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지 뭐. 이것도 여행이니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로 떠나는 날.
스플리트는 정말 예쁜 휴양도시긴 했지만 일도 바빴던 데다 날씨도 좋지 않았어서 조금은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이곳뿐만 아니라 어영부영 흘려보낸 나라와 도시들이 여러 군데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계획으로 혼자 하는 여행이 이런 거지 뭐.' 하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번에 더 좋은 사람과 제대로 된 준비를 하고, 지금의 얕은 경험을 발판 삼아 또 오겠다고 다짐하면 아쉬운 여행지도 기쁨으로 남는다.
모스타르는 스플리트에서 버스를 타고 약 3시간 정도만 가면 도착하는데, 입국심사를 위해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 것 빼면 그다지 힘든 여정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진짜 입에 안 달라붙는 국가 이름이네.
흔히 모스타르는 작은 튀르키예라고 불릴 만큼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이며, 불과 몇십 년이 채 되지 않은 내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라는 정도만 가볍게 인지하고 방문했다.
이곳 역시 숙소는 1박만 묵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싸고 퀄리티도 좋았다. 간단하게 정비만 마친 뒤 바로 올드 타운으로 관광을 갔는데, 여행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서 그런지 그다지 특별한 건 없다고 생각되더라. 게다가 이곳에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스탈리 모스트'라는 다리가 있는데, 나름의 기대하고 갔지만 또 그 정도는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모스타르가 관광지로서 별로냐고 묻는다면 또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아무래도 워낙 작은 도시다 보니 금세 할게 없어졌지만 아기자기한 도시의 구석구석은 천천히 거닐기에 좋았고,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야외 카페에서 커피와 차이를 시켜두고 한가롭게 떠드는 현지인, 혹은 관광객들은 나 조차도 이곳을 더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게다가 값싸면서도 맛있는 식사까지 즐기고 난 후엔 또 이만한 곳도 없다고 생각될 만큼 이렇게 혼자 거니는 여행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아직 스플리트에서 머물던 전 날, 내 여행의 끝이 정해졌다. 힘들었던 마음에 아무런 저항 없이 흐르고 흘러가다 보니 모스타르라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도시의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앉아 플라스틱 컵에 테이크아웃 한 와인 한잔을 마시며 이곳을 만끽하고 있지만, 이제는 다시 일어설 힘이 생긴 만큼 정해진 날짜에 한국 들어가게 되면 또 열심히 살 것이란 다짐이 들었다.
비록 이번 여행은 이렇게 슬슬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지만 꼭 열심히 돈 모아서 또 이렇게 여행 나와야지. 물론 혼자 나온 이번 여행도 의미가 크지만, 아무래도 다음번에는 같이 나올 누군가가 있었으면 참 좋겠다!
문득 든 행복한 생각인데, 내가 이번 여행을 사랑하고 있나 보다. 아팠던 이별을 겪었더라도, 사랑이란 건 지금과 같이 다른 형태로도 늘 찾아온다. 지금의 순간이 행복하게 남을 것이란 걸 현재도 알고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다음날 아침, 모스타르에서 아쉽지만 즐거웠던 하루 일정을 마친 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경유지인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날이었다. 체크아웃은 오전 10시였고 버스 출발시각은 오후 12시 반이라 그전에 간단히 식사를 한 뒤 이동하기로 했는데, 어제 올드타운에서 방문했던 식당이 싸고 맛있던 터라 이곳을 떠나기 전 맛보게 될 점심식사에도 기대하는 바가 꽤 컸다.
다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는데, 올드타운을 제외한 도심 쪽 식당은 전부 카드 결제를 받아주지 않더라. 급하게 현금을 인출할까 싶었으나 현지 화폐 금액 6000원 정도를 뽑으려면 수수료가 3000원이길래 무슨 이런 양아치 마인드가 다 있나 싶어서 더 발품을 팔아보기로 했지만, 그 후 다른 식당 다섯 군데는 더 돌아다녔는데도 카드기가 있는 식당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결제가 가능한 식당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점점 시간도 애매해지고, 아무리 간소화했다곤 하나 내 여행의 짐들이 모두 들어있는 가방을 계속 이리저리 들고 다니기도 힘들어서 결국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터미널로 돌아왔다. 하필 오늘따라 인터넷도 거의 안 터져서 짜증이 좀 날 뻔했는데, 혼자 이 말을 되새기면서 왔다.
