태어난 구본웅은 고종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기독교 서적 전문 출판사를 운영하던 부친의 덕으로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경성 고등학교 시절부터 미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고희동에게 회화를, 김복진에게 조각을 배웠으며,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하였다.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 대학교 미학과에서 1년간 수학한 후 태평양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였으며 졸업한 후 한국 화단에 등단하였다. 구본웅은 이상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계 인사들과 어울리며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일본에서 유화를 배워 온 구본웅은 당시 미술이라고 하면 서화를 떠올렸을 뿐 유화에 대한 개념도 없는 시기에 작품을 발표하였다. 게다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형식의 그림이 아닌 그의 스승인 사토미 가츠조에게 영향을 받아 거친 붓질과 형태의 표현주의, 야수파 기법의 그림을 선보였다. 

친구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62x50cm, 1935 Ⓒ 국립현대미술관

   사토미 가츠조는 파리에서 수학한 후 일본에 귀국하여 당시 일본 내에서 젊은 미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모리스 블라맹크의 미술을 추종하던 미술가이다. 구본웅의 미술은 직접적인 스승인 사토미 가츠조와 유사한 부분이 많아 논의된 바 있다. 사토미 가츠조는 또한 블라맹크의 미술과 화풍이 겹치기에 자칫하면 구본웅은 거칠게 말하면 건너 건너온 미술을 표현한 화가로 정의할 수도 있다. 또한, 아쉽게도 당시 유화를 활용하는 미술가들은 많이 없어 한국 내에서도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마냥 비판의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기에는 아쉬운 측면도 있다. 당시 전쟁과 외세의 개입이라는 혼란스러운 정세는 수묵으로 표현한 미술보다 유화로 거칠게 표현한 표현주의 미술과 어찌 보면 적절해 보인다. 구본웅 역시 글에서 자신이 한국에서 지속해서 공격당하던 한국적인 것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반영되고 있으며 이것은 그림으로도 표현되고 있다. 

비파와 체리, 캔버스에 유채, 43x47cm Ⓒ 국립현대미술관

거칠지만 세밀한 화법으로 표현된 ‘모던’

   구본웅이 귀국하여 한국에서 미술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인 1930년대는 ‘모던’이라는 담론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거리에 구식 건물과 신식 건물이 공존하였으며 카페와 백화점 그리고 댄스홀과 같은 새로운 장소가 생겨났고, 이러한 문화는 옷차림과 식생활 전반에 거쳐 반영되어 화려하게 반영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개입으로 압박받는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하며 사회는 내외부적으로 격동하고 있었다. 구본웅이 이상을 그렸다고 전해지는 ‘친구의 초상’을 보면 이러한 느낌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데, 날카로운 눈빛에 붉은색으로 눈 밑에 채색하여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다. 정물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빠른 속도감과 감성이 느껴지는 붓질로 표현하였고 사물의 외곽에 검은 선은 시선을 잡아끌게 한다. 블라맹크나 사토미 가츠조의 그림을 비교하며 유사하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으나 오늘날 미술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는 그 그림을 기법 그대로 모작한 것이 아닌, 다른 결과물로 보인다. 이는 구본웅이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보다 이입한 결과이다.  

   1930년대 당시의 지식인들과 더불어 일본의 ‘향토성’이라는 정체성을 한국인들에게 개입하는 정치적 공작으로 지식인들은 ‘한국적’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구본웅 역시 이러한 영향을 받아 글을 쓰고 각종 대회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후 발표된 글에서 자신의 미술 인생을 솔직하게 묘사하였다. 자신의 생활과 대부분의 미술 생활 전부가 일본의 그물 속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할 수 없으며 그 안에 자신의 미술 수업을 생장시킨 것이라는 고백을 하였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해방 이후, 일본의 색을 지우자는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해 미술사에서 구본웅이 다소 배제되기도 한 이유이다. 

정물, 캔버스에 유채, 56x68cm, 1929 Ⓒ 국립현대미술관

   비록 생전에 스스로 발표한 글이 아니라 미완의 원고로 사후에 발표되었지만, 오늘날 구본웅의 이러한 관점은 충분히 재조명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의 태도이며 그의 작품 역시 재평가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가 고백한 삶의 태도는 19세기 후반에 활동하던 보들레르의 현대적 삶에 대한 고찰과 일치하는 맥락도 존재한다. 그리고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에 구본웅의 그림은 전형적인 일본 스타일의 그림도 아니다. 그림의 표현기법은 사토미 가츠조 역시 블라맹크를 연상하게 하며 이러한 반추상의 형태를 지닌 야수파는 당시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여 확산하였다. 야수파는 자유로움의 상징이었으며 이를 추종하는 전 세계의 미술가들이 파리에 모였다가 흩어지며 퍼져 나갔다. 구본웅 역시 야수파의 자유로운 표현력에 매료되어 마지막까지 그의 화풍을 고수하며 그림을 그린 것이다. 구본웅의 그림은 그의 시선으로 해석한, 당시의 ‘모던’함이 반영되어 있다. 

여인, 캔버스에 유채, 47x35cm, 1930 Ⓒ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근대 미술의 신기원

   최초로 유화 물감으로 작업한 구본웅의 스승이기도 한 고희동은 한국에서 재료를 구하기도 어렵고 화구 박스를 보고 엿장수라고 놀릴 만큼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수묵화로 돌아섰다. 그리고 작품 창작보다는 협회장을 비롯하여 여러 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구본웅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화풍을 고수하였다. 비록 당시 한국의 정세가 불안정하여 현재 남아있는 그의 작품 수가 많지 않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을 보면 구본웅은 소신껏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표현한 미술가였다. 당시 그가 살다 간 시대를 반추해 보았을 때 그의 행적, 미술가뿐만 아니라 골동품상 그리고 미술 교과서 집필까지 얼마나 한국 미술계에 다방면으로 이바지하였는가 유추해 볼 수 있다. 구본웅은 일본에서 배운 미술가이자 친일 행적도 있기에 전후 민족주의적인 시각이 대두하였을 시기에는 다소 잊혀야 하는 미술가였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의 큰 흐름에서 보았을 때 구본웅은 한국에 수묵화의 전통 미술만 존재하던 시기에 당당하게 시대의 흐름을 읽고 불모지를 묵묵히 개척해 나가 오늘의 한국 현대 미술을 이끈 모던 보이였다. 

여인, 캔버스에 유채, 43x32cm, 1940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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