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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dodok May 01. 2022

왜 비유를 사용하는가.

문창과에서는 무엇을 배우나 11

잔인한 4월에는 중간고사라는 첫 번째 관문이 버티고 있었다. 입학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시험이란 말인가. 길 눈이 어두운 탓인지 아직 강의실 찾아다니기도 익숙지 않다. 과목 이름도 적응이 안 되던 어떤 교양수업은 비대면 수업으로 어느 날 갑자기 바뀌었다가 다시 대면으로 진행한다. 초보 대학생 입장에서 혼란스럽다. 코로나 마스크 탓일까 아니면 소심한 성격 탓일까. 아직 학우들 이름도 다 모른다. 이름은커녕 얼굴도 다 기억 못 할 정도로 학교생활이 서먹한 부분이 많은데 벌써 1학기 중간고사다.


전공과목 교양 과목 할 것 없이 대다수 시험이 서술형으로 진행된다. "철학과 폐지 찬반에 대해서 본인 견해를 논증하시오" 또는 "콘텐츠 라이팅의 법칙에 의해 좋은 콘텐츠를 한 가지 이상 기술하시오" "전공학과의 특성을 살려서 고고학적 관점에서 PPT를 만드시오"등등 전공과목보다 더 막막한 교양과목도 달랑 한 줄로 주어진다. 아직도 매번 강의실 찾아서 이리저리 헤매는 신입생에게 '논증' '정리' '기술' 등의 현란한 용어로 진행되는 난감한 시험이다. 시험 범위를 알려주고 그 범위 내에서 무작정 외워대던 중 고등학교 때가 조금은 그립다.


오늘 전공 수업은 비유에 대해서다.

왜 비유가 필요하고 어느 때 사용되는가.


"한국어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난센스 퀴즈 같은 교수의 질문에

우리 과 학생들은 조건 반사적으로 "세종대왕!!"을 외치면서 걸려든다.

틀렸다, 세종대왕이 만든 것은 한국어를 표기하는 방법을 만든 것이다. 한국어는 이미 세종대왕 이전부터 이 땅에 거주하는 인간들이 집단으로 만든 토착언어였다.


어쩌다 보니 특정 언어가 특정 대상과 결합한 것이다. 우연히 자의적으로 만들어졌다. 시작은 지극히 자연발생적으로 자의성을 갖고 만들어졌지만 그것을 이제 와서 자의적으로 바꿀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책상'이라고 통용되어온 것을 이제 와서 '의자'라고 바꾸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책상은 언어라는 형식에 의해 사회적으로 책상이라고 약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소리나 색은 창조자 개개인의 의도대로 만들거나 변형이 가능하지만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므로 어느 개인이 임의로 바꿀 수 없다. 자의적으로 바꿀 수 없는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표현의 변형과 창조를 꾀하는 대안으로 비유가 동원되는 것이다.


일상어로 가능하지 않은 욕망이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특정 언어를 선택하거나 변경한다. 결국 비유가 동원되어야 한다. 우리가 평소 언어생활에서 쉽게 접하지 못하는 인상적인 비유는 오래 남는다. 적절한 비유가 포함된 글은 더욱 강렬해진다. 표현론적 관점에서 강렬 성, 구체성, 명증성에 기여한다. 결국 비유는 구체적인 사물과 추상적인 언어 사이의 장벽을 걷어내고 사물과 언어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표현방식의 하나로 동원되는 것이다.  


문학은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이다.


비유의 개념: 비유란 문학의 표현기법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표준적 의미를 지니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어법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의미로 전이된 언어 표현을 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물, 다른 사물을 빌려와서 표현하는 언어 양식이라는 점에서 비유란 소박하게 말해서 비교에 의한 사물 이해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독창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비유의 사용은 언어의 사전적 지시적 사용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이때 비유를 위해 끌어들인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이 존재한다.  metaphor는 희랍어에서 왔다. meta(초월) + phora(전하다, 운반하다) 즉 '초월하여 전하다'의 어원이다.


전 국민이 다아는 동요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달'을 통해서 비유의 적절성을 알아보자. 하늘에 떠 있는 둥근달을 표현하기 위해 주방에 있는 쟁반을 끌어 왔다. 처음 이 노래가 발표됐을 당시에는 나름대로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놀랍다는 기분이 안 든다. 이미 낡았기 때문이다. 익숙하기 때문이다. 쟁반에 비유된 보름달은 전 국민이 너무나도 평범하게 사용하는 습관화된 비유로 전락했다. 모든 표현이 그렇듯이 비유 역시 습관화 자동화되면 그 효과를 얻을 수 없다. T(취지 Tenor)와 V(수단 Vehicle)의 관계가 이처럼 널리 알려져 이미 습관적으로 시용되는 비유를 죽은 비유라고 한다.(dead metaphor)


비유 인지도 모르고 쓰는 죽은 비유들이 우리 주변에 넘친다. 죽은 비유는 사물과 세상을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투화시킨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낡은 비유가 대체로 이렇다. 예를 들면 세월이 흘러, 앵두 같은 입술, 사랑에 빠지다, 바늘귀, 못대가리, 우두머리, 산허리, 목에 힘주어, 치마폭에 휩싸여, 애태우다 등 많이 있다. 그러므로 참신한 비유, 살아있는 비유는 T와 V사이에 서로 반발력과 응집력이 작용한다. 비유되는 세계(원 관념)............ 비유하는 세계(보조관념)

두 세계의 거리가 멀수록 긴장이 클수록 인상적(반발력)이다.

