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가의 설립자인 크리스토발은 크리스티앙 디오르와 함께 2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 오트 쿠튀르의 황금세대를 이끈 대표적인 쿠튀리에이다.
스페인 출신으로 1937년부터 파리에서 컬렉션을 개최하였고 까다로운 최상류 층 베스트 드레서 고객들에게 우아함과 기품을 갖춘 완벽한 품질의 의상을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언론을 기피하고 기성복 라이선스 사업 또한 거절하였기에 발렌시아가의 대중적 명성은 디오르에 한발 물러서 있었지만 동료들로부터는 완벽주의자, 쿠튀리에들의 스승, 패션의 미래를 창조하는 혁신가로 불리며 존경받았다.
샤넬에 따르면 발렌시아가는 구상, 재단, 봉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상 제작 과정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쿠튀리에였고, 스키아파렐리는 자신이 패션에서 이루고자 한 바를 다 이룬 쿠튀르 계의 진정한 예술가라고 평가했다.
고객의 요구와 자신의 엄격한 기준에 따라 오직 최고의 의상을 제작하는 데에만 몰두했고, 그 순수한 작업 과정에서 새로운 재단과 형식의 창조를 통한 패션의 혁신을 이끈 발렌시아가의 세계는 기성복과 패스트 패션이 주도하는 오늘날에도 큰 향수와 경의를 불러일으킨다.
1. 발렌시아가 하우스의 탄생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는 생계를 위해 바느질을 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옷에 대한 관심과 재능을 키울 수 있었고 그의 재능을 발견한 카사 토레 후작 부인의 후원으로 12세 무렵 산 세바스찬에 위치한 테일러 고메즈 하우스에서 도제 훈련을 받기 시작하면서 패션계에 입문하였다.
왕실과 부유층의 여름 휴양 도시였던 산 세바스찬에서 발렌시아가는 스페인 상류 계층의 문화와 취향, 엄격한 영국식 테일러링을 배웠고 이는 발렌시아가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기반을 형성하게 된다.
1911년 발렌시아가는 파리 루브르 백화점의 산 세바스찬 지점에서 여성복 테일러로서 경력을 시작하였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2년 만에 여성 테일러링 워크숍의 수석이 되었고 업무 차, 파리를 여행하며 파리의 화려한 패션 산업과 오트 쿠튀르 하우스들의 뛰어난 실력을 직접 접하게 되면서 쿠튀리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발렌시아가는 1917년 세바스찬에서 쿠튀리에로서의 경력을 시작하고 동업자들의 도움을 받아 1918년 9월 '발렌시아가'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 컬렉션을 발표하였다. 이어 1919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독립 스튜디오를 열었다. 1920년 매장은 위치를 옮겨 어머니의 이름을 딴 '에이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전개되었다.
발렌시아가는 왕가와 스페인 최상류 층들의 선택을 받았고, 1931년 스페인 공화정의 출범에 따른 위기에서도, 신속히 대응하며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로 지점을 확장했다. 이후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발렌시아가는 스페인을 떠나 오트 쿠튀르의 중심지 파리로 향한다.
1937년 7월 발렌시아가는 친구 니콜라스 비즈 카 론도와 동업자 블라치오 자보로스키 다탕빌과 함께 파리 조르주 생크 거리에 발렌시아가 쿠튀르 하우스를 설립하고, 1937년 8월 첫 번째 컬렉션을 선보이며 파리에서의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발렌시아가는 스페인에서 쿠튀르 하우스를 성공적으로 운영해 온 경험이 있었고, 오래전부터 정기적으로 파리를 방문해 샤넬, 비오네 등 유명 오트 쿠튀르 하우스의 미학적, 기술적 전통을 철저히 연구하고 습득해 왔으므로 준비된 쿠튀리에로서 파리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발렌시아가 하우스는 1950년대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1968년 폐점하기까지 파리 최고의 쿠튀르 하우스로서 명성을 떨쳤다.
2. 완벽을 추구한 쿠튀리에
발렌시아가 하우스는 최고의 재료, 완벽한 재단과 봉재, 절제되고 기품 있는 우아함으로 명성을 얻었다. 발렌시아가는 훈련을 통해 이미 숙련된 테일러링이 가능했고 오랜 기간 파리 오트 쿠튀르 하우스의 견본들을 연구하며 파리 쿠튀리에들의 재단과 봉재법을 익혀왔으므로 탁월한 쿠튀르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발렌시아가는 기술적, 미적으로 완벽한 의상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발렌시아가는, 훌륭한 쿠튀리에라면 설계할 때는 건축가, 형을 만들어낼 때는 조각가, 색을 다룰 때는 화가, 전체적인 하모니를 창조할 때는 음악가가 되어야 하며, 철학자처럼 절제된 품격을 빚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르네상스적 인간형을 꿈꾸는 쿠튀리에였다.
