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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Sep 25. 2020

일상을 그린 화가

이중섭의 미술 읽기

황소, 종이에 유채, 28.8x40.7cm, 1953, c.호암미술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이중섭은 이러한 불가항력의 주변 상황 속에서, 거처조차 안주할 수 없었어도 낙담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로 삶을 채운 미술가 중 하나이다. 혹자는 사후에 조망된 그의 예술가로서 인생이 과도하게 신화화된 것이 아니냐는 물음표를 던지기도 하지만, 신화라는 단어가 수식될 만큼 이중섭은 짧은 생애 동안 언제, 어디서든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들을 내려놓지 않아 수많은 작품을 남겨두었다. 또한 그가 남긴 부인과 주고받은 애틋한 글이 담겨 있는 서신은 많은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연극 및 영화로 극화되기도 하며 그에 대한 대중들의 인지도를 높여주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이중섭의 그림보다 신변잡기에 치중하여 그의 그림을 풍부하게 해석하는데 오히려 방해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는 나아가 미술사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심도 있는 다수의 연구를 남기지 못하게 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에 있어서는 이중섭의 그림들의 상당수가 위작 여부의 논란이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중섭의 그림, 특히 그의 소는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또 감동을 전해 주고 있다. 이중섭이 남긴 감동의 지점은 어디인 것일까. 


소의 등장

  과거 농경사회였던 한국에서 소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농경사회에서 소는 인간과 함께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쉬기도 하는 인간과 삶을 공유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1970년대 후반까지 소의 몸값을 자식들의 대학 등록금과 비견하며 막강한 경제력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이러한 소의 모습은 예전 영화에서나 찾아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민중의 모습과 닮은 점이 많았기에 우리 민족은 소에 비유되곤 했다. 이중섭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동물 중 하나가 바로 이 소였다. 그가 소를 자주 그린 이유는 단지 좋아하는 동물이고, 흔한 동물이라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이중섭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던 오산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오산학교에서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다 귀국한 임용련을 미술 선생님으로 만났다. 임용련은 습작을 늘 강조하였으며 이는 이중섭이 수많은 작품을 남기게 된 계기이자, 그의 작품에 특징적인 선묘의 발전에  기여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중섭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기에는 한국 미술계의 근대화 움직임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이 영향으로 이중섭 역시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무사시노 미술대학을 거쳐 문화학원을 졸업하고 1940년 연구생으로 체류하며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흰소, 나무판에 유채, 30x41.7cm, 1954, c. 홍익대학교 박물관

이중섭의 소

   이중섭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는 역동적이며 강인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을 각인시키는 것은 힘이 넘치는 간결한 선들로 표현된 그 형상이다. 특히 그가 유화로 그린 소들은 대부분 강인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싸우는 소의 모습을 표현하였거나 이를 드러내기도 하며 어쩌면 호랑이와 같은 맹수의 느낌을 주기도 한다. 즉, 그가 대변하는 소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순하고 성실한 모습이 아닌 강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이중섭이 소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표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가 소 그림에 활용한 색상들도 이러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가족을 표현한 그림에는 대개 온화한 분위기가 주를 이루지만, 소를 그린 그림에는 붉은색과 검은색, 흰색 등 강렬한 색을 활용하고 있으며 이 색상들의 드라마틱 한 대비 또한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중섭이 소를 관찰하고 그리며 소의 표면적인 모습에서 나아가 작가의 감정을 대변하는 소재로 활용하였으며 나아가 이중섭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였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희망을 꿈꾸다

  이중섭이라는 개인의 삶은 대한민국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마주하며 뗄 수 없는 비극적인 현실에 마주하였다. 한국인으로서의 의식을 자각시키는 교육기관에서 10대를 보낸 후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웠으며 이후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반려자를 만났다. 한국에서 그는 가족들과 한국전쟁을 경험하며 피난생활을 하였으며 그 도중 가족을 상실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다사다난한 삶을 지탱해 준 활동은 그림이었으며 이것은 그를 한국 근현대 화단의 서두에 서게 해주었다. 이중섭이 그린 수많은 그림들 중 강인한 소들은 가장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대변하는 동물이었으며, 나아가 민초들의 초상이기도 하였다. 이중섭의 그림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은 아마` 이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역사의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를 오늘날 극복해 냈으며, 그 과정에서 주변에, 혹은 당사자가 이중섭과 같은 삶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시련을 극복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절망의 시간을 이겨낸 것은 아마 각자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중섭 역시 그의 삶을 지지하는 정신적 버팀목은 희망이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 몹시 궁핍하고 몸이 아픈 상황에서도 그리운 가족과의 재회를 꿈꾸었던 것은 그의 낙천적인 성격에서 기인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중섭이 희망의 에너지로 그린 그림들은 오늘날까지 감동을 전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싸우는 소, 종이에 유채, 17x39cm, 1954, c. 호암미술관


*이 글은 월간 비자트와 중기이코노미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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