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여운, 월간 권태, 2020
1.
님이를 처음 만난 그해 여름의 난 어땠을까.
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냈다. 난 사내애처럼 머리를 자른 깡마른 계집애였고, 그런 이질적인 외모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 분홍색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은 채 인형이나 옷 입히기 스티커 따위를 좋아하던 동네 계집애들은 말수가 적고 겉보기에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나를 슬슬 피했다. 비비탄총과 디지몬 게임기를 들고 나다니던 사내애들 역시 날 놀이에 끼워 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난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때 까지도 변변한 친구가 하나도 없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었다.
왜 집에 가지 않았는지 묻는다면 그 시기, 내가 초등학교에 딸린 유치원을 다니다가 그 초등학교에 입학해 삼 학년이 될 때 까지, 우리 집안은 찰랑대는 불행으로 가득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불행의 주인은 엄마뿐이었지만, 갓난아기였던 남동생 준하가 자라나는 만큼 엄마의 불행도 커지고 있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엄마가 너무 똑똑해서 그래, 하고 아빠는 집 앞 벤치에서 혼자 앉아 삐삐 롱스타킹을 읽던 날 데리고 가 아이스크림을 사 주면서 말하곤 했다. 엄마가 미국에서 공부 했다는 것 아빠가 얘기했지? 그러니까 엄마 귀찮게 하지 말고 나가 놀아라, 하고. 난 겨드랑이에 책을 낀 채 계속 손으로 흘러내리는 파란 아이스크림 바를 핥으며 엄마가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면 왜 집에서 애기만 보는 거냐고 물었다. 아빠는 마치 아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냐는 질문을 받은 것처럼 허둥대더니 너랑 준하 키우려고 그러는 거지, 하고 대답했다. 난 아빠에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부지런히 아이스크림만 핥았다.
내 유별난 독서 습관은 보통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는 요소로 작용했지만, 그마저도 탐탁치 않아했던 어른도 있었다. 바로 할머니였는데, 할머니는 사실상 우리 가족에서 할아버지와 아빠, 준하만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할머니와의 악연은 사실상 내 출생 부터였다. 난 글을 남보다 일찍 읽기 시작했는데, 모두가 놀라는 와중에 할머니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딱 한 마디만 했다. 미국 박사 며느리를 봤는데, 글이라도 빨리 읽어야지, 하면서. 할머니는 늘 엄마가 일을 나가는 것을 달갑잖아 했다. 그 시기까지는 대학에 출강을 다니던 엄마는 그 말을 듣고 시무룩해졌지만 잘 했다며 내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 물론 6년 쯤 후에, 남들보다 말도 늦고 글도 늦던 준하가 글을 처음으로 읽기 시작했을 때 할머니는 부모님보다도 더 기뻐했다. 자연히 난 준하에게 큰 정이 없이 자라났다.
사실 어린 시절에 겪은 불협화음의 대부분은 엄마의 판단이 초래한 것일 지도 모른다. 내가 깡마른 더벅머리 계집애였던 것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내 머리를 사내애들처럼 깎아 주던 엄마의 탓이었다. 물론 난 짧은 머리와 바지 차림이 편했기 때문에 큰 불만은 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동네 애들은 내 차림을 놀리기 일쑤였고, 난 결국 엄마한테 가서 다른 계집애들처럼 나도 머리를 길러 묶고 치마를 입으면 안 되냐고 짜증을 냈다. 그 시기의 엄마는 괴이하게 마른 몸에 늘어진 티셔츠를 입은 채 거의 모든 시간 동안 준하를 돌보고 있었다. 그 때, 엄마는 티셔츠를 추스르고 머리를 새로 묶은 후, 치마가 예쁘게 보여서 입고 싶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치마를 안 입어서 애들이 놀리니까 그러는 건지 물었다. 난 동네 애들이 내 꼴을 놀리고 나랑 놀아주지 않아서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걔네가 놀리기 때문에 네가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할 필요는 없어.
네가 입고 싶지 않아서 치마를 안 입는 거고, 긴 머리가 불편해서 짧은 머리를 하는 건데 그걸 우습게 보는 걔네가 이상한 애들인 거야, 하면서 엄마는 준하를 안고 트림을 시키고 내려놓았다. 네 모습이 네 마음에 드는데, 그깟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중요하니, 하고 엄마는 아이를 어르며 말했다. 어차피 나중에는 네가 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 줘야 할 텐데, 벌써부터 마음에 안 드는 일을 할 필요는 없어. 엄마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에 긴 머리나 치마가 내 관심사 안에 들어오는 일은 그 뒤 한 번도 없었고, 난 자연히 또래 아이들보다는 책에 빠져들었다.
엄마가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은 어느 정도 개인적인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유복한 가정의 막내딸로 태어났고, 망나니나 다름없어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아버지의 회사에 취업한 두 오빠와는 달리 유일하게 공부에 재능이 있었다. 여학생이 대학에 가는 것이 흔한 시대는 아니었지만, 공부를 잘 하던 막내딸을 귀엽게 보던 할아버지의 지원으로 엄마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석사 학위를 땄고, 당시 지도교수의 설득으로 미국으로 박사 유학길까지 올랐다. 미국에서 고생 끝에 박사학위를 막 딴 순간, 외할머니의 병세가 악화되어 잠시 귀국한 그 순간, 그 순간부터 엄마 인생의 궤적이 바뀌어 버렸다. 젊은 교수에서 흔한 주부로.
