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마음을 모두 정리한 날
두브로브니크에서 더 북쪽에 위치한 도시인 스플리트라는 곳으로 떠나는 날.
스플리트도 두브로브니크와 마찬가지로 유명한 휴양도시인만큼, 이틀정도를 머물며 시간을 보내고 올 예정이었다. 마음 같아선 영화 아바타의 촬영장소이자 크로아티아의 다른 명소인 플리트비체까지 다녀오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동선이 너무 꼬일 것 같아 이번 여행에는 어쩔 수 없이 포기!
크로아티아는 세로방향으로 길게 뻗어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 나라이기에 계속해서 바다를 옆에 두고 이동하는 그 풍경이 참 예뻤고, 3시간 정도의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이번 여정은 꽤나 수월하게 지나갔다.
그리고 스플리트에 도착하기 전 꽤나 기대하고 있는 게 있었는데, 바로 이곳에서 잡은 숙소였다. 사진으로만 봤을 때 채광이나 방의 퀄리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스플리트의 바다전경이 보이며 탁상이 있는 넓은 발코니가 있었기에 큰 메리트를 느끼고 예약했는데, 도착하고 난 뒤에도 딱히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숙소라 너무 마음에 들었다. 저녁에 이곳에서 술과 함께 맛있는 음식 곁들일 생각 하니 벌써부터 설레네.
아무래도 여행이 계속되다 보면 다양한 사유로 인해 식사를 거른다거나 간단히 먹게 될 때가 잦지만, 느긋함이 느껴지는 이 바다도시에서는 딱히 서둘러 움직이고 싶지 않았기에 여유를 부리며 근처 괜찮아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서 맛있는 식사를 즐겼다. 그래, 이런 게 여행이지.
스플리트 역시 길게 머무는 도시가 아닌 만큼 꽤나 많은 여행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빡빡하지 않은 내 여행 계획은 하루에 한 곳정도의 스팟만 들려볼까 싶었다. 식사를 마친 후 오늘 방문하기로 생각한 곳은 마르얀 삼림공원이라는 곳인데, 스플리트 구시가지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에, 만족스러운 식사 이후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하며 천천히 산책하는 이 시간이 참 행복했다. 오르막길에서는 조금 힘든 느낌도 없지 않았지만 그 후에 느껴지는 선선한 바람과 점점 해가 지며 노란빛으로 물드는 하늘은 적당히 휴식을 취하며 기분 좋게 감상하기에 좋았고, 비록 꽤나 긴 코스였기에 전망대 끝까지 걸어가기엔 해가 천천히 떨어지고 있던 터라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오긴 했지만 지금의 순간이 꽤 소중하게 기억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도 밖에서 사 먹을까 생각도 했지만, 앞서 계획했듯 숙소의 발코니를 써먹고 싶었기에 근처 마트에서 맥주와 간단히 곁들일 음식을 사 와 혼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 와중에 케바프체라는 이곳의 전통 음식을 하나 구매했는데, 빵에 소시지 끼워 넣은 단조롭지만 실패할 수 없는 조합인데도 묘하게 맛이 없더라? 비록 안주 선택은 실패했지만 맥주와 함께 이 풍경과 지금의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발코니에 앉아 많은 생각들을 했다. 이것이 오늘 한 생각의 정리.
최근에는 멀어진 연인과의 관계에 대한 정리를 거듭하고 있다. 여행이 무르익으며 힘들었던 시기가 대부분 지나버려 이제는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여행의 의의를 단순히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스스로가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라고 생각하며 여정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오늘 그런 생각이 났다. 내가 그 아이에게 처음 감정을 갖게 된 이유는 뭐였을까? 처음 만났던 그날을 찬찬히 되짚어 보았는데, 아무래도 호감이 생긴 건 그 자리에서 그녀가 흘렸던 눈물 때문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간단히 방문했던 와인바에서, 본인의 미래를 꿋꿋하게 그려나가지만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막막함과 불안함에 걱정하며 흘렸던 그 눈물. 나는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누군들 안 그렇겠느냐만, 난 열심히 사는 사람이 참 좋다. 그 결과가 어쨌건 본인이 도전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스스로의 능력을 쌓아가는 사람들이 참 매력 있다고 느꼈기에, 다분히 미래지향적인 사람인 내게는 두려우면서도 나아가려던 그녀의 모습이 너무 예쁘게 느껴졌다.
