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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배 Apr 04. 2023

걱정이라는 감자.

마른땅과 내 마음이 산뜻해질때-

화분에 물 주는 건 드립커피를 내리는 것과 비슷하다.라고 얼마 전 본 책의 내용이 떠오른다.(권영경 저 식물일기)

화분에 물을 줄 때 한 번에 와락 쏟아붓지 말고 커피물을 내리듯 천천히, 졸졸 따라 주면 커피 알갱이가 부풀듯이 흙도 약간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으면서 커피 향처럼 좋은 흙냄새를 풍긴다고 했다.


나는 비가 올 때 나는 그 젖은 흙의 냄새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자그마한 텃밭이 있는데 나도 식물똥손이 아닌 그린핑거로 거듭나고 싶어 학부모 텃밭 동아리에 가입했다가 올해는 덜컥 동아리 회장이 되었다. (1년 동안 열심히 삽질만 한 것 같은데 정신 차려보니 분과장 타이틀이 목에 걸려있었다.)


대학생 때 학생회도 해보고, 또 사람들끼리 모여서 티키타카 하는 행위를 좋아하다 보니 별로 어려울 건 없어 보여 만만히 생각했었는데 이곳은 관료제와 거쳐야 하는 행정질서가 빼곡한 초등학교인 데다 열정과 청춘의 대학생이 아닌 엄마들이 모인 정글 같은 곳이라는 걸, 이 단체의 크나큰 특수성까지 차마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제 겨우 새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인데, 어쩌면 그렇게 매일매일 새로운 이슈가 터지고 내 머릿속도 덩달아 터지게 하는지.. 체감하는 시간은 한 학기가 지나간 것 같았다.

 

뭔가 일을 진행하기 위해선 동아리 담당 선생님-행정실 이 루트를 거쳐야 하는데, 혹시라도 선생님의 공유가 누락되면 행정실에서 나는 마치 적장에 끌려온 오랑캐포로 같은 취급을 받으며 행정실 선생님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견뎌야 했다.

물론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외부인이 드나드는 것이니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하기에 적법한 절차임이 분명하여 감내하고자 하지만 이렇게 일의 진행속도가 더뎌지면 이번엔 동아리 회원들. 그러니까 엄마들이 성화인 것이다.

"아니, 그래서 학교에서는 확인을 언제 해준다는 건가요?"

"선생님께 여쭤보셨어요?"

안 그래도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격이기에 이렇게 눈치를 보다가는 내가 가자미라도 되어 버려 이 학교의 슬픈 전설로 남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위아래로 들들 볶아질 줄 알았으면 애초에 회장직을 맡지 말걸이라고 생각해 보지만 용감한 수호자 ISFJ인 나는(MBTI신봉자) 아마도 그럼에도 내가 하겠다 했을게 뻔하다.


이제 점점 날은 따뜻해지는데 아무것도 심어지지 못한 학교의 텃밭이 그렇게 마음의 짐이 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가물어가는 봄날 내 마음에도 흙바람이 꽤나 불어대 한숨을 몇 번이나 쉬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눈치만 보지 말고 그냥 질러버리자, 싶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이러다 학교 아이들이 감자는 만져보지도 못한 채 여름이 올 것 같으니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으니 감자를 심어야겠다고.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하니 학교에서도, 회원들도 이번엔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그리하여 심었다. 감자를. 학교 텃밭에.


감자를 심겠다 하고 감자를 땅에 심는 과정까지도 무수한 행정절차와 카드 영수증과 간이 영수증과 회원들의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어찌 되었던 감자는 흙속에 가만히 박혀 싹을 틔울 준비만 하도록 잘 심어졌다.


이 감자 하나를 심겠다고 밤낮으로 걱정하며 소요해 버린 나의 시간이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가버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의 걱정은 두 세발 앞서 나갔고, 그 속도가 중력이 되어 걱정 속에 나를 가두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걱정에 비해 현실은 심어져 버린 감자처럼 작고 주먹만 하다.


감자는 심어졌고, 때마침 비도 내린다.

아주 개운하게.

감자는 비를 맞아 쑥쑥 자랄 것이고,

내 마음에 불던 흙바람도 비에 씻겨 더 산뜻해질 것이다.


마른땅에 비가 오면 퍼지는 커피 향 같은 젖은 흙냄새가 오늘밤에는.

학교 텃밭에도, 내 마음에도 촉촉하게 풍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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