외할머니의 병은 간암이었고 그 시대에 그 병은 고치지 못하는 병에 속했다. 외할아버지의 회사는 한강의 기적을 타고 승승장구했지만 외할머니의 병은 고치지 못했다. 엄마는 임종을 지키기 위해 귀국했지만 다시 돌아가지는 못했다. 부인을 잃고 외할아버지는 과년한 나이의 딸이 아직 미혼이라는 점을 새삼스레 깨달았고, 딸의 혼사에 갑자기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평생 공부만 해 왔고, 흔한 연애경험조차 없었던 엄마는 순진했다. 어쩌면 살면서 공부가 아닌 새로운 것, 남자를 만나고 연애를 하는 것이 색다르고 재미있어서 순간 마음을 빼앗겼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건 생각지도 못한 채로, 선 자리에서 만난 말주변 좋은 아버지 거래처 사장의 아들과 ‘정말 얼떨결에 결혼해버렸다. 그리고 다가올 추락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가파르게 성장하던 한국 경제가 정점을 찍었던 시기였던 그 때, 내가 태어났다.
1993년의 겨울, 내가 태어났을 때 까지만 해도 엄마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어쩌면 촉망받는 젊은 박사에서 아이를 어르는 엄마로 급격하게 변해 버린 본인의 인생이 아직 결딴나지는 않았다는 희망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식으로 인생은 풀리지 않았다. 엄마는 94년도에도, 95년도에도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처음에는 어린 자식이, 나중에는 생각지도 못한 금전적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97년도, 부도가 난 수많은 회사들 중에는 외할아버지의 회사도 끼어 있었고, 엄마는 초라한 노인이 되어 버린 외할아버지 앞에 어린 자식과 앉아 서럽게 울었다.
혜영아,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아기용품과 장난감, 엄마의 책과 세간살이로 너저분한 방바닥에 앉은 외할아버지는 엄마의 손을 잡고 몇 번이고 사죄했다. 흐릿한 기억 속에 하나 똑똑한 기억이 있다면, 엄마가 외할아버지의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는 것과, 본인이 얼룩덜룩 칠해 가며 열심히 공부한 책을 껴안고 악에 받쳐 울었다는 것이었다. 그 책에는 이혜영이라고 똑똑히 적혀 있었고, 그 때도 한글을 읽을 수 있었던 나는 그 이름을 입 속에서 굴렸다. 그 이후로 내가 외할아버지나 다른 외갓집 식구들을 보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엄마가 이름을 빼앗기던 과정은 아주 느리게, 하지만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갔다. 엄마는 내가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부터 강사로 대학에서 일했다. 엄마는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왔다. 낮에 난 동네 아주머니의 손에 맡겨졌고, 저녁에는 조금 귀찮아 보이는 아빠가 나를 놀아 주었다. 동네 사람들의 은근한 조롱과 비난을 받으면서도 엄마는 모교부터 지방의 이름 모를 대학까지, 끊임없이 출강을 나갔다.
엄마의 출강은 준하가 태어나고부터는 아주 끝나 버렸다. 20세기의 끝자락인 1999년에 경기는 좋지 않았고 엄마는 둘째 아이를 낳았다. 갓난아이를, 그것도 아들을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을 질색하던 할머니는 뻔질나게 집을 드나들면서 엄마를 감시했고, 출산과 과로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았던 엄마는 카운트다운 아래 뻗은 선수처럼 무기력해졌다. 그저 아이들을 챙기고, 집안일을 하고, 멍하게 할머니가 보는 텔레비전을 함께 보는, 그런 한 명의 주부가 되어갔다. 엄마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결혼생활은 꾸역꾸역 유지되었고, 난 자라서 글을 읽고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해 조용한 깡마른 더벅머리 계집애로 자랐다.
내가 내 일상에 대해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에는 새를 잡으려던 사내애들이 쏘던 비비탄 총에 맞은 사건이 크게 기여했다. 난 일곱 살 정도였고, 늘 그랬듯이 집 근처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시기 동네 사내애들은 비비탄이 잔뜩 들어 있는 모형 총을 가지고 다니면서 새를 볼 때마다 쏴대곤 했다. 난 미동도 없이 집중해서 책을 보고 있었고, 내 발 근처에는 참새들이 무언가를 쪼고 있었다. 그때 그 애들이 총을 쏘았다.
참새는 빠르게 날아가 버렸고, 총알은 참새가 아니라 내 다리와 발을 맞췄다. 난 비명을 질렀고, 제대로 맞은 두어 발 때문에 다리에는 붉은 선이 생겼다. 진짜 총알은 아니지만, 무언가에 쏘였다는 것에 놀란 나는 엉엉 울면서 집으로 갔다. 집에는 그 때까지만 해도 출강을 나갔던 엄마를 대신해 집에서 준하를 보던 할머니만 있었다. 난 엉엉 울면서 애들이 나한테 총을 쐈다고 얘기했다. 할머니는 내 다리에 난 붉은 자국을 보고 여자애 다리에 흉 지면 어떡할 거냐고 노발대발하더니 내 손을 끌고 그 애들을 잡으러 갔고, 그 우두머리쯤 되는 애의 엄마를 찾았다.
우리는 그 애의 엄마와 요상한 대면을 했다. 낮잠을 자다 나온 것 같았던 그 애의 엄마는 느린 말씨로 우리 애가 잘못하긴 했지만 실수였다고 했다. 주변에 있던 아줌마들도 그저 남자애들이 놀다가 그럴 수 있죠, 그래도 애가 많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하고 건성으로 거들었다. 할머니는 언성을 높였지만 주변의 의견은 심드렁했다. 난 다리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동네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저 집이 그 교수 며느리네 집이다, 그러니까 애를 할머니가 키우지. 애는 엄마 손에 커야 되는데, 여자애가 뭐 하나 예쁜 구석이 없잖아, 애가 얼마나 음침하면 친구가 하나도 없을까, 하는 말에 내 어깨는 움츠러들었다. 내가 그들을 바라보자 그들은 어머, 애가 듣겠어, 하며 휑하니 가 버렸다.
