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고 관능적인 브랜드, 베르사체
지아니 베르사체에 관하여
이탈리아의 패션 디자이너 지아니 베르사체(Gianni Versace, 1946~1997)는 여성의 몸매를 아름답게 드러내는 대담하고 화려한 컬러감의 이브닝 웨어로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이끌어간 중요한 패션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의 여자 괴물인 메두사의 금빛 머리를 로고로 하는 베르사체는 화려함, 관능미, 사치, 황홀감, 쾌락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뛰어난 입체 재단 기술을 바탕으로 여성의 몸매를 아름답게 살린 간결한 라인의 베르사체의 드레스는 고대 그리스·로마, 비잔틴, 르네상스, 바로크·로코코 예술, 현대 미술들이 생생하게 표현된 화려한 컬러의 이탈리아산 고급 프린트 원단, 체인 메시, 가죽, PVC소재들과 함께 어우러져 남부 이탈리아 특유의 우아함과 관능미, 정열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물질주의가 만연하는 화려한 소비의 시대에 베르사체의 의상은 성적 욕망, 아름다움과 부유함를 뽐내고 싶어하는 인간의 과시욕을 만족시키며 ‘럭셔리한 퇴폐’라고 불렸으며, 착용자의 자신감, 성공의 표식이 되었다.
1. 어머니에게 쿠튀르를 배운 이탈리아의 한 소년
지아니 베르사체는 1946년 12월 2일, 이탈리아 남부의 컬러브리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재봉사였던 어머니 프란체스카와 가정용품 세일즈맨이었던 아버지 안토니오 베르사체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패션 사업가로서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다.
지아니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아틀리에의 한 구석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패션을 배웠다. 프란체스카는 컬러브리아의 고객들을 위해서 당시 유행하던 파리의 패션, 그 중에서도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드레스들을 복제해 판매했다. 지아니는 재단하고 남은 작은 원단들로 인형을 만들며 시간을 보냈는데, 9살에 첫 드레스인 원 숄더 벨벳 이브닝 드레스를 완성하기도 했다.
지아니 베르사체가 뛰어난 재단 실력을 가진, 몇 안 되는 디자이너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디자인 스케치를 하는 것보다 옷의 복잡한 내부 구조와 옷을 만드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던 지아니는 패션이 자신의 길임을 깨닫고 어머니의 의상실에서 본격적으로 견습 생활을 시작했다. 특히 장식에 쓰일 비즈, 레이스와 같은 고급 부자재, 이탈리아산 고급 소재 같은 자재들을 직접 구매하는 일을 담당하면서 다양한 쿠튀르 장식 기법과 소재에 대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컬러브리아의 작업실에서는 어머니에게 입체 재단과 같은 재단 기법을 배우고, 매장에서는 손님에게 판매하는 일을 통해 고객의 욕구를 파악하는 등 이 시기 그는 패션 사업거로서 필요한 초석들을 다졌다.
2. 베르사체 제국의 밀라노 패션계 입성
지아니 베르사체는 더 큰 꿈을 펼치기 위해 1972년 이탈리아 패션계의 본고장 밀라노로 건너갔다. 플로렌틴 플라워즈 브랜드에서 첫 컬렉션을 디자인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니, 컬러강, 컴플리체와 같은 이탈리아의 유명 패션 회사에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서의 경력을 차근차근 쌓아갔다.
제니 사를 위한 스웨이드, 가죽을 이용한 패션 디자인, 컴플리체를 위한 화려한 이브닝 가운 디자인 등과 같은 다양한 디자인 경험은 지아니 베르사체 디자인 작업의 초석이 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 설립이라는 꿈을 품고 있었던 지아니 베르사체는 믿을 수 있는 든든한 사업 파트너가 필요했다. 1976년 경영을 전공한 형 산토 베르사체가 동생을 돕기 위해 밀라노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지아니 베르사체 컬렉션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지아니는 형의 도움을 받아 1978년 밀라노의 대표적인 쇼핑거리인 비아 델라 스피가에 쇼룸을 오픈하고, 그해 말 팔라조 델라 페르마넨테 아트 뮤지엄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여성복 컬렉션을 선보임으로써 밀라노 패션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듬해인 1979년에는 첫 번째 남성복 컬렉션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지아니 베르사체의 여성복 디자인의 근간에는 여동생 도나텔라 베르사체가 있었다. 지아니는 도나텔라를 ‘완벽한 여성'이라고 칭송하며 활력이 넘치는 섹시한 파티 걸인 여동생을 뮤즈로 삼아 디자인 작업을 전개했다.
