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주로 아내와 함께 있는 동안 일어나는 일이나 생각을 글로 옮긴다.
그러나 예전엔 우울하고 가라앉아 있던 시간이 길었기에 늘 우울한 감정을 가지고 글을 썼었다.
그 당시엔 왜 그렇게 우울하고 가라앉아있었는지를 모르겠다. 난 밝은 사람이 아니기에 늘 평이한 감정선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회사에서 겪은 일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으로 인하여 감정선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감정이 조금씩 우울감으로 물들 무렵 나의 마음은 조금씩 조금씩 연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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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감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가장 먼저 시작한 건 술이었다. 술을 마시면 기분은 우울감을 떨쳐버릴 수 있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우울하다 -> 술마신다 -> 우울함을 잠깐 잊는다. -> 술이 깬다. -> 다시 우울 술 마신다. ….
이렇게 술을 마시다 불현듯 건강에도 나쁜 술을 왜 먹을까 하는 현타와 술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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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끊은 다음 글쓰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울한 감정을 두서없이 써 내려갔다. "휘갈겨 썼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나의 우울한 감정을 바라보기보다는 일단 어디든 풀어내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 내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는 나의 성격상, 나만의 공간에만 감정을 풀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글쓰기를 시작했다.
결국 우울함은 나의 글쓰기의 원천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우울하지 않을 때는 글이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의 글은 난잡하고, 감정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는듯한 두서없고 미사여구가 가득한 글이었다.
감정만 있는 글이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왜 저렇게 적었을까 하는 부끄러움이 얼굴을 덮는다. (그래서 많은 고민 끝에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남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의 상황, 감정을 글로 옮기며 감정을 마주했다는 사실.
우울한 감정을 마저 보며 나의 감정을 인정하고, 더 우울감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만약 우울한 감정을 모른척했다면, 우울한 감정이 마음속 깊이 응어리져 쉽게 풀리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심리학에서도 우울을 탈출하는 방법 중 하나로 감정 마주 보기가 있다. 감정을 마주하면서 감정의 주도권이 바로 나에게 있다는 것이 인지된다. 내가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우울함도 곧 나라는 것 인정한다면 삶이 더 즐겁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래는 그 당시의 쓴 글을 옮겨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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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쓰는 글이다. 역시 우울함은 나의 글쓰기의 원동력이다.
과거의 내가 싫었다고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싫다기보다는 도망치고 잊고 싶어 졌지만..
난 지금의 내 모습이 지난 나의 모습 중 가장 낫다고 생각했지만 2019~20년의 난 스스로에게 지치고 졌다는 걸 인정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 힘든 순간을 이겨낸 것이 아니라 회피하고 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인정하는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데 과연 그 순간이 정말 편안했을까?
그 순간만큼은 나 자신과 현실을 못 본 척 모른척해서 그런지 편안했던 것 같다.
그렇게 도망치고 나서 내 마음은 편안했는지 몰라도 그 후 일적으로는 후회와 후회의 연속이었다. 결국 실패를 겪고 난다음 내가 행했던 과거를 또 후회했다. 과거의 모습이 그때는 좋고 편안하게 느껴졌지만 그 모습이 나의 이러한 실패 속에 있는 현재를 만들어낸 것에 또 후회했다.
후회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다 이러한 나의 태도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다가오는 압박을 모른척해서 스트레스는 적었지만 말이다).
결국 난 35살 먹어서야 다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모르겠다. 과연 내가 다 내려놓았을까? 오히려 내가 놓기로 한 것보다 더 놓아버린 것은 아닐까.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또 이러한 모습을 후회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지금 나 자신의 모습도 잘 모르겠다.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지금은 그때 당시 이루고 싶었던 모습을 이루고 여유도 찾아 나를 돌이켜보고 있다. 그런데도 불안한 것은 과연 과거와 같은 어려움이 다가왔을 땐 또 어떻게 대응 해야할까?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과거의 내가 도망쳤던 그 모습으로 대응하지 않을까 미래의 나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또 안갯속으로 도망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