완벽한 형을 만들어 내려는 발렌시아가의 열정은 새로운 구성과 재단의 가능성을 찾는 끊임없는 실험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수많은 소매 형태에 대한 그의 오랜 연구는 그의 노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발렌시아가는 착용자의 모든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는 동시에 미적으로 아름다운 소매를 만들어내고자 했고 평생 완벽한 소매를 구현하는 데 몰입했다.
이 과정에서 래글런 소매, 기모노 소매, 퍼프 소매, 배트 윙 소매, 벌룬 소매, 멜론 소매 등 여러 유형의 소매들에 대한 가능성이 철저하게 연구되었다. 그의 엄격한 기준에 비추어 완벽하지 않은 소매는 언제나 다시 검토되었고 때로 고객들은 옷을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러한 작업 과정은 언제나 엄숙한 침묵 속에서 경건하게 진행되었다고 전해진다.
발렌시아가 하우스는 엄격한 피팅으로도 유명했다.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발렌시아가 하우스에서의 한 번의 피팅이 다른 곳에서 하는 세 번의 피팅과 같은 정도라고 자신의 책에 기록했다.
지방시에 의하면 발렌시아가는 1960년대 후반 에어 프랑스 승무원 유니폼을 의뢰받았을 때, 3,000명이나 되는 승무원들이 일일이 피팅하기를 원했을 정도로 정말 예외적인 완벽주의자였다. 이러한 완벽주의는 그가 기술적, 미적 표현의 자유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의상들을 제작할 수 있게 한 기반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발렌시아가라는 브랜드를 대중적으로 확장시키는 데에 있어서는 방해가 되기도 했다.
발렌시아가는 미국 뉴저지의 기성복 생산 공장을 둘러본 후, 기계 생산으로는 결코 자신이 원하는 품질의 옷을 생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기성복 라이선스 사업을 포기했고 영원히 오트 쿠튀리에로 남게 된다.
3. 절제된 엘레강스의 대명사, 혁신을 추구한 패션의 건축가
1950년대 전성기를 맞이한 발렌시아가 하우스는 수트, 코트, 데이 드레스 등 현대 여성의 일상복과 호화롭고 기품 있는 이브닝드레스로 유명했다.
발렌시아가는 낭만적인 여성성을 한껏 고조시킨 디오르의 작품들에 비해 모던한 분위기를 지닌다고 평가받았고 그의 이름은 완벽함, 기품 있는 엘레강스의 대명사가 되었다.
모나 폰 비스마르크, 글로리아 기네스, 폴린 드 로스차일드, 윈저 공작 부인, 마렐라 아넬리, 마를레네 디트리히, 잉그리드 버그먼 등 세계 최고의 베스트 드레서들이 그의 고객이 되었다.
수백 개의 실크 시폰 밴드로 깃털 효과를 창조한 발렌시아가의 칵테일 드레스(1950)
발렌시아가의 세미 피티드 슈트(1952)
고객에 헌신적인 쿠튀리에로서 발렌시아가는 여성이 옷에 몸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옷이 여성을 따라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발렌시아가는 재단과 구성의 혁신을 통해 고객의 신체적 결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세련되게 부각시킬 수 있는 디자인을 연구했고, 현대 여성에 어울리는 절제된 엘레강스의 미학과 실용성을 완벽하게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다.
발렌시아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목선을 노출시킨 데콜테 네크라인과 스탠드 어웨이 칼라, 일명 브레이슬릿 소매(팔찌 소매)라고도 불린 3/4 길이의 소매는 그 대표적 예였다. 이를 통해 발렌시아가는 여성의 목과 팔을 더 길고, 가늘고, 우아하게 보이도록 만들었고 진귀한 보석들을 노출시키면서 고급스럽고 우아한 여성미에 초점을 맞추었다.
