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승완 Jun 14. 2020

존 갈리아노

로맨스의 영웅, 악마의 재능

‘천국의 화려한 새, 패션쇼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디자이너’, <Fashion- 150 Years of Couturiers, Designers, Labels>의 저자 샤를로트 실링이 생각한 존 갈리아노의 이미지이다.

‘패션계의 악동’, ‘로맨틱의 영웅’ ‘패션 천재’라는 수식어로도 유명한 갈리아노는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예술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상’을 3차례나 수상한 천재 중의 천재라고 할 수 있다.

1996년 최고의 럭셔리 패션 하우스인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에 임명되고, 현대 파리 오트 쿠튀르 하우스의 수장이 된 최초의 영국인 디자이너인 존 갈리아노는, 과감하고 정열적인 디자인과 실험적인 아방가르드 스타일로 디오르 왕국을 부활시키며 세계의 패션 트렌드를 주도한 패션계의 혁명가였다.

1. 런던에서 파리로, 존 갈리아노의 도전

배관공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6세 때 영국으로 이주했고, 런던 남부의 다문화 도시에서 인도, 아프리카, 아시아인 등 다양한 인종과 어울려 자라며 문화적 풍부함을 축적했다.

갈리아노는 강한 호기심의 소유자로,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 예술대학에서 패션을 공부하면서 영화, 조각, 그래픽 등 여러 분야에 도전하며 아름다움에 대한 통찰력과 창의성을 발전시켰다. 

학창 시절 그는 ‘리서치의 달인’으로 불리며, 미술관과 연극무대, 도서관 등을 찾아다니며 밤낮으로 공부했고, 국립극장에서 파트타임으로 무대의상을 담당하며 자신만의 감각을 키워갔다.

1984년, 그는 세인트 마틴의 졸업 패션쇼에서 프랑스 대혁명에서 영감을 받은 ‘믿을 수 없는(Les Incroyables)’이라는 제목의 컬렉션으로 상을 받게 되었다. 8벌의 유니섹스 룩으로 구성된 그의 작품들은 런던 최고의 부티크 '브라운'에 모두 팔렸고, 그는 언론과 업계의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갈리아노는 곧바로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했고,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런던 컬렉션에 참여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갈리아노의 런던 컬렉션 시기 특유의 아방가르드하고 실험적인 실루엣과 크로스오버 스타일의 자유로운 창작법을 시도했던 시기로 평가되는데, 상업적인 면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몇 년 지나지 않아, 패션계의 높은 기대에 대한 개인적인 부담과 압박감, 재정적인 문제들이 가중되면서 갈리아노의 브랜드는 파산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 속에서도, 1987년에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로 선정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몇 년간 부진한 상태의 활동을 이어가던 갈리아노는 좀 더 넓고,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의 활동을 계획하며 파리로의 진출을 시도한다. 파리에서 첫 쇼를 개최한 것은 1990년이었는데, 그에게는 재정적 후원자가 없는 상태였다. 후원을 약속했던 몇몇 후원자들조차 갈리아노의 화려한 쇼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흐지부지한 관계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갈리아노는 1994년,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상'을 두 번째로 수상하였는데, 당시 그는 브랜드의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1992/1993 가을/겨울 컬렉션은 발표조차 못한 상태였다. 

평단의 호평과 촉망받는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면서 그는 한계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고, 파리에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꿈도 좌절되는 듯하였다. 바로 그때, 그에게 돌파구가 되어준 사람은 미국 보그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Anna Wintour)였다.

그녀는 갈리아노의 ’1993 봄/여름 컬렉션을 보고 그를 지지하게 되었고, 그녀를 통해 후원의 물고가 트이면서 갈리아노는 재도약할 수 있었다. 1995년, 그는 LVMH의 수장 베르나르 아르노에게 스카우트되며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다. 

지방시에서 한 번의 오트 쿠튀르와 두 번의 기성복 컬렉션을 마친 후, 그는 같은 그룹 소유의 크리스티앙 디오르 하우스의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영국인인 갈리아노의 디오르 입성은 패션 중심지 파리에서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후 갈리아노는 그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디오르의 부활을 주도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와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로서 오트 쿠튀르와 기성복을 넘나들면서 해마다 12번이 넘는 컬렉션을 개최했으며, ‘패션계의 악동’이자 ‘천재’로서 언제나 스타일 혁신을 선두 했다.

