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은 원하는 음악을 듣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에는 문구점에서 최신가요를 모아둔 카세트테이프를 팔았다. 나는 듣고싶은 노래가 한 곡이라도 있으면 그 테이프를 사서 들었다. 당시 CD 가게에서 특정 음악을 청음할 수는 있었지만 내게 CD란 어른들이나 살 수 있는 사치품에 가까웠다. 라디오에는 내가 관심도 없는 광고와 사연과 당장 듣고싶지 않은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내가 듣고 싶은 유행가는 도대체 언제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랬기에 라디오라는 매체는 나와 영 맞지 않았다.
집에서 인터넷을 연결중일 때면 집전화도 쓸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컴퓨터를 만질 줄도 몰랐고, 어쩌다 TV에서 관심있는 노래를 듣더라도 그게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으면 엄마가 문구점에서 악보를 사다주는 정도였다. 악보가 없으면 노래의 전체 가사 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음악 난민이었다.
살면서 알게된 나의 음악 감상 스타일은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질릴 때까지 반복해서 듣는 것이었다. 친한 친구들은 내게 가끔씩 CD를 선물했고, 나는 어쩌다 집에 혼자 있을 때면 오래된 전축에 CD를 넣어 좋아하는 음악을 반복재생하곤 했다.
최근 몇년전까지만 해도, 나는 음악 스트리밍을 이용하지 않았고 좋아하는 노래는 mp3파일을 사서 들었다.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어쨌든 파일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오는 만족감이 있었다. 물론 나도 스트리밍 서비스를 아주 이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거래처였던 지니뮤직에서 쿠폰을 줘서 스트리밍을 해본 적도 있고, 인지도가 없던 몽키3뮤직의 스트리밍 쿠폰을 구매해서 이용해본 적도 있다. 갤럭시 스마트폰을 사용했기에 밀크도 써봤다. 하지만 음악 감상에 대한 라이프 스타일은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휴대용 mp3플레이어의 기능을 하던 스마트폰은 이어폰 단자가 없어져 블루투스 이어폰을 사용해야하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네이버 검색보다는 유튜브로 검색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나는 광고의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유튜브 프리미엄을 이용하게 됐다. 그렇게 유튜브 뮤직도 자연스레 따라왔다.
음악 난민이었던 어린이는 원하는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랐다. 그런 내 모습이 웃기기도 하면서 사뭇 만족스럽기까지 하다. 초등학교 저학년일 무렵에 어디선가 듣고 그 어린 마음에도 좋아했던 노래가 있다. 그 노래를 부르는 그 가수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다. 아마도 그 노래는 꽤나 오랫동안 사랑받았고, 내 머릿속에서는 문득 문득 그 노래가 스치곤 했다. 그 노래는 틈틈이 리메이크 버전이 나온 듯 한데, 원곡 가수의 목소리가 그 옛날처럼 들려왔다. 20년이 지나도록 목소리에 변함이 없었다. 다시 들어도 좋았다. 맞아, 이 노래, 이 감성이었지. 왜 이제야 이 노래를 들을 생각을 했을까.
그 노래는 터보의 '회상'이다.
'회상'이 무슨 뜻인 줄도 모르면서 그 노래를 듣고, 국어사전에서 회상의 뜻을 찾아보던 그 아이가 이제는 그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