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기의 미술 읽기
유튜버가 수많은 초등학생의 장래희망이 되었다고 한다. 최근 인기 있는 유튜브 채널들의 특징적인 모습은 일반인들이 그들의 일상을 그대로 노출한다는 것이다. 공부를 하거나 밥을 먹는, 그저 일상의 순간을 불특정 다수와 공유한다. 과거엔 그저 개인의 일상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콘텐츠로서 유튜브라는 새로운 미디어 수단에 의해 “방송”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유튜버 중 대중의 관심과 인기를 얻은 이들은 기성 미디어의 스타와 같이 대중들에게 화제가 되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미디어 파워가 되었다. 이처럼 미디어는 오늘날 우리 주변의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다. 유튜브와 같은 개인 미디어의 부상은 유난히 미디어의 발달에 관심이 많은 대중과 그리고 이에 발맞추어 민감하게 반응한 선구자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미디어를 한국 미술에 가장 처음 도입한 미술가는 누구일까? 한국에서 최초로 발표된 미디어를 활용한 작품은 1969년 김구림의 <1/24초의 의미>이다. 그러나 김구림은 전방위적으로 미술 활동을 펼쳤기에 미디어 아티스트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미술가이다. 미디어를 소재로 하여 작품 활동을 지속적으로 한 미술가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활동하며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파리 비엔날레’를 비롯하여 뉴욕 첼시의 ’ 킴 포스터 갤러리 Kim Foster Gallery‘까지 종횡무진했던 박현기가 있다. 그는 안타깝게도 지난 2000년 59세의 나이로 미술가로서 원숙한 창작을 이어나갈 시기에 작고하였다. 그러나 그의 35년간의 창작 활동의 결과물은 그의 미술 세계를 논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는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입학하여 건축학과로 졸업을 하였고, 대학 졸업 후 귀향하여 광거당에서 수학하며 한국적인 것에 대한 몰두를 하였다. 이후 인테리어 사무소를 운영하며 이강소, 최병소, 김영진, 황현욱 등의 대구 미술인들과 함께 창작 활동을 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 대구 현대 미술제‘를 이끄는 주역이었다.
유독 우리나라엔 돌을 사용하여 표식을 해 놓은 것이 많다. 비석이나 각종 위인들의 돌 상들을 비롯하여 공원 앞이나 유적지 앞에 장소의 이름이 쓰인 돌 그리고 시골에 가면 성황당이라 불리는 나무 밑에 쌓인 돌탑들 나아가 고인돌까지 정말 우리 주변에 흔히 돌들을 볼 수 있다. 박현기는 이 돌들을 위로, 위태롭게 탑처럼 쌓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TV 모니터를 끼워 넣었고 수상기에는 돌 사이에 끼워진 돌의 이미지를 출력하여 탑을 완성시켰다. 박현기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본 피난길에서 돌을 나르던 사람들의 무리가 인상 깊었다고 하였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쌓아둔 돌무더기를 보며 박현기는 그곳이 신들의 무덤 같기도 하고 우리의 넋이 숨어있는 장소같이 보였다고도 하였다. 박현기의 기억에서 돌은 신비한 존재였다. 그가 쌓은 돌탑 사이의 모니터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모니터 이전에 작업되었다고 하는 1978년의 돌탑은 돌들 사이에 투명한 돌을 제작하여 끼워 넣었고 이후의 작품에서 모니터가 등장한 것이다. 투명한 돌에서 TV 수상기까지, 이러한 작품의 변화 과정은 1974년에 미국 문화원에서 처음 접한 미디어 아트가 그의 시선으로 변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박현기의 미디어 아트는 서구 문화에서 해석되는 미디어의 화려한 외관이 아니라 그저 현실 세계를 그대로 투영하는 매개체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수상기에 보이는 모습은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수상기 바깥의 돌들과 안의 돌들이 함께 보이기에 쌓여있는 탑을 보고, 또 그렇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과정을 거친 박현기의 돌탑은 서구인들은 찾아볼 수 없는 방식이라 하여 동양적이라고 불리며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물론 백남준의 작품들과도 또 다른 각도로 미디어를 해석하고 전달하고 있다. 이후 그는 바위 속에 TV를 두고 차선 위에 두고 모니터에 차선을 출력시키는 작품을 제작하였고, 대형 바위 안에 수상기를 두고 변화하는 도심의 모습을 출력시키며 트럭에 작품을 싣고 대구 시내를 달린 <도심을 지나며>를 선보였다. 박현기는 무한한 시간을 지낸 자연이 다듬어진 돌과 함께 지금 현재 보이는 것과 볼 수 있는 것의 차이를 TV 수상기라는 매체를 통하여 보여주는 작품을 통하여 많은 영감을 주었다.
박현기는 IMF 이후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폐업하면서 기술자들을 자신의 스튜디오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돌은 제하고 점차 영상의 탐구에 몰입한다. 그는 영상의 매체를 이해하고 탐구하는 것에서 나아가 화면을 조작하는 ‘만다라’ 시리즈를 선보인다. ‘만다라’는 성행위 장면을 작은 이미지로 모아 하나의 패턴을 만들어 신음소리들과 더불어 회전하는 영상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우주의 진리를 설명하는 이미지로 쓰이는 만다라는 모든 것을 다 갖춘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다. 박현기는 포르노 영상을 재편집하여 만다라 패턴을 차용한 작품을 통하여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작품으로 2007년 미국의 미술사학자이자 큐레이터인 로버트 모건은 아트 앤 퍼포먼스지에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박현기의 작품을 뒤샹식의 현대미술에 대한 서구적인 접근에서 나아가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였다. 박현기는 ‘만다라’ 시리즈 이후 인조석으로 만든 기둥에 물의 영상을 투사하여 물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듯한 일루전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박현기는 영상이 지니는 속성에 대한 탐구에서 나아가 영상만의 기술을 활용하여 작품을 전개하였다.
미술가로서의 그의 열정은 실로 엄청났다. 당시 건축연구소의 성업에도 불구하고 미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놓지 않았고, 기술적인 부분이 모자라다 싶으면 이를 위해 일본까지 건너가 배워온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TV 수상기나 비디오를 비롯하여 영상 도구들의 가격은 매우 비쌌으며 그가 추구한 작품은 당시로선 판매도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의 미술을 향한 열정은 아무도 그를 멈추게 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일구어낸 예술가의 노력은 오늘날까지도 그의 작품을 호출하게 되어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하고, 2017년 갤러리현대에서 또다시 전시를 하며 그의 가치가 더욱더 빛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TV 수상기의 물성을 비롯하여 미디어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연구하고 우리의 미술계를 풍요롭게 한 박현기의 미술은 앞으로도 더욱 작품의 연구 가치가 높아질 것이다.
*이 글은 월간 비자트와 중기 이코노미에 기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