2. 젊은 디오르, 관능적 낭만의 회귀

갈리아노는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된 후 패션계에 낭만의 회귀를 불러왔다.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여성을 가장 여성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여성의 엘레강스한 면을 부각했다면, 갈리아노는 좀 더 대담하게, 페티시즘의 극단적인 형태를 포함하는 여성의 관능적인 면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갈리아노는 자신만의 창의력으로 아방가르드와 파격, 상업성의 교집합을 실현시켜, 디오르의 이미지를 보다 젊게 변화시켰고 기업의 매출을 4배 규모로 끌어올렸다.

갈리아노는 1947년의 뉴 룩과 1950년대의 페미닌한 수트 등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추구해 온 여성스럽고 우아한 하이패션의 이미지를 보다 젊은 여성으로 대체하였고, 다양한 문화적 요소 및 스트리트 패션에서 얻은 영감을 더하여 로맨틱하면서도 젊고, 보다 캐주얼한 디자인을 제시함으로써 디오르가 가진 전통성의 긍정적인 현대화를 성공시켰다.

그는 과거 여성들이 가장 아름답게 표현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는 프랑스 혁명기, 벨 에포크 시대, 1930년대와 1950년대의 여성성 등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을 많이 보여주었다. 갈리아노의 전기를 집필한 콜린 맥도웰은 그를 ‘로맨틱 리얼리스트의 혁명가’라고 칭하며 그가 창조한 판타지적 로맨티시즘에 찬사를 보냈다.

갈리아노는 아방가르드와 파격, 상업적인 면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디오르 하우스의 이미지를 젊고 파격적으로 변신시켰다. (2005년 봄/여름 레디 투 웨어 컬렉션)
<sex and the city>에서 갈리아노의 드레스를 입은 사라 제시카 파커. 디오르가 엘레강스함을 통해 여성성을 부각시켰다면, 갈리아노는 여성의 관능미를 대담하게 표현했다.
갈리아노의 란제리 룩. 갈리아노는 바이어스 재단을 통해 여성의 몸에 유연하게 떨어지는 관능적이고 낭만적인 실루엣을 만들었으며, 이는 종종 슬립 드레스의 형태로 나타났다.

갈리아노가 표현하고자 했던 관능적 낭만은 디오르 하우스의 축적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현대적 트렌드를 반영하는 란제리 룩으로 종종 표출되었으며, 이를 가장 잘 승화시킨 아이템으로는 속옷을 겉옷화한 슬립 드레스를 꼽을 수 있다.

또한 그는 디자이너 마들렌 비오네를 존경하여 그의 디자인에 바이어스 재단을 많이 활용했고, 아제딘 알라이아를 좋아하여 투명하게 비치는 소재, 밝고 화려한 색과 주름 장식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관능적 낭만에 더욱 다가갔다.

특히 갈리아노는 컬렉션을 통해 비오네의 바이어스 재단을 부활시키며 이를 현대적 감각으로 소화해 낸 바이어스 컷의 대가로 평가받고 있다. 갈리아노는 바이어스 재단에 대해 “그것은 매우 빠르면서도 유연한, 여성의 몸에 대한 깊은 존경을 보여주는 관능적인 재단 방식이다. 그것은 마치 미끌미끌한 액체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과 같다……. 패션이 나아갈 유일한 길은 구성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라며 바이어스 재단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갈리아노의 바이어스 재단은 여성의 몸에 꼭 맞는 옷을 만드는 장치가 되었고, 보다 관능적이며 낭만적인 실루엣을 완성하는데 기여했다. 의복의 재단과 구성 기술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와 창조성은 환상과 과잉, 불손함 등 그의 논란들을 잠재울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다.

비평가들은 그의 옷에 대하여 현실세계와는 거의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의상'일뿐이며, 소비자나 바이어들보다는 패션 에디터들이 좋아할 만한, 매우 복잡하고 입기 어려운 의상을 만들어낸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존 갈리아노가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에 걸쳐 실험적이면서도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의상을 만들어내었던 디자이너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3. 역사주의와 이국적 취향, 다양한 스타일의 융합.

갈리아노는 어느 문화든지 모두 받아들이는 자유주의자이자 실험적 창조성을 통해 패션계의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어 온 선구자였다.

그는 동•서양 문화의 과감한 융합과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컬러의 조화, 절제보다는 과감함, 뉴 룩을 재해석한 새롭고 젊은 뉴 룩의 창조, 섬세한 무대 연출과 파격적인 메이크업, 의복 패턴의 해체와 재구성, 과장된 실루엣 등을 통해 패션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낭만적이며, 다소 충격적인 스타일로 패션의 경계를 넘나든 갈리아노는 방대한 분량의 역사적 자료를 탐구하고 다양한 문화적 요소를 믹스하여 아름답고 빛나는 의상을 창조했다.

