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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파더 Aug 09. 2021

병아리와 초콜릿 상자

부화, 병아리 그리고 닭.. 그리고 이별...

새벽 3시.... 소리가 심상치 않다. 부화기 속 달걀이 움직인다. 문득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이 떠오른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10대 때 아주 힘들게 읽어나갔던 그 책(데미안)의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으나, 그 구절이 어렴풋이 떠올라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본다.


5월 초 유튜브를 보던 둘째는 병아리 부화기를 사달라고 했다. 딸과 나는 절대 안 된다고 만류했지만, 아이들 엄마와 아들은 인터넷으로 부화기를 주문하고 유정란을 사 왔다. 부화기는 뭔가 부족해 보였다. 설마 여기서 부화할 리가 없다.  진심을 숨기고, 부화기에 떠있는 d-day 날짜 동안은 함께 응원을 해주자 생각했다.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을 파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계란, 메추리알, 오리알 다양한 알들을 부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서에 명시되어있다. 종류마다 부화일이 다르다.


전원을 연결하고 물을 조금 넣고, 조심스레 유정란 세 개를 올려놓는다. 옵션에서 오리, 메추리, 닭 중에 닭을 선택한다. d-day가 뜬다. 21일...... start!!! 몇 시간에 한 번씩 모터 소리가 들리며 부화기는 알을 돌린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신께서 생명을 빚듯 부화기는 조심스럽게 알을 만진다. 액정에 찍힌 날짜는 하루하루 줄어든다. 십여 일이 지나 처음으로 부화기와 동봉되어 배송된 특이한 손전등으로 조심스레 알을 비추어 본다. 육안으로는 전혀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다행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집이 단독 주택이라 하지만 닭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상상해 보지 못했다. 원래 번잡한 집이 더 번잡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혹시나 해서 자주 비추어 보고 싶지만 아들은 알이 스트레스받는다며 만류한다.

젖어있는 모습이 무지 애처로워 보인다.


계란이 부화기와 함께 고군분투하는 동안 집안에 여러 큰일을 치렀다. 정신없이 십여 일이 지났다. 잡생각이 많아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뺙’ 작은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일까... 애써 외면하고 싶다. 알은 깨지지 않았다. 허나 분명 소리는 부화기에 흘러나온다.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 속에서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도, 생명은 잉태되어 자라고 있었다. 알 세 개 중에 한 개 정도 성공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절망... 두렵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그 신기한 삐약 소리는 좀 더 자주 간헐 적으로 들린다. 6월 9일 여전히 밤에 잠 못 들던 나는 새벽 3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뺙 뺙’이 ‘삐약 삐약’으로 들린다. 첫 번째 알이 깨졌다. 아들을 깨운다. 그 순간은 아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삐약이 나왔다’는 말에 잠 많은 아들은 벌떡 일어난다. 부화기의 투명 플라스틱은 병아리의 입김으로 뿌옇게 변했다. 아이는 조심스레 뚜껑을 열고 계란 껍질을 걷어내고 병아리를 들어 올렸다. 라이언 킹의 무파사가 심바를 들어 올리는 장면이 오버랩된다. 생명의 탄생은 신비로웠다.


‘알’이라는 새의 세계를 깨고 새로운 세계로 나온 병아리는 그렇게 우리에게 날아왔다.

젖은 털이 마르고 하루 이틀만 지나도 금세 병아리의 귀여움을 뿜어낸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그리고 그다음 날 예상과 달리 나머지 두 알에서 모두 병아리가 나왔다. 축축해서 볼 품 없던 모습은 털이 마르고 나자마자 금세 귀여움으로 탈바꿈된다.


박스에 신문지를 깔고 조그만 접시에 물과 상추 쪼가리들을 올려놓는다. 그 작은 입으로 잘도 먹어 댄다. 병아리는 온도에 민감해 따뜻한 전구를 달아주어야 한다. 인터넷 쇼핑을 검색해 보니 생각보다 많이 비싸다. 집에 있는 양키 캔들 전등을 사용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번쩍 든다. 세 마리가 옹기종기 캔들 조명에서 잘도 잔다. 몇만 원 굳었다.


 병아리 사육을 반대했던 딸도, 나도 병아리의 귀여움에 빠져 들었다. 이제 세 마리 삐약이들은 우리 식구가 되었다. 병아리 이름으로 옥신각신 하다가, 신해철의 ‘굿바이 얄리’ 노래가 떠올라 병아리 이름을 ‘얄리’, ‘얄라’, ‘셩’으로 짓자고 제안했다. 만장일치 통과됐다. 오랜만에 아빠 체면이 선다.