할머니는 역정을 냈지만 동네 아줌마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하기 그지없었고, 곧 저녁 식사시간이 되었다. 할머니는 결국 씩씩대며 못 배워먹은 여편네라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난 죄인처럼 할머니의 땀에 젖은 손을 잡고 집에 갔다. 할머니의 분노는 퇴근한 엄마에게 향했고, 그날 식탁에서는 고성이 오갔다. 그날 밤 엄마는 내가 잠들 때 까지 이불을 덮은 내 어깨를 토닥였다. 난 어깨가 따뜻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날 응시하는 엄마의 눈빛이 무서웠다. 엄마의 교수생활은 그해를 넘기지 못했다. 지긋지긋한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님이가 나에게 같이 떠나버리자고 했을 때 나는 한 순간도 고민하지 않았다. 아니, 난 오히려 님이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애가 오기만 한다면, 그 애를 백 번이라도 따라갈 것을 알았기 때문에.
2.
님이를 처음 만났던 곳은 초등학교의 한 복도의 끝에 있었던 창문가였다. 여름방학이 한창이었던 그 해의 여름에 나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책을 대출해 그 창문가에 가서 읽곤 했다. 날씨는 좋았고, 매일 아침 도서관에 출석하듯이 방문해 하루 종일 그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나를 동정하는 시선은 따가워 난 도서관보다는 창가로 발을 옮겼다. 난 그 곳에서 해가 떨어질 때 까지 책을 읽다가 저녁이 되면 미적미적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하루는 너무 긴 것에 비해 책은 너무 짧았다.
님이를 처음 만났던 날은 그런 지루한 여러 날 중의 하나였다.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 간 나는 그날도 몇 권의 책을 빌려서 그 창문가로 갔고, 후텁지근한 햇빛을 비껴 앉아 책을 읽었다. 내 몸은 땀을 흘리며 오래된 초등학교의 창가에 앉아 있었지만 내 정신은 소년탐정 칼레와 함께 스웨덴에 있었다. 한참을 책을 읽다가 고개를 올렸을 때 난 창문 너머를 지나가던 님이와 눈이 마주쳤다.
님이, 님이는 누구였을까. 그날 님이와 처음 마주쳤을 때 난 오래 전에 잃은 형제나 자매를 다시 만난 것만 같았다. 그 애는 나처럼 짧은 더벅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빼빼 마른 팔다리는 길고 그을려 있었다. 난 그 애가 사내애인지 계집애인지 외관상으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책 재밌어?
그 목소리로는 그 애의 성별을 알 수 없었지만 그 말투가 퍽 다정했기 때문에 난 막연하게 그 애가 계집애일 것이다, 하고 짐작했다.
재밌는데, 이젠 다 읽어버렸어.
내 말에 님이는 갸우뚱하더니 그럼 한번 다시 읽으면 또 재밌지 않겠냐고 물었다. 난 다시 읽은 책은 처음에 읽은 것만큼 재밌지 않다고 답했다.
왜 다시 읽으면 재미가 없는데?
그 애가 물었던 말에 난 그저 결말을 아는 이야기는 재미가 없다고 답했다. 어떻게 될지 뻔히 아는데 왜 굳이 또 그 책을 읽을까.
나도 결말이 정해져 있는 게 싫어. 다음에 또 봐, 가은아.
그 애는 그저 그렇게 말했다. 난 창문 너머로 사라지는 그 애를 보면서 잘 가, 님이야, 하고 말했다. 나는 그 애에게 내가 홍가은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애가 내 이름을 이유 없이 알았던 것처럼 나도 그 애 이름이 님이라는 걸 알았다. 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그 애가 학교 담에 조그맣게 있던 오래된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문 넘어 산으로 그 애가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다음으로 내가 그 애를 만났던 날은 할머니가 집에 왔던 날이었다. 방학이 되고 한동안 방문이 뜸해졌던 할머니는 그날 불청객처럼 집에 들이닥쳐 우리를 백화점으로 끌고 갔다. 할아버지의 칠순 잔치가 곧 있을 예정이었고 우리도 가야 한다고 했다. 준하의 유아차를 끌고 죄인처럼 할머니 뒤를 따라가던 엄마는 왜 애들이 이리 꼬질꼬질하고 인물이 없냐는 할머니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난 앙증맞은 구두와 원피스를 팔던 백화점 아동관에서 주춤주춤 할머니가 골라준 옷을 입어보았다. 할머니는 어색한 내 모습을 보면서 끌끌 혀를 찼고, 내가 생전 입어본 적도 없는 분홍색 레이스가 앙증맞은 원피스와 빨간 구두를 사 주었다. 난 불편했던 원피스와 구두 안에서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어른들이 준하의 옷을 고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은이는 엄마랑 가서 머리 좀 하고 와라, 선머슴처럼 자르지 말고.
할머니의 한 마디 말에 나와 엄마는 손을 잡고 미용실로 갔다. 난 엄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지만 엄마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 난 이 머리가 좋은데,
미용실 의자에 앉은 내가 마지못해 꺼낸 말에 엄마는, 할머니 말씀 못 들었니, 머리 좀 자르라고 하셨잖아, 하고 말했다. 그 말은 엄마가 과거 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그 목소리에 차마 거역할 수 없는 무언가가 서려 있었기 때문에 난 배신당한 사람처럼 얼어버렸다. 엄마는 미용사에게 최대한 예쁘게 잘라달라고 했고, 미용사는 곱슬머리의 여자애 사진을 엄마에게 보여주면서 파마를 권했다. 엄마는 곱슬머리에 앙증맞은 리본을 단 그 여자아이의 사진을 물끄러미 보더니 그렇게 해 달라고 말했다.
