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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들림 May 22. 2020

권력을 향한 비웃음,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검은 글씨에 눌러쓴 우리의 검은 사회


 책 제목, 책의 붙은 이름들은 적어도 그 책이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 간략하게라도 알려주며, 저자가 설령 그 내용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독자들에게 그 책의 첫인상을 결정짓게 한다. ‘판탈레온’ 그리고 ‘특별봉사대’, 사실 어느 쪽으로 보더라도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제목이었다. ‘뭐라는 거지,’ 이 책의 첫인상은 꽝이었다. 그런데도 이 책은 나를 ‘판탈레온이 뭐 하는 남자이길래.’라는 생각으로 첫 장을 넘기게 했다. 그리고 고작 몇 페이지를 읽는 것만으로 나에게 훌륭한 타격을 날렸다. 그래, 첫인상은 정말 꽝이었다.

  초반 몇 페이지에서는 앞으로 어떤 사건들을 이 책에서 다룰지 얘기해준다. 이 책의 주인공인 군인 ‘판탈레온’이, 아마존 지역 병사들을 위해서 ‘특별봉사대’라는 것을 창설하라는 임무를 받고 다른 지역으로 발령받게 된다. 판탈레온이 ‘특별봉사대’에 집중하는 동안, 우리는 판탈레온과 다른 사람들은 그저 스쳐 지나갔던 다른 사건 하나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어떤 한 사람이 세상의 종말을 알린다면서 십자가에 스스로 못 박힌다는 이야기였다. 책 속의 인물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서 바르가스 요사는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제일 간단한 방식을 사용했다. 마치 영화의 컷을 전환해서 다른 장면을 스쳐 지나가듯이 보여주고, 바로 다시 전환해 이야기를 진행했다. 현실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쓰일 법한 관점 처리였다. 그 장면에 대한 긴 부연 설명도 없이, 어떻게 보면 이해하지 못할 짧은 한 두 문장으로 장면과 장면 사이를 넘나든다. 한 주인공의 시점을 의존해 따라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독자들이 더 깊게 생각해볼 수 있게끔 우리를 존중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방식은 처음 바르가스 요사라는 사람을 마주해본 나에게 혼란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짧은 한 문단, 한 문단이 다 다른 주제에 대해서 떠들고 있을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감정에 휘둘리게끔 모든 사람의 생각을 알려주지 않는 대신에, 우리에게 다양한 사람들의 외침을 들려줌으로써 나를 진정한 ‘독자’로, 좀 더 떨어진 이 세계에서 차근차근히 생각해보도록 도와주었다. 또, 바르가스 요사는 사람들의 외침을 큰따옴표 안에 갇힌 문장으로만 표현하지도 않았다. 이 책은 사실상 몇몇 대화가 이야기를 시작해주는 개요 부분의 역할을 마치면, 보고서와 신문, 편지 등 다양한 형식으로써 독자에게 이야기를 풀어준다. 이 책 하나가 판탈레온이 진짜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해 그의 행적과 그가 한 일들을 모아놓은 보고서 더미 그 자체다. 나는 소설을 읽는 게 아니라, 조금 흥미로운 이야기를 조사하게 된 사람처럼 이 사건의 보고서를 읽어나갔다.

  바르가스 요사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혁신적인 문체로 독자들에게 많은 자유를 주기를 원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럼 ‘특별봉사대’라는 글의 소재 자체는 평범했는가? 그것도 아니다. 나에게는, 이 글의 소재 자체도 굉장한 파격을 가져다주었다. 주인공 대위 ‘판탈레온’은 인망이나 군에 대한 태도, 실적 등 어느 한 분야에서 빠지는 구석이 없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장교였다. 그리고 이런 그가 맡게 된 임무는, 아마존 지역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의 성욕을 해결할 수 있게끔 그들을 위한 ‘봉사대’를 조직하러 가는 것이었다. 군 상부에서 이 임무를 지시받을 때 판탈레온이 놀랐던 것처럼, 나도 놀랐다. 어떻게 보면 민감할 수도 있는 소재를 이렇게 건드려도 되는 것인가? 아마존과 이키토스, 실제 지명을 차용하면서 군과 관련된 이런 글을 쓰는 바르가스 요사의 의도는 무엇인가? 머릿속이 둥둥 떠오르는 질문들로 가득 차버릴 정도였다. 놀랍게도, 바르가스 요사는 서문에서부터 아주 당당히 밝히고 있었다. 이 소설은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라고. 이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위선 어린 군 수뇌부가 아니더라도, 이런 사실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는 것을 좋아할 윗사람들은 세상 어디에든 없을 것이다. 그는 담대하게 사회의 한 장막을 걷어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이게 바로 휜 종이 안에 검은 잉크로 인쇄되어 있을 뿐인, 작은 글씨 하나하나가 가질 수 있는 문학의 진정한 힘이라는 생각을 했다.

  바르가스 요사는 ‘판탈레온’의 이름을 빌려 군의 이름을 달고 있으면서 정작 제대로 된 정의라는 것은 가지고 있지 않은 군 상부를 깨트려 나갔다. 그가 ‘판탈레온’의 이름의 뒤에 서 있으면서도 직접 권력층의 위선을 비판한다고 느낀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의 그 무엇보다 현실적인 결말 때문일 것이다. ‘판탈레온’은 그 누구보다도 성실히 이 ‘특별봉사대’를 위하여 헌신하여 왔지만, 이 부대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발각당했다는 이유로 군 상부는 오히려 그를 강력히 비난한다. 마치 그들은 이 계획에 한 발짝도 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이 계획을 만들었고, 그 누구보다 이 계획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주었던 그들이 일반 사람들의 비난 앞에서 선량한 척, 가증한 가면을 뒤집어썼다. 바르가스 요사는 권력층의 위선을 거리낌 없이 묘사해 냈고, 그들이 가진 힘조차도 결말을 통해 분명하게 그려냈다. 끝까지 군에 맹목적으로 순종한 ‘판탈레온’은 어디로 발령이 나던지 군에 남기를 희망했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런 그가 맨 처음 페이지에서 보았었던 것만 같은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여준다. 어떻게 ‘판탈레온’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애초에 ‘특별봉사대’를 조직했던 그는 없었던 것처럼, 그는 다시 그의 아내와 함께하는 아침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바르가스 요사는 이런 암울한 결말을 당연하다는 듯이 써내었다. 세상의 한쪽 길목에서 누군가가 어떤 악행을 저질렀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 일을 스쳐 지나가게 된다. 군 상부는 ‘판탈레온’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누구도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할 때 다시 만나기,’로. 그렇다, 그의 글은 우리 사회의 한구석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끔 우리 손에 돋보기를 쥐여주었다.

  나는 이 거대한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판탈레온’이라는 사람과 함께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책을 덮은 이후에 그에 대해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여느 사람과 비슷했다. 여러모로 무난하고, 이 사회에 길든 우리처럼 조금 순종적인 사람이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호흡하고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뭉뚱그려 표현한 것처럼, 마치 이 사회의 전체를 보면 우리 개개인의 특성은 두드러지지 않고 다들 비슷비슷해 보이는 것처럼, ‘판탈레온’이라는 사람 자체는 기억에 뚜렷이 남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가끔 길거리에서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그림자 사이로 ‘판탈레온’이 기억의 끝을 향해 달려나가는 모습을 문득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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