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소설과 90년대 소설이 한 지점에서 만난다.
문창과에서는 무엇을 배우나 24
문학 기초 수업시간이다.
오늘의 과제는 두권 이상의 소설을 읽고 그 작품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을 찾아 기술하는 것이다. 그동안 읽은 책이 많지 않은 입장이라 당황했다. 슬쩍 물어보니 다른 학생들은 다들 두툼한 책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시간 제약상 장편보다는 중 단편 중에서 선정하기로 했다. '무진기행'과 '천지간'은 순전히 얄팍한 편의주의적 관점에서 선택한 책이다. 일단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2권을 빌렸다. 얼마나 많이들 봤는지 책 표지부터 많이 낡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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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과 천지간
60년대 소설과 90년대 소설이 한 지점에서 만난다.
김승옥은 60년대 작가다. 그의 작품은 당시 소설 문학의 큰 흐름인 도덕주의나 교훈적 이야기를 뛰어 넘어서 개인에게 침참하는 소설을 썼다. 당대 주류 문학에서 한걸음 물러선듯한 냉소로 소재주의와 무관한듯한 이야기를 썼다. 농촌사회에서 공업국가로의 변화를 꿈꾸던 60년대에, 본격 다가올 도시화에 대한 예언자적 소설 쓰기를 했다는 것이 경이롭다. 어찌 보면 90년대에 보편화된 자기 내면을 소재로 한 글쓰기의 원조격인 작가다.
사회적 변혁을 주장하던 리얼리즘 소설이 주류를 이루던 80년대를 지나서 90년대에는 개인적 내면세계를 통해 글쓰기 자체를 성찰하고자 하는 작가군을 만난다. 그중에서 윤대녕은 이념적 요건에 의해 크게 좌우되던 1980년대 이전의 소설과는 맥락을 달리한다. 문학성 자체에 대한 천착을 목표로 함으로써 민주화에서 개인화로 전이되는 새로운 시대 상황과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시대를 뛰어넘어서 문학적 지향점이 유사한 김승옥과 윤대녕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무진기행'과 '천지간'을 중심으로 두 작품이 관통하는 지점을 정리해 보자.
두 작품의 유형별 유사점
1) 여로 구조형 작품이다.
'무진기행'은 서울의 모회사 중역이 예전 살던 남도를 잠시 찾아가서 겪는 형식의 소설이다. '천지간'은 서울에서 초상집을 가다가 터미널에서 만난 여인의 뒤를 따라간 남도에서 겪는 형식의 소설이다.
2) '나'로 시작되는 1인칭 소설이다.
화자인 '나'가 소설의 문장을 풀어낸다. 장점은 몰입감이다. 주인공의 심리나 처한 상황 등을 더욱 세세하고 긴장감 있게 묘사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타자화된 나를 통해 독자들은 나를 지켜볼 수 있다.
3) 상징물이 등장한다.
'무진기행'에서는 안개가 작품 전편에 깔려있다. 안개는 일상에서 벗어난 비일상의 세계를 뜻하면서 작품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반면 '천지간'에서는 '흰빛'의 이미지가 작품에 녹아있다. 백색은 강렬한 삶에 대한 의지이자 생명의 따뜻함으로 돌려놓는 색채인 것이다.
4) '나'로 표현되는 주인공들은 도시민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 공간을 벗어나서 비일상적인 공간으로 떠난다 그 공간이 조그만 어촌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속물적인 주인공들은 도시생활의 스트레스를 고향의 원형이 남아있는 작은 어촌에서 소비한다.
5) 자살하는 여인들이 등장한다.
두 작품에서 약속이나 하듯이 자살자가 등장한다. 미친 여자(무진기행)와 소리꾼(천지간), 두 여인들은 우리네 한과 방황을 대변하며 죽어가는 역할을 한다.
6) 결국은 현실로 돌아온다.
두 작품 공히 나로 대변되는 주인공이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이야기가 끝난다. 결국 비일상적인 공간을 소비하는 형태의 여정을 다룬 대표적인 작품이다. 무진기행이 안개를 통해 감추고 싶은 비 일상성을 나타내려고 했다면, 천지간은 백색을 통해 비일상적인 구원의 세계에 의지하고자 했다.
우리는 고향을 잃어버리고 도시에서 치열하게 생존경쟁을 내몰리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도시생활은 필연적으로 마음의 고향을 찾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처방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오늘도 지친 도시생활의 스트레스를 털어버리고자 주말이나 휴일이면 시골로 달려간다. 그렇지만 얼마나 삶이 재충전될 것인가. 이미 원형을 잃고 속물적으로 변한 시골에서 충전보다는 방전되는 사례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로형 소설은 새롭게 변형된 형태로 꾸준하게 등장할 것이다. 현대인들은 1인칭으로 쓰인 여로형소설을 통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마음을 위로받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객체화시키는 '무진기행'과 '천지간' 형태의 소설은 2000년대에도 여전히 문학적 소임을 할 것이다. 노매드를 꿈꾸는 현대인의 가슴 깊게 자리매김한 소설 형식이기 때문이다.
----------------------사족
'무진기행'의 첫머리에 나오는 문장 일부를 옮겨본다.
식견이 부족하고 문학책을 읽은 적이 별로 없지만, 무진기행에서 따온 아래 대목은 진짜 명문장인 것 같다. 감히 덧붙이자면 한국 소설사에 기록될 명 문장인 듯 싶다. 이 짧은 단락 속에는 앞으로 등장할 모든 이야기의 함의가 농축되어있는 듯하다. 이런 명 문장을 내 것으로 갖고 싶다. 순전히 불가능할 욕심일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의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