난 내 머리칼이 잘리고 말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해도 되지 않는 배신감과 모멸감을 느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내가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너무 어려서 그저 불쾌한 감정으로만 치부한 것이었다. 난 그저 화가 나 있었다.
어이고, 진작 이렇게 해 놓고 다닐 것을 그랬다, 애 인물이 훨씬 낫네.
미용실에서 돌아온 내 머리를 보고 할머니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할머니는 빨간 나비넥타이를 맨 작은 정장을 입은 준하를 안고 있었다. 준하는 불편한 듯 계속 몸을 꼬면서 칭얼댔다. 할머니는 준하를 안은 채 의기양양하게 앞장서고, 나와 엄마는 어정쩡한 간격으로 그 뒤를 쫓아 집으로 갔다.
난 집에 가자마자 다시 티셔츠와 반바지로 갈아입고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한참을 있었다. 이 모든 것에 화가 났다. 준하만 감싸고 도는 할머니도, 매일 불행에 젖어 집안을 돌아다니는 엄마도, 매일 허허실실 웃기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아빠도. 난 화가 나 씩씩대며 학교로 갔다. 어제 다 읽은 소년탐정 칼레를 반납하고 재밌어 보이는 책들을 몇 권 빌린 후, 다시 창가로 향했다.
난 삐삐 롱스타킹과 함께 바다를 건넜다. 눈앞에는 끝없는 푸른 바다가 펼쳐졌고, 난 삐삐의 원숭이와 함께 바나나를 까먹었다. 멋진 삐삐, 삐삐와 같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친구들은 다 책 속에 갇혀 있는데 나도 그 애들처럼 책 속에서 살 수는 없을까. 난 누군가 다가와 창틀에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볼 때까지.
오늘은 삐삐 읽는구나.
난 님이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님이의 뒤로 비스듬히 뜬 해가 그 애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 애의 사자 갈기처럼 제멋대로 뻗친 더벅머리 끝에 햇빛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응. 삐삐 롱스타킹.
님이는 내가 읽던 페이지를 흘끔 보더니 턱을 괴고 창문에 걸터앉았다. 나도 삐삐 좋아해, 하고 그 애가 말했다. 삐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잖아.
난 삐삐랑 같이 떠나고 싶어. 배를 타고 같이 떠날래.
난 조금은 부루퉁하게 말했다. 님이는 피식 웃더니 어디로 떠나고 싶냐고 물었다. 난 가만히 학교의 복도를 훑어보았다. 끝이 정해져 있는 책과 내가 몇 시간 뒤라면 돌아가야 할 집을 떠올린다. 이 조그만 세상이 점점 작아져 분홍 원피스와 빨간 구두가 되어 날 옥죄는 것 같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든.
난 조금은 비장하게 말했다. 말하고 나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자 님이는 작게 웃었다. 그 애는 그러고서 창문을 쑥 넘어 들어왔다. 흙투성이인 그 애의 발과 그을린 다리, 그리고 반바지가 보였다.
왜 떠나고 싶은데?
님이는 창틀에서 내려와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난 헝클어진 머리에 그을린 피부의 그 자그만 애가 피터 팬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난 말문이 터진 듯이 내 앞에 앉은 이상한 아이에게 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난 우리 집의 불행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난 이 불행이 내게는 정해진 결말이 될 것이며, 이 곱슬머리가 하나도 마음에 안 들고 계집애로 살고 싶지도 않다는 것을. 이야기가 끝날 쯤 난 흙투성이 피터 팬 앞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저 그동안 속마음을 이야기할 상대가 책 속의 친구들 밖에 없었기에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벅차올랐는지도 몰랐다.
나랑 같이 가자, 그럼.
님이는 손을 내밀었다. 흙투성이인 발과 달리 그 애의 손은 깨끗하고 뽀송했다. 난 그 손을 잡았다. 손은 따뜻했지만 그 감촉은 이상하게도 낯설었다. 난 몸을 부르르 떤다.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날 휘감고 지나간다. 이 순간 이전과 이후는 절대로 같을 수 없으리라는 경고였을까.
우리는 함께 열린 창문을 넘어간다. 난 삐삐 롱스타킹 책을 경전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품에 안는다. 우리는 학교의 담장에, 이상하게도 작게 뚫린 문을 고개를 숙인 채로 통과한다. 그러고서 키 큰 풀과 하늘로 솟구친 나무가 있는 곳으로, 어디선가 여치가 구슬프게 우는 곳으로 걸어 나갔다.
3.
우리는 빨간 머리 앤이 사는 집 같은, 초록 지붕이 앙증맞게 올라간 집 앞에서 멈춰 선다. 문은 잠겨 있지도, 열쇠구멍이 있지도 않았다. 집 안은 단출한 모습이었다. 자그마한 님이의 키에 맞추었는지 낮은 선반을 가진 주방과 알록달록한 카펫이 깔린 거실이 보인다.
넌 서재 방을 써.
님이는 집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한 방의 문을 연다. 그 방의 세 벽은 모두 책장이다. 창문과 방문을 제외한 공간은 빠짐없이 책장으로 채워져 있다. 창문 아래에는 작은 소파가 있었고, 님이는 그 소파를 젖혀서 침대가 되는 모양을 보여 줬다.
또 뭘 하고 싶니?