도나텔라는 베르사체에게 뮤즈이면서, 신랄한 비평가이기도 했는데, 그녀의 아이디어를 수용하면서 지아니는 특유의 관능적이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의상들을 선보였다.
지아니, 산토, 도나텔라 삼 남매의 ‘베르사체 삼두정치’는 놀라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오트 쿠튀르 라인인 ‘아틀리에’, ‘지아니 베르사체'와 대중을 위한 비교적 저렴한 라인인 ‘이스탄테', 남성복의 대중화 라인인 ‘브이 투 바이 베르사체’, 마담 사이즈 브랜드 ‘베르사틸’, 캐릭터 캐주얼 ‘베르수스', ‘베르사체 진’과 함께, 액세서리, 화장품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로 라이선스 사업이 확장되면서 베르사체 제국을 설립했다.
3. 해박한 예술사에 입각한 포스트모더니즘 패션
지아니 베르사체가 한 인터뷰에서 “역사에 대한 지식은 사물을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준다.”고 밝혔듯이, 그의 디자인은 예술사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역사주의 의상을 기반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지아니의 역사주의 의상은 단순히 한 시대의 스타일이나 문양을 차용한 것 뿐 아니라 여러 시대의 이질적인 예술 양식의 문양과 형태를 자유롭게 섞는 포스트모더니즘 패션의 형태로 등장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주의와 르네상스 시대를 섞거나, 이탈리아 바로크시대와 미래주의를 혼합하여 새로운 대담하고 기하학적인 문양을 창조했다.
이처럼 여러 시대의 문화적 산물로 탄생한 새로운 문양들은 고급 이탈리아산 실크에 아름답게 프린트 되어 모던한 이브닝 드레스, 탑, 팬츠, 스커트 등으로 다시 탄생했다.
특히 남부 이탈리아 출신인 지아니 베르사체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그래서 지아니가 수집한 고대 그리스·로마 예술품들은 미술관을 방불케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자신의 디자인 하우스의 로고를 고대 그리스 신화 속에서 아테네 여신의 저주를 받은 괴물인 메두사와 그리스의 격자무늬로 정했다는 점에서도 그의 디자인의 뿌리가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와 인본주의의 르네상스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아니는 크레타 문명의 도자기들의 도안, 고대 그리스·로마의 조각상을 비롯한 예술 작품을 대담하고 화려한 색채감의 프린트로 개발했고, 고대의 동전은 금속 단추나 브로치, 핀과 같은 장식으로 탈바꿈시켜 의상에 포인트가 되는 디자인 요소로 활용했다.
이밖에 비잔틴 시대의 십자가인 렐리쿼리나 모자이크는 가죽 소재 위에 비즈, 인조보석을 이용한 표면 장식으로 표현되어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냈다.
르네상스의 슬래시와 고대 동전 디테일의 안전핀이 조화를 이루거나, 호사스러운 바로크의 문양은 동물 무늬와 함께 혼합되어 관능적인 프린트로 자유분방한 느낌을 더하기도 했다.
베르사체는 현대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추상 표현주의, 팝 아트, 옵 아트에서 또한 자주 차용했다. 특히 베르사체는 팝 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팝아트의 화려한 색채감은 베르사체가 즐겨 사용하던 대담한 컬러들의 사용과 일치한다.
1991년 지아니는 마를린 먼로와 제임스 딘의 얼굴이 가득 그려진 팝 아트 이브닝 드레스를 발표하였는데, 이 드레스는 예술과 패션의 만남이라는 주제를 대담하게 표현하여 복식사에서 주목받는 중요한 드레스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4. 신소재와 정교한 테크닉
베르사체 디자인의 혁신성은 역사주의, 예술에서 영감을 받은 대담한 문양, 화려하고 과감한 컬러 의 사용뿐 아니라 독특한 소재의 사용에서도 잘 드러난다. 지아니는 호기심이 많고 대담한 성격이 소유자로,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거나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여러 소재들을 섞어서 사용해보는 다양한 실험을 했다.
베르사체의 디자인은 과도한 문양과 컬러 사용에 반해 인체의 곡선미에 충실한 클래식한 실루엣을 가지고 있다. 이런 간결한 라인의 실루엣은 입체 재단이나 바이어스 컷으로 완성된 것으로, 그가 개발한 소재와 표면 디자인이 럭셔리하고 호사스러움을 더했다.