1951년 가을 컬렉션에서 발표한 세미 피티드 수트 역시 발렌시아가를 대표하는 독창적인 룩으로 평가되고 있다. 앞은 꼭 맞게 구성하고 뒤는 헐렁하게 떨어져 얼핏 불완전해 보이는 실루엣을 지닌 이 슈트에 대해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 카멜 스노는 개미허리를 지닌 뉴 룩으로부터 새로운 캐주얼 룩으로의 변화를 알리는 첫 번째 신호이며, 여성 패션에 대변혁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발렌시아가는 1955년 튜닉 드레스, 1957년 색 드레스, 1958년 베이비 돌 드레스 등 여성의 불완전한 허리선을 감추는 새로운 라인들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면서 1950년대 후반 패션의 변화를 이끌었다. 그는 완벽한 실루엣을 창조하기 위해 복잡한 재단과 구성의 기술을 실험했으나 이는 단순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지닌 의상으로 승화되었다.
완벽한 비례로 만들어진 발렌시아가의 구조적 수트는 발렌시아가 하우스를 대표하는 아이템으로서 클래식이 되었고, 프랑스의 에디터 제네비브-앙투안 다리오는 그녀의 저서 <a Guide to Elegance>에서 트렌드와는 달라 독특하지만 트렌드보다 앞서있는 수트로서 발렌시아가의 수트를 추천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발렌시아가는 보다 단순하고 순수한 조형미를 드러내는 작품 제작에 몰두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미니멀리스트의 조각에 비유될 수 있을 정도로 극도의 단순성을 드러내는 발렌시아가의 의상들이 탄생하게 된다.
발렌시아가의 작업은 엄격한 건축가나 조각가의 작업 과정과 종종 비교되었는데, 세실 비튼은 스케치로부터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형태로 발전하는 디오르의 드레스 작업 과정과 달리 발렌시아가는 마치 대리석으로 작업하는 조각가와 같은 방식으로 직물을 사용했다고 기록했다.
1967년 7월 <보그>에 게재된 데이비드 베일리가 촬영한 웨딩드레스는 단순하고 절제된 순수한 형식에서 우러나오는 우아함을 보여준 발렌시아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엘리사 디망은 오직 3개의 솔기로 구성된 발렌시아가의 두껍고 뻣뻣한 가자 실크 웨딩드레스의 미학을, 강철 덩어리를 재료로 하여 사물의 물성을 순수하게 드러낸 미니멀리스트 조각가 도날드 저드의 작업과 연결 지어 조명했다.
건축가나 조각가가 자신의 설계를 완벽히 재현해낼 수 있는 성질을 가진 재료를 선택하듯이, 발렌시아가는 코르셋 같은 하부 구조나 인체에 의존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구상한 형을 구축하고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더치스 새틴, 가자 실크 등 뻣뻣하고 무거운 직물들을 재료로 선호했다.
벨기에 국왕과의 결혼식에서 파비올라 왕비가 착용한 밍크 트리밍이 달린 발렌시아가의 웨딩드레스(1960)
4. 스페인 문화의 영향
발렌시아가의 고향 스페인은 언제나 그의 작품 세계에 중요한 문화적 영감을 제공해왔다. 발렌시아가는 파리 진출 이후에도 누이와 조카를 통해 스페인의 하우스들을 유지해나갔고 이그나시오 술로아가, 후앙 미로 등 스페인 예술가들과 깊은 친분을 나누었다.
발렌시아가는 스페인의 자연과 정서, 종교, 민속 의상, 스페인 화가들의 회화로부터 많은 창조적 영감을 얻었고, 이는 파리 쿠튀르의 전통과 구별되는 극적인 감각과 신비주의, 엄격함을 발렌시아가의 컬렉션에 투영시켰다.
1939년 가을 컬렉션에서 발표된 인판타 드레스는 스페인 문화의 영감을 보여주는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 아이보리 새틴에 벨벳 트리밍이 달린 이 드레스는 17세기 스페인 필리프 4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 회화 속에 등장한 스페인 마리아 테레사 공주의 드레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발렌시아가는 밝고 사랑스러운 여성미보다 벨라스케스, 수르바란 등이 그린 17세기 스페인 회화에 등장하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갖춘 여성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그 결과 인판타 드레스와 같은 금욕주의와 엄격함이 강조된 웅장한 실루엣과 색채의 의상들이 등장했다.
스페인 문화는 강렬한 색채와 소재, 장식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발렌시아가는 엄숙한 가톨릭 문화가 지배했던 스페인을 대표하는 컬러인 블랙과 화이트, 고야의 회화에 등장하는 대지의 컬러인 브라운과 블랙의 독특한 조합, 투우사와 플라멩코 댄서 의상의 화려하고 열정적인 원색의 컬러들을 모두 애용했다.