"짜증 내지 말자. 어쩔 수 없지 뭐. 이것도 여행이니깐"
그냥 아무렇게나 흥얼거리며 내뱉은 말이었는데, ‘이것도 여행이니깐’이라는 표현이 생각보다 너무 마음에 들었다. 짜증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계속 혼자서 중얼거리며 저 말을 곱씹다 보니 기분이 정말 좋아졌다.
결국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배고픈 채로 버스를 탔지만, 그래도 괜찮아. 두브로브니크 가서 진짜 맛있는 거 먹으면 되지. 조금 고생하더라도 이것도 여행이니깐!
그렇게 고생고생하며 다시 두브로브니크로 도착! 새로 잡은 숙소는 엄청나게 높은 언덕 위였는데, 일단 내일 방문하게 될 몬테네그로에 가는 버스 터미널이 가깝기도 한 데다, 어차피 경유지로서 잠시 머무는 만큼 고생하더라도 높은 뷰에서 두브로브니크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땀 뻘뻘 흘리며 올라가는 길은 최악이었지만, 숙소에 도착한 뒤 도시를 모두 내려다보는 풍경은 아름다움과 따듯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식사시간! 한참이나 굶은 만큼 돌아오는 버스에서도 뭘 먹을까 계속 고민했고 숙소에서도 계속 찾아보다가, 결국 두브로브니크를 온 첫날 방문했던 식당에서 또 오징어 튀김을 또 먹으러 갔다. 그곳은 선셋비치랑 가까워서 산책하기도 좋고, 다른 음식을 아무리 고민해도 가장 먹고 싶은 건 오징어튀김밖에 생각나지 않더라.
식사는 역시나 성공적이었다. 배가 많이 고파서 그런지 저번보다 훨씬 맛있었고 배부르게 먹었다. 여담인데 최근 여행에서 지속적인 움직임이 있다 보니 살이 많이 빠진 게 확실히 보이긴 한다. 귀국하면 식단관리 잘하면서 운동도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술을 끊진 못하겠지만.
이후엔 선셋 비치로 가서 이곳에서 보게 될 마지막 노을을 감상했다. 사실 날씨가 약간 흐렸던 터라 일몰을 마주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막상 가보니 오히려 구름이 약간 껴서 더 멋진 풍경이 연출됐다. 해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약간은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한 30분은 그대로 노을을 보고 있던 것 같다.
내가 파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몽마르트 언덕인데, 그 근처에 살며 숱하게 방문했던 만큼 많은 추억이 담겨있는 곳이다. 그리고 현재 이곳 두브로브니크의 선셋 비치에서, '이곳의 나의 몽마르트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더 좋았던 곳도 많지만, 특히 내 마음이 편하게 해주는 장소였던 이곳은 분명 또 보고 싶을 풍경이었기에 나 스스로에게 있어선 몽마르트와 같다는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크로아티아에 머물던 동안 나한테 가장 고마우면서도 아름다웠던 장소로 남겠지.
숙소로 돌아온 뒤엔 발코니에서 간단히 맥주 한잔 하며 야경을 바라보았다. 이번 여행이 정말 많이 행복한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야! 이 여행기를 적으면서도 계속 의도적으로 행복했던 기억들을 세세히 기록하다 보니 더욱 행복의 감정이 크게 다가온다. 글로 내 마음을 적어간다는 건 참 좋은 습관이야.
내일도 완전히 혼자 보내게 되겠지만, 또 어떤 하루가 펼쳐질지 기대된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이번 여행이 시작하기 전부터 가장 가기를 기대했던 몬테네그로의 코토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