님이가 물었을 때 나는 머리를 자르고 싶다고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곱슬머리를 잘라 없애고 싶었다. 아니, 아예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 따위 기르고 싶지 않았다. 님이는 날 욕실로 데려간 후, 미용가위를 하나 가져온다.
얼마나 잘라 줄까?
난 네가 자를 수 있는 만큼 짧게, 라고 말하고 님이는 킥킥 웃는다. 몇 시간 전에 미용사가 공들여 말은 머리카락은 님이의 가위질에 욕실 바닥에 널부러졌다. 사각사각 소리가 난 지 몇 분 후, 님이는 작업을 끝냈고, 난 아주 짧은, 까슬까슬한 기장의 머리카락을 갖게 되었다.
마음에 들어. 네 머리도 잘라 줄까?
난 머리카락을 몇 번 쓸어본 후 님이에게도 머리를 자르기를 권했고, 님이 역시 흔쾌히 머리를 자르기로 했다. 님이의 부드러운 머리칼은 새까만 색이었다. 난 그 머리칼을 잡고 망설임 없이 잘라냈다. 사각거리는 촉감이 유쾌하게 다가왔다. 난 님이의 머리를 내 머리와 비슷한 기장으로, 아주 짧게 잘라냈다.
까까머리가 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한참을 웃었다. 우스워서 웃었다기보다는 통쾌해서 웃었다. 우리에게 머리칼 따위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난 처음으로 보는 내 머리통의 모양을 거울에 비추어 보고, 님이에게 난 이 머리가 정말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님이는 자신도 그렇다고 이야기하더니, 나한테 줄 것이 많다며 내 손을 이끌었다. 이젠 그 손이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님이의 집에서의 생활은 단순했다. 우리는 해가 뜰 때 일어나서 해가 질 때쯤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정원을 가꾸었다. 같은 거칠한 튜닉과 반바지 차림의 우리들은 손에 흙을 묻혀 가면서 열심히 일했다. 작은 정원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길러 먹었다. 가지, 당근, 파, 감자....... 그러고선 난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가 님이가 식사를 준비할 때 까지 책을 읽었다. 단출한 식사가 끝나면 난 설거지를 하고, 님이는 조각칼과 부드러운 나무토막을 잡고 이런저런 것을 깎으며 놀았다. 토끼, 망아지, 올빼미가 그 애의 손끝에서 거칠게 살아났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한참을 서재에서 책을 읽었다. 책을 읽는 게 지겨워지면 밖에 나가 사과를 따 먹거나 공놀이를 했다. 한참을 땀 흘려 놀고 우리는 시원한 나무그늘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우린 예쁜 기억을 오래된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담았고, 그 사진들은 고스란히 우리의 벽에 전시되었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저녁 식사를 만들고 치우고 거실에 앉아 음악을 들었다. 오래된 엘피판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우리는 이리저리 춤추다가, 눈을 비비며 각자의 침대로 돌아가 잠들었다. 따가운 여름의 해가 다시 떠오를 때 까지 우리는 곤한 잠을 잤다.
님이의 집에서는 계절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여름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몇 밤을 자도 계절은 조금도 바뀌지 않은 밝은 여름이었다. 물론, 비가 오는 날도 있었고, 모든 날이 아주 푹푹 찌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밝고 나무가 자라고 풀이 짙은 초록색으로 자라나는 계절이었던 것뿐이었다.
우리는 뻣뻣한 천으로 만든 헐렁한 튜닉을 입고 살았다. 처음에는 우리들의 몸에 비해 튜닉이 너무 컸기 때문에 우리 둘은 꼬마 유령들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금방 자랐고, 난 어느 새 내 팔다리가 전보다 훨씬 길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아주 짧은 머리의 난 아직도 애매한 성별의 사이에 있었지만, 님이 역시 키가 커졌을 뿐 다른 신체적 차이는 없었기 때문에 난 자연스럽게 내 성별을 잊고 지냈다. 애초에 다른 아이들이 그 공간에는 없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다.
난 님이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이곳은 어디며, 우리가 재배한 것이 아닌 음식이 어떻게 식탁에 오르는지에 대해, 그리고 님이는 대체 누구이며 내 이름을 어떻게 듣기도 전에 알았는지, 어떻게 날 알아보고 찾아왔는지에 대해. 난 어렸고, 이곳에서의 생활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기에 그 외의 것-부모님과 준하와 할머니, 학교 따위의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무도 그립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당분간은....... 그저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는 이 공간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만이 필요했었다. 그래서 난 별 질문 없이 텃밭을 일구고, 책을 읽고, 비오는 날이면 창가에 앉아 몇 시간이고 생각에 잠겼다. 난 행복했다.
불길한 징조는 늘 존재했다. 난 언젠가부터 내 몸이 가느다란 막대기에서 다른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난 더 이상 삐삐 롱스타킹을 읽는 철부지는 아니었고, 「데미안」과 「호밀밭의 파수꾼」과 「슬픔이여 안녕」을 읽는 여성으로 자라났다. 난 아이의 사고방식에 어른의 사상이 들어간 애어른이었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는 선으로 그을 수 없었지만, 애써 무시해 가던 몸의 징조들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될 때, 성장을 향한 불안은 공포로 변해 갔다.
초경이 시작된 날은 님이와 내가 보리차를 만들던 날이었다. 우리는 아침부터 보리를 볶았다. 구수한 보리 볶는 냄새가 부엌을 채웠지만 내 기분은 유달리 좋지 않았다. 난 날씨가 전보다 좀 더 덥다고 느꼈고, 샤워라도 한 번 더 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님이에게 보리를 맡긴 채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처음 보는 핏자국과 마주했다.
