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의 깨달음
나는 내가 온전히 좋아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이게 좋아, 재밌어.’라고 하는 일들은 있었지만 내가 과몰입할 수 있을 만큼 재밌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것은 영화를 비롯한 콘텐츠나 디자인 등 꿈꾸던 모든 창작을 포괄해서 마찬가지였다. 영화도 집에선 거의 집중해서 보지 못해 영화관을 선호했고, 드라마는 밥 먹을 때 딱 한 편 보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ADHD와 과몰입에 대한 소견으로 그 정체가 드러났다. ‘정리’였다. 최근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일상을 살펴보면 하고 있는 일이 하나같이 체계를 만들고 순서에 맞게 정리를 하는 일이다. 집에서는 쉴 때면 도로와 지하철 노선을 계획, 구축하는 게임에 삼매경이다, 물론 누워서. 회사에서는 생산성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프로젝트와 문서, 소통의 체계를 만들며 더 나은 Work eXperience(그냥 이렇게 써보니 멋있는 말인 것 같아서 써 봄)를 구현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농담 삼아 자칭 물류시설과 과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이가 없기도 하다. 그토록 찾지 못해 고민한 나의 흥미가 정리라는 것이.
이렇게 정리를 통해 구현되는 체계와 순서는 청소, 세탁, 설거지 등을 통해 구현되는 청결과는 전혀 다른 영역의 것이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책상을 잘 정리하고 나서야 공부를 시작한다고 하는데, 딱 그것이 좋은 예시인 듯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책상 정리를 끝내면 쉬거나 잤다.) 청소를 해서 공간을 위생적으로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청소를 위해 필요한 도구가 빈틈없이 종류 별로 있어야 하는 것, 그 도구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순서에 맞게 배치하는 것에 가깝다. 고로 오늘의 집의 수납/정리 카테고리는 언제나 나의 흥미를 끌고,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깔끔한 정리를 가능하게 하는 제품은 우선 장바구니로 직진시킨다. 그래서 우리 집은 체계는 있지만 청결은 없다(^^). 청결은 나의 흥미를 끌지 못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