또한 만티야의 블랙 레이스, 투우사가 입은 볼레로 재킷의 화려한 자수와 장식들, 플라멩코 댄서 의상의 러플, 폴카 도트 패턴 등 스페인 민속 의상의 요소들을 컬렉션에 반영했다. 스페인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초상화에 등장하는 보석과 자수, 모피 장식 등은 시대를 초월한 장엄하고 호화로운 패션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해주었다.
5. 발렌시아가가 남긴 유산
1960년대 스트리트 청년 문화가 점차 트렌드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오트 쿠튀르의 권위를 뛰어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최고의 쿠튀리에로서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했던 발렌시아가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1968년 봄 컬렉션 발표를 끝으로 발렌시아가 하우스의 폐점을 선언했다.
파리,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산 세바스찬의 하우스가 모두 문을 닫았고, 주요 고객들은 그의 동료이자 친구였던 지방시에게 돌아갔다. <이브닝 스탠더드>의 기자 샘 화이트는 발렌시아가의 폐점 소식을 전하며 패션은 이제 완전히 달라지리라 전망하였다.
발렌시아가는 은퇴 후 스페인에서 여생을 보냈고 1971년 샤넬의 장례식에서 마지막으로 대중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72년 발렌시아가는 오랜 우정에 대한 보답으로 카사 토레 후작 부인의 손녀 카디츠 공작부인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했고, 이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발렌시아가는 1972년 3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Balenciaga: Masterpieces of Fashion Design](1995)의 표지
[Balenciaga (Memoirs)](2004)의 표지
[Balenciaga and His Legacy: Haute Couture from the Texas Fashion Collection](2006)의 표지
[Balenciaga](2007)의 표지
발렌시아가 사후 향수 사업을 포함한 하우스의 경영권은 조카로부터 독일 기업으로 넘겨졌고 1986년에는 자크 보가트가 인수했다. 프레타포르테 컬렉션 또한 런칭 되었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1997년 니콜라스 게스키에르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하면서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했고 구찌 그룹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이러한 발렌시아가 브랜드의 힘든 여정과는 별개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디자인 유산은 그의 사후부터 최근까지 여러 차례의 회고전을 통해 후대의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발렌시아가의 작품들은 20세기 패션의 혁신 사례로서 세계 주요 패션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으며 2011년에는 그의 고향 스페인 게타리아에 발렌시아가 뮤지엄이 개관하였다.
6. 발렌시아가의 현재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사망 이후, 발렌시아가는 이전의 명성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큰 위기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하지만 1996년, 26세의 젊은 프랑스 패션계의 샛별이었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하면서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장 폴 고티에 이후, 이렇다 할 디자이너를 배출하지 못했던 프랑스 패션계는 미국, 영국 등에 밀려났던 상황에서, 니콜라스의 등장은 프랑스 패션계의 새로운 희망이었다.
그는 26세라는 아주 젊은 나이에 발렌시아가라는, 한때 최고의 꾸튀르 하우스의 수장으로 입성하게 된다. 그는 발렌시아가 입성 후, 일명 '모터백'이라고 불렸던 가방을 출시했고 이 제품은 대중적으로 상당히 큰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는 할리우드 스타들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이는 발렌시아가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에 중요한 도움이 되었다.
2013년 니콜라스는 발렌시아가를 떠나 루이비통의 디렉터로 영입되었고, 그의 후임자로 영국인 디자이너가 들어올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지만 그 자리에는 대만계 미국인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이 임명되었다.
그는 2007년에 20대 초반의 나이로 자신의 브랜드를 설립하여 큰 성공을 거뒀을 정도로 상당한 재능을 가진 젊은 디자이너였다. 다른 디자이너들에 비해 경력이 부족했지만, 그의 능력은 이를 메우기에 충분했다.
그는 일명 '총알백'이라 불린 가방을 출시하여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H&M과의 콜라보에서 또한 큰 활약을 했다. 하지만 2015년 7월 29일, 2016 S/S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발렌시아가로부터 해고를 당한다.
그의 해고 이유는, 그가 발렌시아가 특유의 느낌을 배제하고, 재미없는 상업적인 디자인의 제품들만을 뽑아낸다는 것이었다. 제품의 80퍼센트를 중국 하청업체에서 찍어냈고 나머지 20퍼센트만 이탈리아에서 최종 작업을 하여 내보냈던 알렉산더 왕은 발렌시아가의 반발을 샀고, 상업적인 목적만을 추구하는 그의 디자인은 결국 그가 거품 낀 디자이너라는 의심을 받게 했다.