아주 작은 핏자국이었다.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작은 자국이 가져온 감정은 나도 모르게 그동안의 생활 이면에 감춰져 있었을 불안을 공포로 바꾸었다. 난 속옷을 구겨두고 몸을 박박 닦았다. 세게 닦아낸 붉은 자국으로 가득한 몸에 난 옷을 대충 걸치고 방에 들어가 쥐며느리처럼 몸을 말고 가만히 있었다.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참 동안 하면서. 차게 식힌 보리차를 들고 님이가 들어왔을 때 까지.
어디 아파?
님이는 보리차를 건네며 말했다. 나는, 안 아파, 하고 말하고 보리차를 건네 마셨다. 차가운 물이 속을 스쳐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날 바라보는 님이의 중성적인 얼굴이 처음으로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 얼굴은 하나도 나이 먹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얼굴은 어른 같지도 아이 같지도 않아 나이가 없는 듯 했다. 난 그 얼굴에 조금의 적의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살짝 떨어져 앉았다.
피가 났구나. 밴드를 붙여 줄까?
내가 앉았던 이불에 붉은 핏자국이 남은 것을 보고 님이가 말했다. 난 고개를 저었고, 님이는 가만히 일어나 나가서 한참을 있다가 천 조각을 들고 왔다. 면 생리대였다. 난 얼빠진 상태로 님이가 나에게 이 물건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님이가 설명을 끝내고 방을 나갈 때 까지 난 멍하게 앉아있었다. 난 그 순간 삐삐와 친구들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어린애에 불과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들은 끝나지 않을 행복할 이야기 속의 행복한 어린아이로 남을 수 있었지만 난 아니었다. 내 뼈마디들은 지금도 자라고 있고, 내 몸에서는 나온 적 없는 피가 흘러나고 있었다. 난 님이가 삐삐고, 내가 삐삐와 함께하는 아니타나 토미라고 생각했지만, 난 아니타도 토미도 아닌 홍가은이었다. 그게 내 한계였다.
그 일 이후 우리는 조금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원래도 단짝처럼 붙어 다니지는 않았지만, 나와 님이 사이에 치울 수 없는 벽이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님이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말을 줄이기만 한 채로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난 「파우스트」와 「죄와 벌」을 읽었고, 내가 평화를 깨 버릴 용기가 생기기만을 기다렸다.
난 집에 돌아가야겠어.
그날 저녁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우리 둘은 어느새 조금 낮아진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식탁의 갈치조림이 식어가고 있었다. 우리의 동산에 바다 따위는 없었기에 난 갈치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미심쩍게 느껴 요리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왜 다시 돌아가고 싶어?
님이는 갈치의 가시를 발라가며 말을 건넸다. 그 애의 손이 훨씬 커진 것이 보였다. 하지만 특별히 남자의 손이나 여자의 손 같지는 않았다.
이렇게 평생 살 수는 없잖아.
난 처음 이 곳에 왔던 때처럼 단호하게 말했지만, 그때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 때는 아이 같은 우스움으로 비장하게 말한 것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지만, 이번에는 이곳에서 몇 년을 보냈는데도 어설픈 나와 차분한 님이가 대조되어서였다. 님이는, 이곳에서 사는 것이 너다운 일이 아니냐고 물었고, 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도망가는 것이 정상적이고 행복한 삶이었다면 모두가 도망갔을 거야.
난 변명하는 아이처럼 말했다. 님이는 젓가락을 내려놓았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애의 눈에는 거짓말이 하나도 없었다.
난 도망쳐서 여기로 온 게 아니야. 여기는 내 집이고, 넌 나랑 같이 모험을 떠나온 거지. 하지만 네가 여기에 사는 것이 도망자의 삶 같다면, 이젠 집으로 돌아갈 때가 온 거야. 길을 알려 줄게, 밥은 먹고 가.
님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이야기했고, 난 저녁밥을 남겼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손을 잡고 우리가 처음 시작했던 문으로 향했다. 여치는 여전히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난 이 곳에 올 때 입고 왔던 작은 옷을 입었고, 들고 온 삐삐 롱스타킹 책을 안고 있었다. 님이는 그 작은 문이 눈에 보일 때 까지만 같이 가더니, 손을 놓았다.
이제부터는 너 혼자 가야 해. 잘 가, 가은아.
난 손을 놓고 가만히 앞으로 걸어갔다. 땀이 줄줄 쏟아졌다. 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님이가 그 곳에 가만히 서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뒤를 돌아보면 아무 것도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비지땀을 흘렸고, 어느새 내 몸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줄어들어서 옷이 더 이상 작지 않았다. 난 문을 열고 나갔고, 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와 시간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창문을 넘어 다시 학교로 들어갔다. 학교 화장실에서 손을 박박 씻고 세수를 하면서 깨달은 유일한 변화는 머리칼이었다. 늘 그랬듯이 그 머리는 부스스한 더벅머리였다.
4.
내가 돌아온 것은 집에서는 작은 소동에 불과했다. 날 찾아 온 동네를 뒤진 집안 어른들은 내가 평소의 귀가 시간보다 몇 시간이나 늦게 집에 온 것에 혼을 냈지만 내가 멀쩡했기 때문에 적당히 밥을 먹이고 재우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엄마와 할머니는 몇 시간 전에 단단히 세팅되어 있던 파마머리가 다시 더벅머리로 변해 버린 것을 의아하게 여겼지만, 그저 어린애 머리라서 미용사가 싸구려 파마 약을 쓴 것으로 추측해 넘겨버렸다. 난 곱슬머리 대신 동그랗게 자른 단발머리 차림으로 할아버지의 칠순 잔치에 갔다.