그는 “창의성에는 국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어떠한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여행은 가장 강력한 아이디어의 원천이며, 나는 다른 문화를 보고 이해하는 것이 무척 좋다. “고 말하며 역사주의와 이국적 취향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동서양 문화의 퓨전 스타일을 보여준 크리스티앙 디오르 2001/2002 가을/겨울 컬렉션 <출처: (cc) shako at en.wikipedia.org>
다양한 시대의 역사적 자료를 연구, 그것을 현대에 적용시켰다. 마리 앙투아네트 시대의 호화로운 자수와 부풀린 드레스도 퓨전 스타일로 재탄생하였다.
갈리아노는 동서양 문화의 과감한 융합과 화려한 컬러의 조화, 과장된 실루엣과 파격적인 메이크업으로 역사주의와 이국적 취향을 드러내었다.

갈리아노는 졸업 컬렉션으로 주목을 받은 이듬해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하고 ’ 아프가니스탄은 서양의 이상을 거부한다(Afghanistan Repudiates Western Ideals).’라는 제목의 첫 컬렉션을 발표하였다. 

이 컬렉션은 동양의 소재와 스타일링을 서양의 테일러링과 결합한 것으로, 역사적인 요소와 현대적인 트렌드의 조합이라는 그의 취향을 보여준 컬렉션이었다. 이후 그의 쇼는 언제나 고정관념에 도전하며, 컬러, 텍스처, 패턴, 이미지들을 다양하게 혼합하였으며, 이는 1990년대 이후 더욱 강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그가 심취했던 동양 문화는 18세기 초 영국인에게 비친 중국 황실의 이미지와 19세기의 일본 미술과 게이샤의 에로티시즘이었으며, 이외에도 인도, 티베트, 러시아, 이집트 등 다양한 지역의 여러 문화를 혼합한 스타일을 창조했다. 그는 프린팅을 즐겨 사용했는데, 특히 19세기 크리놀린 드레스를 장식했던 프린트 문양 등 역사적인 분위기의 문양들을 애용했고, 이를 시폰, 벨벳, 타프타 등과 결합했다.

그의 쇼는 이집트 신들의 가면을 이용하여 파라오의 땅을 떠오르게 하거나, 극도로 호화로운 자수와 관능적으로 깊게 파인 데콜테(가슴, 어깨, 등을 깊게 판 넥라인)를 통해 베르사유의 궁전을, 신화적인 창조물을 통해 판타지의 세계를 연상시켰다. 

1997년 마사이족 의상에서 영감을 얻은 디오르에서의 첫 컬렉션은, 보다 세련된 에스닉 이미지를 보여준 컬렉션이었으며, 중국 인민복 이미지의 팬츠와 튜닉('99 S/S 레디 투 웨어), 아프리카 이미지의 프린지 장식 드레스(‘99/00 F/W 레디 투 웨어), 볼륨이 매우 풍성한 기모노풍의 이브닝드레스와 머메이드 실루엣의 결합(2003 S/S 오트 쿠튀르), 발레복을 연상시키는 드레스와 중국 경극 메이크업의 결합(2005/2006 F/W 오트 쿠튀르), 일본적 요소를 전반적으로 도입한 2007 S/S 오트 쿠튀르 컬렉션 등 과거와 현재를 믹스하고, 동ㆍ서양의 문화를 융합하는 퓨전 스타일을 꾸준히 발표했다.

4. 판타지의 향연, 스토리가 있는 패션쇼

“나는 모든 컬렉션마다 배역을 정하며, 역사적인 것을 바탕으로 작품을 진행한다. 그것은 창조 과정의 일부이다.”라는 갈리아노의 말처럼, 그는 연극적인 컬렉션, 즉 스토리를 풀어내는 패션쇼를 많이 보여주었다.

그는 컬렉션을 통해 단지 화려하고 사치스럽기만 한 것이 아닌 환상과 상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무대의상풍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의상은 드라마틱하게 표현되었고, 특별한 무대가 더해지면서 쇼는 판타지와 몽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벨 에포크, 마사이 공주, 천국의 새에서 영감을 얻은 갈리아노의 첫번째 디오르 컬렉션(1997)

1988년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여주인공에게서 영감을 얻은 동명의 컬렉션, 1992년의 ‘나폴레옹과 조세핀’ 컬렉션을 비롯하여, 바이어스 재단의 이브닝 가운과 파자마 수트로 대표되는 1994년 ‘루크레티아 공주(princess Lucretia)’ 컬렉션, 현대적 글래머러스를 새롭게 제안한 1995년 ‘미샤 디바(Misia Diva)’ 컬렉션, 벨 에포크와 마사이 공주, 천국의 새를 혼합한 1997년 디오르에서의 첫 번째 컬렉션과 이후의 수많은 디오르 컬렉션을 위하여 영감이 된 특정 대상을 주제로, 실제의 인물 또는 가공의 인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패션쇼에 등장시켰다.