두 관념이 일정한 관계의 형성이 있을수록 설득적(응집력)이다.


참신한 비유, 살아있는 비유는 T와 V사이에 서로 반발력과 응집력이 작용한다. 비유되는 세계(원 관념)와 비유하는 세계(보조관념)는 거리가 멀수록 긴장이 클수록 인상적(반발력)이고 일정한 관계의 형성이 있을수록 설득적(응집력)이다. '쟁반같이 둥근달' '인간은 갈대다' '앵두같은 입술'을 예로 보자. 원관념(취지 Tenor) 즉 표현하려고 한 원래의 대상이 달,  인간,  입술이라면, 보조관념(수단 Vehicle)은 원 대상을 위해 동원된 대상 즉 쟁반,  갈대, 앵두다. 즉 원 관념은 보조관념에 의해 힘을 얻게 된다.


1) T와 V는 동일해서는 안된다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비유는 성립되지 않는다.

2) T와 V는 전혀 관련이 없는 대상이어서는 안 된다. 관련이 없으면 비유의 근거가 미약해지므로 유사성 동질성 및 인접성이 필요하다.


낯설고 신선한 비유를 사용한 시를 보자.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김광균의 시/추일 서정 秋日抒情 부분)


이제는 용도가 없는 '망명정부의 지폐'를 낙엽으로 표현했다. 또 걸어가야 하는 길을 '구겨진 넥타이'로 표현하면서 스산한 도회적 감수성을 엿보게 한다. 1940년대에 나온 작품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시대를 앞서가는 시각의 비유가 여전히 녹슬지 않고 생생하고 미래지향적이다.  


팝송에서도 '면도날'같은 날카로운 비유를 찾아볼 수가 있다. 제니스 조플린'의 생애를 다룬 영화에서  '배트 미들러'는 사랑의 날카로움에 대해 노래한다.


some say love  it is a razor

어떤 이들은 사랑은 면도칼이라고 말한다

<The rose 부분>


잘 알려진 우리의 옛시조를 통해서 비유의 함의를 보자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는 수사적 비유의 세계관과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세계관 사이의 대립을 보여준다. 시조에 대한 해석이나 선호도에 대해서는 개인적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비유에 대해 생각하면 작품 '하여가'에 비해 '단심가'는 은근한 감칠맛이 떨어지며 관념적 노출이 심하다. 비유는 관념을 생생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힌 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와 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여가'나 '단심가'로 불리는 위 두 시조는 물론 후세에 지어낸 시조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두 사람이 읊었다면 시중에 떠도는 시조를 읊었을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후세에 지어진 시조일 가능성이 많다. 당시 두 사람 술잔을 나누면서 한달음에 이런 시를 지었다는 것에 동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두 시조가 수백 년을 불러지는 데는 깊은 뜻이나 가치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탓일 것이다. 아무튼 두 시조의 공통점은 그 당시 각자가 처해있는 이념과 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동지섣달 긴긴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그에 반해 황진이의 시조는 연애 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즉 님을 기다리는 추상적인 시간의 심사를 매우 구체적인 사물로 비유하여 생생한 이미지로 그려낸다. 심지어 상당히 육감적인 애정의 정서를 표현한 성적인 느낌이 강하다. 우리들은 뻔한 교훈적인 이야기보단 이러한 사랑이나 연애 시에 더 공감을 하기도 한다. 거창한 대의명분보다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다룬 시가 제일 먼저 다가오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도 자아가 강한 황진이가 본심으로 썼다기보다는 관의 요청으로 썼을 수도 있다는 소수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임에는 틀림없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예전 유교 선비들은 글에서는 멋있지만 실제 삶은 욕망을 가지고 살았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서 후학을 길러내고 고고하게 연명하는 듯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너비아니를 먹고도 산채만 먹는 걸로 글에서 표현하기도 했다. 임금님 요청도 거부하는 것으로 글은 썼지만 현실세계 선비들 상당수는 그런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도성 주변에 머무르면서 임금님에게 잊히지 않으려고 애썼다. 당대의 세계관이 그랬다. 물론 그 잔재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글로벌 시대 한국 사회의 명과 암이 되고 있다.  


우리들은 글쓰기 할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를 쓰는 게 아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를 써야 한다. 초중고 때의 글쓰기가 선생님에게 보여주는 글쓰기였다면, 이제는 솔직하게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 학생 신분으로 지내지만 자기감정에 충실한 글을 써라 '교수가 읽어 볼 텐데' 그런 걱정을 하지 말고 일단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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