다시 열 살로 돌아온 나는 정말로 애어른이 되어 버렸다. 난 머리카락을 기르고 예쁜 옷을 입기 시작했고, 동방신기니 SS501이니 하는 보이그룹에 환장하는 여자애들 중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님이가 아닌 친구가 생긴 것은 처음이었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여자애들의 마음은 님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유치했기에 그들과 어울리는 것은 썩 어렵지 않았다. 난 그렇게 긴 머리를 예쁘게 땋고 다니는 흔한 여학생이 되었다. 고만고만한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쏘다니다 님이의 문이 있었던 장소를 지나쳤을 때, 난 문을 찾았지만 문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초경이 시작되었을 때도 난 별 감흥이 없었다. 그저 엄마가 사다 둔 일회용 생리대를 꺼내 쓰기 시작했다. 난 그날 보리를 볶아 보리차를 만들었다. 덜 식어 뜨뜻한 보리차를 마시면서 님이가 주었던 차가운 보리차를 떠올렸다. 보리가 달라서인지 내가 미숙해서인지 뜨듯한 보리차에서는 쓴 맛이 났다. 보리차를 맛보던 할머니는 보리를 너무 오래 볶았다고, 그래서 탄 맛이 나는 것이라 말했다. 난 잔을 내려두고 방으로 돌아가 쥐며느리처럼 몸을 말았다. 난 어린애의 몸에 갇혀 있는 어른이었다. 난 가만히 누워서 시간이 날 스쳐지나가 눈 뜨면 어른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난 어른으로 아주 천천히 자라났다. 키는 님이의 나라에서보다 자라지 않았지만. 키가 더 클 줄 알았는데, 하고 말하는 나에게 아빠는, 여자 키가 그만하면 큰 거지, 하고 말했다. 준하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내가 대학에 가자 엄마는 할아버지의 회사에서 사무보조를 보기 시작했다. 엄마는 몇 년 만에 다시 정장을 입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역설적으로 그 구성원들이 모두 아침마다 분주히 집을 나가게 된 순간에야 평화를 찾았다.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 저녁에만 함께했고, 어쩌면 우리가 만난 이래로 그 순간만큼 우리가 가족답게 만난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평범한 가족처럼 같이 저녁을 먹고 대중 예능 방송을 보면서 깔깔댔다. 아빠는 곧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장이 될 예정이었고, 엄마의 눈빛에는 다시 행복이라는 것이 비쳤다. 난 그 시점부터는 님이에 대한 생각은 접어버렸다. 마치 파랑새를 찾으러 먼 곳으로 쏘다니다 기진맥진해 돌아와 집에 있는 파랑새를 발견한 것처럼, 행복은 언제나 내 옆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게는 더 편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대학을 다니고, 몇 명의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 가장 오래 사귀었고 내가 군 생활까지 기다려 주었던 남자 친구는 입버릇처럼 대학만 졸업하면 결혼하자고 이야기했다. 그는 내 얼굴을 좋아했고 내가 입고 다니는 예쁜 옷차림을 좋아했다. 그는 내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자신이 돈을 많이 벌어 오는 가장이 된다면 부잣집 딸인 내 마음에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그의 말대로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미래에는 내가 정말 그 말대로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난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도망치지 않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난 이런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내가 완전히 사회에 적응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걸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사고에 대해 들었던 것은 대학 3학년의 봄이었다. 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끼고 수업을 들으러 가는 중이었고, 수업이 시작되기 불과 5분 전 엄마가 차에 치였다는 소식을 준하로부터 들었다. 아빠가 아내의 사고 소식을 성인인 딸이 아니라 고등학생인 아들에게만 전했고, 난 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병원에 모인 상황에서 고등학생 동생에게 전화를 받고 급하게 응급실로 갔다는 사실은 피투성이인 엄마 앞에서 잠시 제쳐놓아야 했다. 급히 잡은 엄마의 손은 차가웠고, 엄마는 내게 별 말도 건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나와 준하는 나란히 검은 옷을 입은 채 장례식장을 지켰다. 국화에 장식되어 있던 엄마의 사진은 회사에 재취업했을 때 정장을 입고 찍었던 사진이었다. 그 미소는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엄마가 차에 치인 것이 겨우 동료들의 커피를 사오려 나갔다가 횡단보도에서 신호위반 차량에 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더욱 그랬다. 난 조문객들이 그 사진 앞에 절하고 돌아가는 것을 주의 깊게 보았다.
조문객 중 몇은 엄마의 옛 동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모 대학 교수라는 직함이 있었고, 몇은 엄마와 함께 유학 시절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들은 내가 엄마의 모교의 영어영문학과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혜영이랑 똑 닮았다며 칭찬했다.
솔직히 우리 중에서 혜영 누나가 제일 잘 했었지, 논문도 제일 잘 썼고.
그 말을 꺼낸 것은 엄마의 후배라는 교수였다. 그는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저들이 말하는 엄마는 누군가의 커피 심부름 따위를 하다가 차에 치여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들을 밀어내고 저들의 자리에 앉거나, 저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을 사람이었다. 엄마가 그렇게 잘난 사람이었다면 왜 엄마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아무도 돕지 않았나요. 난 구역질이 날 것 같아 화장실로 빠르게 걸어갔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던 나는 난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확실하지 않은 더벅머리의 사람이 화장실 창문 너머, 저 너머에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난 창문을 넘어가 그 사람을 잡고 싶었지만 난 3층의 높이에 있었고, 계단을 내려가 길로 뛰어갔을 때 그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몇 시간 뒤, 난 아빠에게 집에 가서 씻고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핼쑥해진 아빠는 선뜻 택시비까지 챙겨 주었다. 난 집에 가서 씻는 대신 엄마의 책들을 뒤졌다. 엄마가 썼던 세 개의 학위논문과 저널투고를 했던 논문 몇 편을 찾았다. 내가 뒤적인 책들 사이에서 얇은 노트가 툭 떨어졌다. 난 그 노트에 엄마가 빼곡하게 적어둔 수식을 보았다. 그리고 그 노트의 마지막에, 끝맺지 못한 수식이 있었던 쪽에 엄마가 책갈피처럼, 내가 즐겨먹던 사탕의 포장지를 끼워 둔 것을 보았다. 내가 그 페이지를 펼치자 포장지는 나풀나풀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포장지가 떨어지자 난 그제야 슬픔의 이유를 깨달았고, 마음껏 엉엉 울 수 있었다.