다만 관계가 시작된 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내 연인이 꽤나 순진하고 어리숙하다고 생각이 들게 된 나는 그녀의 성장을 도와주기 위해 가만히 지켜보는 것보다는 나의 방식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주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의 방식에 서툴렀던 우리의 관계는 점점 금이갔던 거고.
그 모습에 반했던 거라면 나는 그 모습을 계속 믿어줬어야 했는데. 그걸 놓친 게 나였구나...
나는 최근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한테 말투도 정말 나긋나긋하고 차분한 사람 같다는 얘기를 꽤나 자주 들었다. 내 대외적인 이미지이자 첫인상은 남들에게 그런 사람인가 보다. 내 전 연인은 내 말과 말투로 인해 참 상처받고 힘들어하던 아이였는데, 나는 사랑하는 사람한테만 모질게 구는 사람이었구나.
지금 이렇게 세상을 돌며 생각해 보니, 한 발자국 뒤에서 바라보면 쉽게 넘어갈 수 있던 일이 많은데 대체 왜 나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로도 그녀에게 짜증 내고 화내는 사람이었던 걸까. 혼자만의 시간이 깊어지는 밤이었다.
다음날, 원래대로의 계획이라면 스플리트에서 근접한 흐바르 섬이라는 곳으로 유람선을 타고 다녀올 계획이었는데 아쉽게도 하루 내내 비소식이 있더라. 다행히 약한 부슬비정도라 가려면 어디든 갈 순 있었지만, 오늘은 다른 선택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숙소에서 하루종일 일 하면서 여행 계획을 짰다. 지금까지 아무런 계획도 없이 다니던 내가 드디어 앞으로의 행선지에 대한 계획을 짰는데, 이건 이제 나의 여행을 마무리 지어야 할 때라고 결단 지었다는 것이기도 했다.
내 앞으로의 계획은 이랬다. 발칸반도 여행이 끝나면 프랑스의 파리로 이동해서 2주 정도 머물 예정이며, 그곳에는 내 정든 친구들도 많이 있는 만큼 오랜만에 반가운 시간을 보내며 여유롭게 있을 생각이었다. 이제는 한없이 멀어질 곳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올해도 또 파리를 가긴 가는구나. 사람 일 모른다는 얘기를 최근 들어 자주 하는 것 같네.
그리고 내 여행의 마지막 도시를 골랐는데, 바로 그녀를 처음 만났던 스페인의 그곳을 가기로 했다. 부다페스트에서 처음 그곳을 들러볼까 생각을 했을 뭔가 턱 막히는 느낌에 절대 방문하지 말아야겠다 싶었지만, 이 여행에서 내 나름의 서사를 마무리하기에 이제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도시에 간다면 나는 어떨까, 여전히 그곳이 좋을까? 내가 그곳을 좋아했던 건 도시 자체가 예쁘기 때문이었을까, 아님 그녀가 있기 때문이었을까. 아직은 그곳에서의 내가 어떨지 정말 모르겠기 때문에, 그래서 가보기로 했다.
내리는 비로 인해 나가지도 못한 채 꼼짝없이 일과 계획정리, 그리고 가장 귀찮고 하기 싫은 일이라 미루고 또 미뤄두었던 장부정리까지 하며 이 도시는 제대로 즐기지도 못한 채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이 여행을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나름의 큰 결단을 한 만큼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이라 속이 시원하다! 물론 그럼에도 아직 이 여행은 한 달 가까이 더 남긴 했지만 말이야.
내일은 발칸반도의 작은 나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라는 곳으로 떠난다. 이 여행을 시작하기 전까진 그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지만, 이번에도 역시 어쩌다 보니 떠난다. 내 여행도 슬슬 마무리가 보이긴 하는구나. 지금도 종종 체감하는데 여행 이후의 나는 훨씬 더 많은 게 달라져 있겠지?
큰 결정을 하느라 오늘도 정말 수고 많았어. 내일도 푹 쉬고, 맛있는 거 잘 먹고, 또 새로운 곳에서 즐겁게 돌아다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