지아니 베르사체를 혁신적인 디자이너의 반열로 오르게 한 것은 1982년에 발표한 메탈 메시 소재인 ‘오로톤’이다. 그는 중세 시대의 갑옷에서 영감을 받아 얇은 메탈 사(絲)로 사슬을 만들어 엮어 고운 쇠사슬 원단인 오로톤을 개발했다.
메탈 메시원단인 오로톤으로 만든 이브닝 드레스는 메탈의 무게감과 유연성을 모두 지닌 획기적인 소재였다. 오로톤으로 만든 이브닝 드레스는 착용자를 금빛을 발하는 조각상으로 변신시켰다. 메탈의 무게감은 옷을 인체에 더욱 밀착시켜 몸매를 아름답게 드러내게 하였고, 얇은 메탈 사슬은 유연성을 가져 물 흐르듯 몸의 곡선을 따라 흘렀다.
밀라노의 프리랜서 디자인 시절부터 많이 다루었던 가죽 소재는 베르사체가 즐겨 쓰는 중요한 소재였다. 부드러운 가죽을 가지고 ‘제 2의 피부’인 것처럼 몸에 밀착되게 만든 드레스나, 인조 보석, 스터드로 화려한 문양을 새긴 가죽 재킷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들이다.
특히 록 앤 롤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가죽 끈 스트랩, 금속 징 장식, 버클 장식이 가죽 소재와 더해서 화려함을 한층 더 풍부하게 했다.
베르사체의 “적은 것은 정말 부족하다.”라는 독특한 디자인 철학은 직물의 표면 디자인에서 잘 드러났는데, 꽃무늬, 동물 문양, 기하학적 무늬, 바로크·로코코의 호사스러운 문양들이 단순한 실크 프린트기법으로만 표현된 것이 아니라, 금속 장식, 비즈, 자수, 인조 보석, 스팽클 등으로 장식되어 독특한 재질감으로 완성되었다. 그는 한 벌의 옷에도 여러 가지 장식 기법을 과도하게 동시에 사용하며 특유의 미학을 드러냈다.
1988년의 꽃무늬 드레스의 경우 상의 부분은 비치는 시폰 소재에 비즈와 인조 보석으로 꽃 문양이 묘사되어 있고, 스커트 부분에는 커다란 꽃 무늬 프린트와 작은 크기의 자수 장식이 공존하며, 꽃무늬 프린트의 넓은 보라색 가죽 벨트에는 커다란 금속 버클 장식이 달려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금속을 주조한 꽃 장식들이 팔찌와 구두 뒷굽에 달려 화려함과 극적인 효과를 더했다. 1991년의 파스텔 컬러의 베이비 돌 드레스는 여성들의 속옷에서 영감을 받아 실크 원단의 브라 탑에 레이스를 달아 상의를 완성하고, 실크 주름 원단과 레이스를 패치워크한 스커트, 금색의 금속 장식을 더해 반짝거림을 추가했다.
1991년 선보인 호랑이 문양의 브라 탑과 금색 망사 스커트로 구성된 의상의 경우도 비즈로 만든 호랑이 문양, 화려한 금색 목걸이, 호랑의 문양의 가죽 벨트, 금장의 버클 등과 같은 과도한 장식기법이 눈길을 끌었다.
이 밖에 PVC 비닐 소재를 이용한 이브닝 드레스는 1930년대 셀로판 소재로 드레스를 만든 표현주의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와 소재의 혁신적 사용에 있어 뜻을 같이했다. 지아니는 또한 처음으로 오트 쿠튀르 패션에 데님 소재로 만든 이브닝 웨어를 선보인 디자이너로 알려져 있다.
데님과 섬세한 레이스를 접목하거나, 크레프 드 쉰(생사로 만든 프랑스 비단의 일종)과 같은 고운 견 소재에 징 장식을 가득 박기도 하고, 가죽과 벨벳에 비드 자수를 시도하는 것과 같은 자유로운 직물 표면 디자인과 원단의 사용은 세심하고 까다로운 손바느질 기술에 대한 그의 높은 이해력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은 장인 정신의 산물이다.
5. 본능에 충실한 울트라 섹시룩, 여체에 대한 찬양
지아니 베르사체는 “배꼽, 허벅지, 등과 같은 여성의 신체의 일부를 드러내는 새로운 방법을 연구한다.”고 밝혔는데, 실제로 그는 신체가 많이 드러나는 노출이 심한 드레스들로 악명이 높았다.
