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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아 Oct 15. 2021

남자친구가 생겼다

연애가 이렇게 바쁜 거였다니.

남자친구가 생겼다. 대학 졸업 후 일에만 빠져 살던 나에게 연애란 우선순위에서 언제나 밀리는 것이었는데,

그러던 내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이렇다.

하나, 나는 내 연애세포가 다 죽은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의외로 연애세포를 잘 살려내는 사람이었다.

둘, 연애를 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는 되어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모든 각오가. 다만 적절한 상대가 없었을 뿐이다.

셋,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남자친구가 없었던 건 내가 그만한 멀티태스킹이 안되기 때문이었나 싶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물론 많이들 직장을 다니며 소개팅도 하고 연애도 하는데, 나는 그게 안됐다. 일을 하면서 새로운 만남을 가지기 위한 노력을 하기엔 내게 너무 에너지가 없었다. 내가 다니던 스타트업의 구성원들은 대체로 평균 연령이 낮은 편이었고 내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평균 연령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올라갔던 것 같다. 오랫동안 애인이 생기지 않으면 사내연애로 눈을 돌리던데 혹시 리아 님도..? 라며 미약한 의심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회사에는 딱히 관심 가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호감이 있는 상대가 있다 하더라도 스킨십에 따라 사내연애가 될지 직장 내 성추행이 될지는 한 끗 차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위험에 나를 노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직장동료와 연애를 한다.


사내연애로 결혼까지 이어지는 커플을 보며 '혹시 어른들이 말하는 첫 직장의 중요성이 이런 건가?' 하며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의 경우처럼 빠른 생일자가 학교를 일찍 들어가서 휴학 한 번 없이 스트레이트로 학부생활을 하다가 대학을 졸업해서 20대 중반이 되기도 전에 학생 신분을 잃고 사회인이 되는 경우는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보통 휴학을 한번 하든지, 취직을 아직 못한 상태라 졸업을 하지 않고 유예를 하든지, 유학이든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든지, 단기 계약직으로 인턴을 하든지, 아니면 일단 계약직부터 시작을 하든지, 취업난으로 인해 첫 취업을 시작하는 나이가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았다. 반년도 못 채우고 그만둘 회사가 아닌 제대로 된 회사를 정규직으로 찾아들어가는 나이가 대충 스물여덟 살 정도, 2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을 때쯤인 것 같다. 즉, 취업연령과 함께 늦춰진 결혼 적령기가 곧인 나이다. 그래서 첫 직장이 중요한 이유가 그곳에서 연애 상대, 나아가 결혼상대를 만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인 건가 싶었음. 뭐 같은 직장생활에 조금만 상냥하고 살갑게 대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한줄기 빛처럼 느껴져 금방 사랑에 빠진다고들 하니까.


하지만 나는 분위기에 휩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주위 사람들이 연애한다고, 또는 결혼한다고 내가 연애하거나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부모님은 이런 나에게 '남들 다하는 결혼 왜 너는 안 하려고 하느냐'는 다소 보수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지만,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남들이 한다고 나까지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남들 다 하는데 왜 나까지 해야 하느냐'였다.


나의 오랜 친구들은 내게 누군가 소개를 하기에 앞서서 자체적으로 필터링을 했다. 내가 너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소개팅..!

나는 이성이든 누구에게든 어떤 목적에서든 사실 나를 소개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다. 나를 얘기하려면 너무나도 장황한 것 같고, 그렇다고 짧고 효율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워서 아예 입을 닫고 싶었다. 생각해보지 않아도 나의 까다로움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상형을 묻는 말에도 나는 갈수록 두리뭉실한 답을 내어놓았다. 얘기하는 것이 어려웠다. 어린 날에는 막연히 잘생긴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는 잘생긴 남자는 많지 않았다. 잘생긴 남자도 많지 않은데, 잘생기고 키 큰 남자는 더욱 찾기 힘들었다. 그럼 차라리 키가 작아도 비율이 좋은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다가 만났던 잘생긴 남자는 성격도 좋고 자기 계발도 열심히 하고 모든 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이상하게 만날 수록 팬미팅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팬미팅을 가본 적은 없지만 팬미팅에 가면 이런 느낌일까? 잘생겼지만 그 이상의 호감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인관계로 인한 마음고생도 겪어보고, 나의 이상형은 뚜렷해졌다가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이를테면 이랬다. 밤하늘에 뜬 달이 예쁜 걸 아는 남자, 자연이 만들어낸 풍경이 아름다운 걸 아는 남자, 비 오는 날과 빗소리를 좋아하는 남자. 음악을 좋아하고 내 음악적 가치관을 존중해주는 남자. 어떻게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즉 취향이나 생각이 비슷하고 닮아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것인데, 그렇다는 건 간단히 말해서 나랑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성격이 모나지 않고 폭력적이지 않은 남자, 특히 여자 형제를 때리지 않는 남자. 담배를 안 피우고 도박을 안 하는 남자, 의미 없는 도돌이표식 대화를 반복하지 않는 남자, 마음과 생각이 건강하고 건전한 남자. 종교가 없는 남자. 보통은 흡연 여부를 통과하는 사람이 적었지만, 어쨌든 이런 사람을 소개받기는 높은 확률로 어려울 것이었다.