한 명의 모델이 여러 벌의 의상을 갈아입어야 하는 일반적인 패션쇼와는 달리 갈리아노 쇼의 모델들은 한 모델이 한 벌의 옷만 입고 각자의 배역을 연기하며 관객들을 판타지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컬렉션의 무대는 그날의 판타지에 걸맞은 장소로 변형되었다. 미식축구 경기장이 전나무가 가득한 마법의 숲으로, 파리의 오페라 극장이 영국의 티 파티장으로, 오래된 기차역이 동유럽의 시장으로, 때로는 눈 덮인 지붕이 만들어졌으며, 곡마장, 마구간 등도 생겨났다. 그의 쇼는 마치 연극처럼 정교한 무대를 만들어냈고, 때문에 볼거리가 풍성한 블록버스터에 비견됐다. 

특히 그는 모든 쇼의 피날레에서 그 컬렉션의 정신을 담은 의상을 입거나 변장을 하고 런웨이에서 워킹을 하는 것으로 화제가 되었으며, 그것은 갈리아노 쇼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다. 잘생기고 이국적이며, 특유의 미소와 눈빛에서 뿜어 나오는 카리스마로, 그는 무대 위에서 갈채를 받곤 했다.


5. 패션 천재의 추락. 크리스티앙 디오르에서 퇴출

논란으로 인해 퇴출당했지만 디오르 시절의 갈리아노는 실험적이고 아방가르드하면서도 아름답고 관능적인 의상을 만들었음에는 이견이 없다.

화려함이 가미된 역사주의와 관능적인 유혹, 판타지의 세계를 넘나들며 트렌드를 주도해 온 패션계의 악동이자 천재 갈리아노가 논란에 휩싸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2011년 2월, 프랑스 파리의 한 카페에서 술에 취해 있던 갈리아노는 동석했던 커플과 시비가 붙었고, 이 과정에서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이전에 ‘히틀러를 사랑한다’고 말한 동영상이 함께 공개되며 논란이 확산되었고, 디오르는 즉각 해고절차를 진행하여, 3월 1일 자로 결국 해임되었다. 이는 10여 년 넘게 디오르를 혁신해 온 패션 천재의 추락이었다. 갈리아노는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고, 피해자들에게 벌금을 지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011년 8월에는 알코올 중독 등의 문제로 재활치료를 받았고 자숙의 시간을 가졌다. 다양한 인종이 함께 일하고 있는 패션계는 인종 차별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으며 유대인을 모욕하는 발언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게다가 다양한 문화를 접목시킨 컬렉션들을 선보여왔던 갈리아노가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다는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의 해임으로, 2011년 3월 개최된 디오르의 2011-12 F/W 기성복 컬렉션은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항상 갈리아노의 캣워크로 장식되었던 패션쇼의 피날레는, 그를 대신한 디오르 디자인팀의 디자이너들로 장식되었다.

갈리아노의 해임 후 디오르와 ‘존 갈리아노’ 컬렉션은 23년 동안 갈리아노의 오른팔로 작업을 함께했던 빌 게이튼이 잠시 맡아 진행했다. 그러나 디오르는 그를 갈리아노의 후임으로 임명하지는 않았고, 한때 마크 제이콥스가 유력한 후임자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무산되는 등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는 1년여 넘게 공석이었다. 그리고 2012년 4월,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새 수석 디자이너로 질 샌더를 이끌어온 벨기에 출신의 라프 시몬스를 임명하고, 이를 공식 발표하였다.

존 갈리아노는 4년 동안 알코올중독치료센터에 자진 입원하고 유태인 센터에서 사죄의 기도를 하는 등 속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2015년 메종 마르지엘라의 수석 디자이너로서 임명된다.

아방가르드하며 해체주의를 지향하는 마르지엘라와 존 갈리아노의 조합은 완벽했고, 마르지엘라에서의 그는, 자신의 논란을 잠재울 정도로 환상적인 컬렉션들을 출시했다. 또한 그는 컬렉션에서뿐만 아니라 이전에 자신의 언행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갈리아노는 사건 이후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으며, 동물 모피 사용을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는 등 확실히 보다 성숙해진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해왔던 언행은 완전히 용서받기는 힘들겠지만 그의 디자인은 여전히 최고 수준이며 천재임은 틀림없다. 갈리아노가 지금처럼 자신의 잘못된 부분들을 꾸준히 개선해나가며, 그만의 창의성과 천재성을 보여주는 디자인으로 또 한 번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작가의 이전글 장 폴 고티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