병아리는 2주만 지나면... 우리가 아는 병아리의 모습은 사라진다. 귀여움이 많이 사라지면, 제법 닭의 모습으로 탈바꿈되어 ‘병 닭’이 되었다. 나름 날개도 커져서 여기저기 날아올라 박스를 넘어 다니기 시작한다. 이제 세 마리를 좁은 박스 안에서 키울 수 없게 됐다. 일단 임시 거처를 화장실로 옮기고 닭장 만들기에 돌입한다. 인터넷에 파는 닭장은 20~30만 원을 호가했다. 유튜브를 보고 닭장을 검색한다. 우리 집에 맞는 닭장 만들기는 찾기가 힘들다. 어쩔 수 없이 주변의 조언을 얻어, 고기 굽는 그물망 가장 큰 것을 사고, 개 울타리를 사고 얼기설기 엮어 닭장을 만들었다. 얼마 전 주워온 인형의 집을 개조해 닭장 안에 집어 놓고 방도 만들었다. 모이통과 물통을 페트병으로 만들까 했으나, 인터넷에 3~4천 원짜리를 구매해 좀 더 안정적인 먹이 공급을 시작했다.

고기 불판과 강아지 울타리를 조합한 핸드메이드 닭장

마당에 닭장이 생겼다. 한 달이 지나고 이젠 완전 닭이다. 새로 옮긴 거처가 어색한지 울어대기 시작한다. 혹시나 옆집에 민폐를 끼칠까 밤새 조마조마했지만, 이내 적응했는지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얄리 얄라 셩에게 문안 인사를 하러 갔는데... 왠지 닭장 분위기가 다르다. 얄라가 안 보인다. 불길하다. 동네를 배회하던 들고양이가 어쩌다 벌어진 틈을 이용해 닭을 채간 듯하다. 닭털 한 개만 보일 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날 아침 우리 집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뒤늦게 강아지 울타리를 구매해 닭장의 견고함을 높였지만, 얄라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은 우리 가족에게 큰 슬픔이었다.  


얄리와 셩은 무럭무럭 잘 커갔다. 똥을 너무 많이 싸서 집안으로 닭똥 냄새가 들어와 진동하지만 그들의 몸짓은 은근 우아하다. 닭은 사람도 알아본다. 졸졸 쫓아다니고 무릎 위에 올라 얌전히 앉아 있고, 어깨 위에 올라가 근엄하게 주위를 바라보기도 한다.

내 발 위에서 놀고 있는 얄리


우리가 보통 먹는 닭은 한 달 두 달 정도 키운 닭들이라 수명이 짧을 것이라 생각했다. 검색해 보니 닭의 수명은 7~13년... 오래 사는 넘은 15년에서 20년도 산다고 한다. 잘 키우면 내 나이 61살 환갑 모임에도 참석할 녀석들이다. 그때까지 키워볼까나....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연하는 상상도 해본다.


비가 너무 많이 왔다. 닭장에 비닐을 덮고 철물점에서 사 온 발을 씌워주고 무릎 담요를 닭 방에 올려 깔아준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닭과 함께 하는 삶.... 태어난 지 6개월 후부터는 달걀도 낳는다고 한다. 산란장을 슬슬 만들어 줄 때가 되어 간다. 아침마다 신선한 달걀을 수거하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서울에서 닭을 키우는 몇 안 되는 가정... 언제까지 키울 수 있을지... 남들이 하지 않는 특별한 집이 된 듯 한 느낌과 함께 닭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게 될 즈음....

새벽 다섯 시 반.. '꼬끼오' 소리가 들린다. 정확히 아홉 번 울었다. 그래... 이 넘들은 닭이었다. 울지 않으면 안 되는 닭이었다. 집 간격이 넓은 전원주택도 아니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서울의 단독주택가에서는 민폐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새벽마다 들리는 '꼬끼오' 소리에 며칠 잠을 깨며, 결단을 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음을 느끼고 있었다.

가족회의를 열었다. 여기서는 이웃분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키워줄 다른 사람에게 분양하는 것이 어떨까 의견을 물었다. 정작 닭들이 싸놓은 바닥 똥 청소는 나 몰라라 했던 아이들이었지만,  아쉬움에 허탈함에 이별의 슬픔을 벌써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사육 정보를 주고받았던 '닭 카페'에서 잘 키워주실 분에게 분양한다는 글을 올렸다. 며칠 뒤 파주에서 작게 농장을 하시는 분이 연락을 해오셨다. 우리 네 식구의 정성을 담아, 닭을 조심스럽게 박스에 담고, 닭 용품들을 이것저것 정리해  새 주인에게 가져다주었다. 얄리와 쎵을 넘기고 돌아오는 길.. 온 가족은 두 아이의 행복을 빌었다.


허탈 허망 허전함이 며칠을 괴롭혔다. 분리수거하는 동안 내 발에서 뛰어노는 얄리가 아른거리고, 먼저 떠난 얄라가 그립고, 항상 수줍어하던 쎵이 눈에 밟혔다.  엄마를 하늘에 보내드리고, 돌보기 시작한 아이들이라 그랬는지.. 알게 모르게 마음 한구석 얄리 얄라 셩에게 의지했었나 보다.


인생은 뜻하지 않은 기회로 새로운 과정을 거쳐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끔 보여준다. 닭과 함께 날아온 이런 과정이 우리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아이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책 속에 끼워져 있던 깃털이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물론 닭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대사.. “엄마가 늘 말씀하시길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은 거라고 하셨어요, 어떤 초콜릿을 먹을지 모르니까요. "


다음엔 어떤 초콜릿을 먹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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