짧은 스커트나 긴 스커트의 슬릿은 허벅지를 노출시켰고, 깊게 파인 데콜타주 넥라인은 가슴을 훤히 드러냈다. 때문에 혹자들은 그를 ‘매춘부들의 쿠튀리에’, ‘상류층 매춘부 스타일의 왕’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스트릿 패션, 하위 문화의 패션에 주목하여 거리의 활력과 젊음의 에너지를 하이 패션으로 가져온 위대한 디자이너들은 여럿 존재해 왔다.
그러나 베르사체의 특이할 만한 점은 거리의 여인, 매춘부나 남창 등 성매매업자들에 주목했다는 것이다. 지아니 베르사체 사후 1997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회고전를 기획한 리차드 마틴은 “지아니 베르사체는 매춘부들의 허세 넘치는 태도, 눈을 사로잡는 옷차림과 노골적인 성행위를 관찰하고, 하이 패션에 소개했다. 그는 단순히 매춘부를 살롱과 런웨이에 그대로 전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거리에서 영감을 받아 패션이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고 베르사체의 울트라 섹시룩에 대해 논평을 남겼다.
베르사체의 경박해 보이는 짧은 스커트, 반짝거리는 소재의 의상, 화려한 색채감의 도발적인 의상들은 여성을 학대하거나 비하하려는 의도로 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여성들이 본인이 여성임을 드러내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를 원했다.
지아니 베르사체는 자신의 몸에 성적 매력을 부여하고 남성들의 시선과 성적 대상화를 즐길 수 있는 자신감이 넘치는 당당한 현대 여성을 위한 의상을 제시하였다. 과장되고 극대화된 여성성은 여성들에게 자유를 가져왔고, 그 근본에는 여성 스스로의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1992년 가을 컬렉션에서 발표한 가죽 끈과 금속 버클, 본디지 패션도 이런 그의 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가죽과 메탈 반짝거리는 PVC 소재, 가죽 스트랩, 금속 징 장식, 금속 버클, 족쇄, 코르셋의 레이싱 장식, 안전핀등의 사용은 성적 일탈을 의미하고 있다.
베르사체의 노골적인 스타일은 비난을 받기도 하였지만 남의 시선,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만만한 사람들이 입을 수 있는 스타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는 금기시 되어왔던 인간의 본성, 성적인 욕구에 충실한 하이 패션으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패션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6. 슈퍼 모델, 팝 스타, 영화배우와 함께한 패션의 엔터테인먼트화
지아니 베르사체의 높은 창의성은 패션 디자인 영역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1990년대 전세계를 풍미하던 슈퍼 모델를 탄생시킨 장본인으로, 스타들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그의 디자인을 널리 알리고 결과적으로는 패션을 대중들의 관심의 영역으로 끌어 올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0년대에 전세계의 사람들은 슈퍼 모델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얼굴, 관능적인 몸매의 몇몇의 탑 모델들에게 열광했다.
지아니 베르사체는 그의 화려하고 글래머스한 디자인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기 위하여 당시의 유명 모델이었던 신디 크로포드, 린다 에반젤리스타, 나오미 캠벨, 크리스티 털링턴 등을 모두 높은 개런티에 캐스팅해 매 시즌 그의 패션쇼에 올렸다.
그녀들의 자신감이 넘치는 워킹, 카메라와 관객을 유혹하는 당당한 몸짓은 곧 베르사체의 드레스의 매력을 높였고 베르사체 브랜드는 곧 럭셔리함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지아니의 도발적이고 대담한 디자인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는 유명인들에게만 옷을 제공하기 원한다.”는 거침없는 발언을 하기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를 원하는 팝 스타, 영화 배우와 같은 유명인들에게 지아니의 의상은 지나친 노출과 도발로 저속하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기는 했지만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는 완벽한 의상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지아니 베르사체는 1년 4번의 패션쇼만 가지고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365일 파파라치의 카메라와 대중의 관심 속에서 살아가는 유명인사 즉 팝 스타, 영화 배우들이 중요한 패션의 선도자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친화력을 바탕으로 유명 인사들에게 그의 디자인을 입히기 시작했다.
지아니 베르사체는 엘튼 존, 티나 터너와 같은 록 스타들의 무대 의상을 제작해주기도 하였고 영화 배우들의 레드 카펫 의상을 제공해줬다.
베르사체의 한 벌의 드레스로 인생이 바뀐 스타도 있었다. 영국의 무명 배우였던 엘리자베스 헐리는 당시 남자 친구였던 휴 그랜트가 출연한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시사회에 베르사체의 검은색 안전핀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참석했다.