난 결국 그 학기 휴학을 했고, 사귀던 남자 친구와도 헤어졌다. 난 집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다. 그날 본 검은 옷차림의 사람이 계속 떠올라서 책의 내용으로 머리를 어지럽혀야 했다. 몇 달이 지난 그 해 여름에 난 긴 머리를 어렸을 때처럼 잘라냈다. 머리를 이렇게 짧게 자르시다니, 무슨 일 있으세요, 하고 장난스럽고 무례하게 묻던 미용사에게 난 이 머리가 좋아서요, 하고 답했다. 그날 집에 가자 준하와 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랑 똑같다며, 말을 걸었다. 여자는 예쁜 게 제일이다, 머리를 그렇게 다시 깎아놓으면 어쩌니, 하는 할머니의 말에 준하는 할머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하고 대꾸했다. 할머니는 입을 좀 오물거리더니 아무 말도 더하지 않았다.
할머니, 저 어렸을 때 잠깐 없어졌던 것 기억나세요?
난 할머니가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었다. 할머니는 몇 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빠가 회사를 이어받은 이후로 급격히 건강이 나빠졌다. 할머니는 쪼글쪼글한 입을 열고 그때, 네가 들어와야 하는데, 안 들어와서 네 엄마가 많이 걱정했었지, 그러지 말아, 하고 말했다.
소문난 여장부였던 할머니는 본인의 목표-회사를 키우고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가 달성되자 급격히 그 힘을 잃었다. 물론 할머니는 자신의 목표에 최선을 다했다. 몇 년 전 지병으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회사의 지분을 최대한 우리 집으로 끌어오고, 달라붙는 친척들을 떼어낸 것도 할머니가 아니었는가. 하지만 재산을 둔 싸움이 끝나고, 한 가족이 된 이래로 내내 괴롭혀 왔던 엄마가 돌아가시자 집안에서의 할머니의 위치는 미묘해졌다. 본인의 모든 것을 남편에게 바치고, 미국박사 며느리에 아들이 혹여나 기가 죽을 까 봐 아들의 편을 들어 며느리를 끊임없이 구박했던 할머니는 결국 허망하게 모두가 외면하는 노인이 되었다. 이제 할머니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주는 준하뿐이었다. 난 할머니를 증오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누나 그러고서 머리 길렀잖아.
소파에 앉아서 이런저런 TV 채널을 돌리던 준하가 말했다. 장례식장의 사람들은 나에게 엄마를 닮았다고 이야기했지만 준하야말로 엄마 판박이었다. 난 그랬지, 하고 이야기했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머리가 제일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 그래서 오늘 머리를 잘랐어. 하고 난 다리를 쭉 펴고 바닥에 앉았다. 바닥에 앉아 몇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장례식 날 봤던 사람을 떠올린다. 님이었다면 내가 바로 알아차렸겠지, 생각하던 난 홀린 듯 일어나 잠시 산책을 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난 그 날처럼 오래된 삐삐 롱스타킹 책을 소중히 안고 초등학교로 향했다.
초등학교는 잠겨 있었기 때문에 난 학교를 돌아서 창문가로 가야 했다. 난 그때와는 달리 낡아 버린 낮은 창문에 걸터앉아 건너편을 보았다. 님이의 문은 없었다. 난 꿈이 깬 몽유병 환자처럼 허무하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여치가 울어대고 있었다. 난 고개를 푹 숙이고 그 창문 아래에 쪼그려 앉았다.
여치의 울음소리에 난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헐렁한 반바지 차림의 사람이 학교의 담장 너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난 그새 낮아져 버린 담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님이야, 하고 부르니 그 사람은 씩 웃었다. 님이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난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는다. 전보다 커진 손이지만 남자의 손도 여자의 손도 아닌 그저 님이의 손이었다. 손은 따뜻했고 그 감촉은 낯설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
난 어색하게 그 애에게 말을 건넨다. 처음으로 그 애를 만났던 열 살의 여름처럼, 외로웠던 열 살 배기의 목소리로.
오랜만이야, 다시 떠나고 싶어, 가은아?
님이는 그때와 똑같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난 열 살배기의 목소리로, 가장 나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다운 곳으로 가고 싶어.
나랑 같이 가자, 그럼.
님이의 말에 난 활짝 웃으며 그 애의 방향으로 담장을 넘었다. 여치는 더 이상 울지 않았고, 우리는 다시 모험을 떠났다.
전여운 | <님이의 창문 밖에서>에는 세상에 몸을 맞추어 살아가는 것과 나답게 살아가는 것 사이의 고민을 담았습니다. 전 마땅한 정답을 찾지 못했지만 가은이는 찾은 것 같네요. 정답이 없는 문제인 만큼 정답보다는 문제 자체에 더 집중해 보고 싶었습니다. 정답이 가리키는 방향보다는 정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이 더 중요하니까요. 쓰면서 저에게 많은 즐거움을 준 소설인 만큼, 소설이 여러분에게도 재미있게 읽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