애초에 알렉산더 왕은 자유로운 느낌의 디자인을 선보였던, 스트리트 스타일에 가까운 디자이너였다. 이러한 그가 기품 있고 우아함을 강조하는 정통 오뜨 꾸뛰르 하우스와 어울리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는 분명했다.
알렉산더 왕 이후, 발렌시아가는 새로운 디렉터 영입에 있어서, 자신의 브랜드로서 이미 성공을 거둔 디자이너들에만 주목하지 않고 발렌시아가의 아이덴티티에 맞는 디자이너 색출에 노력을 했다.
2015년 11월, 발렌시아가는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스트리트 브랜드 베트멍의 설립자인 뎀나 바잘리아를 영입한다. 그는 마르지엘라와 루이비통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고, 마르지엘라의 뒤를 잇는 '해체주의'로 유명한 디자이너였다.
보통 하이엔드 브랜드에서는 가방, 지갑 등의 악세사리류가 주력 상품인데, 뎀나 바잘리아 영입 이후 의류의 대부분 제품들이 품절되는 이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2017년부터는 스피드 러너, 트리플 S, 트랙 슈즈 등 신발 제품들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고, 해당 제품들의 발매 초반에는 제품들의 리셀가가 상당히 높게 형성되며 그 인기를 증명하기도 했다.
2018 시즌부터, 착화감은 편하지만 신발이 너무 무겁다는 기존의 문제점은 개선되었지만 기존 로고의 크기를 변경하고, 공장을 모두 중국으로 돌리고, 초기 제품의 워싱을 전부 빼버리면서 고객들의 질타를 받았고, 2018 F/W 컬렉션이 너무 뎀나 바질리아 본인의 브랜드화되어갔다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아크네, 디올, 루이비통, 샤넬 등 타브랜드들이 발렌시아가를 따라서 트렌드에 편승할 정도로 해당 제품들의 인기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이후 2018 F/W 시즌에 출시되었던 트랙 슈즈 또한 괜찮은 반응을 얻으며, 여전히 발렌시아가가 트렌드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발렌시아가 트리플 S 브레드
발렌시아가 스피드 러너 검흰
발렌시아가 트랙 슈즈 그레이
한편, 뎀나는 간혹 일반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제품들을 선보이곤 했다. PVC 재질로만 제작된 셔츠, 244만 원짜리 이케아 장바구니, 200만 원짜리 종이가방 등 당황스러운 제품들을 출시했지만 해당 제품들은 오히려 신선하다는 반응을 야기하며 품절되는 제품 또한 있었다.
발렌시아가 PVC 반팔 셔츠
뎀나 바잘리아는 2020 S/S 컬렉션 쇼에서, 앞으로 프레타포르테가 아닌 오뜨 꾸튀르로 돌아간다고 밝혔다. 이후 2020 F/W 컬렉션에서 가죽과 블랙 컬러를 중점으로 한 디자인들을 선보이면서 다시 한번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해당 컬렉션의 쇼에서 말하고자 했던 주제는 급격한 기후변화에 대한 메시지였다. 'ㄷ'자 형태의 무대에 첨벙거릴 정도로 물이 채워졌고, 천장의 LED 스크린에서는 불과 천둥, 불꽃을 뿜어냈다. 쇼 초반에는 현대판 고스룩(?)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블랙 컬러와 가죽 제품들이 무대를 채우면서 암울한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쇼 중반부터는 발렌시아가 특유의 화려하고도 이색적인 아이템들이 나오면서 밝은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해당 컬렉션은 뎀나 바잘리아가 선보일, 오뜨 꾸튀르 하우스로 돌아간 발렌시아가의 예고편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트렌드세터인 뎀나가 발렌시아가 컬렉션을 통해 어떤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할지 기대를 해보면서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평가 • 지방시(Givenchy) - '그는 완벽주의자이다.' • 디오르(Dior) - '그는 모든 쿠튀리에들의 스승이다.' • 세실 비튼(Cecil Beaton) - '그는 패션의 미래를 창조하는 혁신가이다.' • 샤넬(Chanel) - '구상, 재단, 봉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상 제작 과정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쿠튀리에였다.' • 스키아파렐리(Schiaparelli) -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다 이룬, 쿠튀르 계의 진정한 예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