깊게 파인 가슴 라인과 스커트의 긴 슬릿 사이로 허벅지가 드러난 조각 조각난 검은 색 원단을 금색의 큰 안전핀들로 이은 노골적이고 도발적인 이 드레스는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무명 배우였던 그녀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하였다. 이후 엘리자베스 헐리는 화장품 회사 에스테 로더와 광고 계약을 체결하게 되고 섹시함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베르사체의 패션쇼는 맨 앞줄은 항상 유명인사로 가득찼으며, 그의 패션쇼는 슈퍼모델들로 구성되었다. 스타들과 슈퍼 모델들의 인기를 발판 삼아 그의 패션쇼장 주변은 언제나 열광하는 팬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패션은 단순한 옷, 제품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즉 오락의 하나로 떠오르게 되었다. 지아니 베르사체의 유명 스타와 슈퍼모델을 이용한 홍보 전략은 텔레비전과 뉴스와 같은 대중매체를 패션계로 끌어들였으며, 그 결과,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패션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7. 이탈리아 패션계의 태양왕의 극적인 사망
지아니 베르사체는 옷에 대한 에티켓을 재정립했다. 그는 점잖은 체하는 예의를 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패션에 모든 욕망을 담아냈는데, 그의 패션에 대한 갈망과 성욕은 바른 행동에 대한 사회적인 잣대와 관습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디자인 철학은 그의 삶에서도 잘 드러났다. 이탈리아의 남부의 가난한 가정 출신인 지아니 베르사체는 짧은 시간에 전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막대한 부를 얻었다.
베르사체는 사치를 미덕으로 삼고 상상도 할 수 없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 지아니 베르사체의 저택들은 수많은 예술 작품과 화려한 가구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유명 인사들에게 3만 불이 호가하는 오트 쿠튀르 드레스를 선물하고 그들을 초대해 파티를 하며 보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그의 화려한 인생은 급작스럽게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 1997년 7월 15일 마이애미 자택 앞에서 동성애자 연쇄 살인범인 앤드루 커내넌에게 총을 맞아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지아니 베르사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파격적인 디자인 만큼이나 극적인 것이었다. 범인인 앤드루 커내넌이 8일 후 자살한 채로 발견되면서 그의 죽음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생전에 베르사체 그룹이 마피아의 돈세탁을 했었다며 그의 죽음의 배후에 마피아가 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으나 그의 가족들은 마피아 연루설을 부인했다.
지아니 베르사체는 그의 유산 대부분을 도나텔라의 딸이자 가장 사랑했던 조카 알레그라에게 남겼다. 갑작스런 지아니 베르사체의 사망으로 알레그라 베르사체는 베르사체 그룹의 지분 50%의 소유주로 이탈리아 패션계의 가장 중요한 여성이 되었다.
30%의 지분은 형인 산토 베르사체가 , 20%의 지분은 도나텔라 베르사체가 소유하여 사업을 계속 이끌어 가고 있다. 현재는 형 산토가 최고 경영자로서 경영을 책임지고 있으며, 본인 스스로 ‘베르사체 걸’이었던 도나켈라 베르사체가 수장 디자이너로 디자인 하우스를 이끌고 있다. 그녀는 오빠인 지아니 베르사체의 스타일을 특유의 현대화된 감각으로 풀었다는 호평과 함께 성공을 거두고 있다.
베르사체 그룹은 패션, 시계, 액세서리, 선글라스, 향수, 화장품, 구두, 가구, 그릇 등의 분야에 진출해 있으며 전 세계에 350개의 아웃렛과 160개 이상의 부티크를 운영하고 있으며, 유명한 도자기 회사 로젠탈을 비롯한 여러 회사가 베르사체 라이선스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베르사체 그룹은 또한 호주에 호텔 팔라초 베르사체를 소유하고 있다.
미국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는 이탈리아 출신의 두 패션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지아니 베르사체를 다음과 같이 짧게 설명했다.
”아르마니는 부인들이 입을 옷을 만들고, 베르사체는 정부(내연녀)의 옷을 만든다.(Armani dresses the wife and Versace the mistress.)” 지아니 베르사체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사치가 미덕이던 화려한 소비와 욕망의 시대에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사치스럽고 관능적인 의상들을 제안했다. 지아니 베르사체의 대담하고 도발적인, 금기를 깬 패션 디자인은 우리에게 더 큰 자유를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