나는 소개팅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늘 기운이 없었고 주말이면 부족한 잠을 몰아자느라고 시커먼 암막커튼으로 방을 어두컴컴하게 만들어놓고 종일 누워있었다. 친구들이 굳이 내게 누군가 소개해주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그래서 이상형을 '일곱 살 어린 남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주위에 나보다 일곱 살 어린 남자의 풀 자체가 없을 것이므로 소개팅을 받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친구들은 겉으로 말은 안 했어도, 아니, 말을 한 적이 있기는 한데, '솔직히' 이런 나를 답답해했다고 한다. '소개팅하기 싫다고 하면서 누굴 만나려는 노력을 안 하는데 그렇게 해서 어떻게 남자를 만나겠냐'는게 그 이유였다. 그럼에도 친구들이 내게 영 잔소리를 하지 않았던 건, 내가 워낙에 외로움을 타지 않아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징징거린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렇게 예쁜 시절에 내가 누군가와 연애하며 보낸 추억이 없다며 주변의 연애주의자들이 나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하루 종일 에어컨 바람을 쐬다가 냉방병에 걸리던 때에는 몰랐던 여름 날씨를 퇴사 후에 온 몸으로 느꼈다. 퇴사 후 한 달 동안은 운동도 하고 잠도 많이 자고 식단 조절을 하며 건강 회복에 노력을 기울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6월의 날씨였다. 1년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이 6월이 되었을 만큼, 햇살이 눈부시고 적당히 덥고 시원한 여름 날씨였다.


7월에는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끊지 않은 채로 제주로 향했다. 여름휴가철 성수기에 접어들어 비행기표가 비싸지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아예 8월이 지나서야 돌아올 예정이었다. 이렇듯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이든 가능성이 있는 상태란 것이었다. 가능성의 씨앗을 발견한다면, 가능성을 실현할 확률이 무척 낮더라도 물을 줘보면 싹을 틔울 것인지 알 것이다. 나는 그 여행에서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먼저 서울로 올라갔기에 나도 더 이상 제주에 있을 이유가 없었고 집에 돌아가야 할 이유만이 수두룩했다. 나는 뒤로는 갈 줄도 모르는 직진녀였고, 이렇다 할 밀당이나 마음고생 없이 순조롭게 남자친구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렇게 8월, 9월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내 눈에 내 남자친구는 (당연하게도) 멋있고 완벽해 보인다. 그는 내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이상형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었다. 어쩌면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 없는 이상형보다 더 이상적인 사람인 것 같다.


어쨌든 퇴사를 하고 나면 이것저것 할 생각이었다. 그중 대부분은 브런치와 블로그 등 각종 글쓰기였는데, 연애를 하고부터는 남자친구가 내 일상의 절반이 되어버리니 데일리 기록은 대부분 남자친구와의 이야기만이 남았다. 하지만 연애의 모든 것을 오픈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적정선을 찾아야 했다. 또, 연애를 시작하고부터는 남자친구와의 연애가 모든 우선순위에서 1순위가 되어버리니 연애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급속도로 게을러지기 시작했다.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겠다고 피아노 연습은 엄청 열심히 하게 되었지만, 내 음악을 작업하러 작업실에도 안 가고, 글도 잘 안 쓰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쓰는 글을 궁금해했던 남자친구에게 필사적으로 숨겨왔던 블로그를 공개한 뒤로, 대화를 통해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써도 된다는 동의를 받았다. 내 시선으로 보이는 자기의 모습이 새롭기도 하고 내 생각을 글로 읽는 것도 재미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나는 속마음을 남자친구 몰래 터놓을 자유를 빼앗기긴 했지만, 지금도 딱히 비밀이 있는 사이는 아니니까.


시간이 금방 간다. 여름에 처음 만난 남자친구와 보낼 다른 계절이 기대된다. 추운 날씨에도 따듯하게 미소 짓는 네가 곁에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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