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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 권태 Jul 17. 2020

그 날의 지문은

전여운, 월간 권태, 2020

Salvador Dali, Figure at the Window, 1925.



그 날의 지문은 



  핸드폰의 지문 인식 기능이 잘 통하지 않는다. 요리조리 손가락을 돌리면서 양쪽 엄지의 지문을 각 두 번씩이나 등록해 두었지만 여전히 먹히지 않는다. 결국 지문 인식을 통한 잠금 해제는 30초 뒤에 다시 가능하다는 암울한 메시지가 뜨고, 어쩔 수 없이 패턴을 입력해 화면을 켠다.  


  사람의 지문은 그 자체로 아주 완벽한 인증 시스템이다. 지문은 사람마다 고유하고 ‘이론적으로는’ 절대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한번 그 지문을 손에 넣는다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속속들이 찾아낼 수 있다. 주민등록증을 처음 만들던 그해 겨울에 난 수험생의 음울함이 덜 가신 밋밋한 낯으로 동사무소에 가서 지문을 눌러 찍었다. 그날 보았던, 인주를 묻혀 찍은 지문은 마치 짓눌린 포도 같았다. 그 짓눌린 포도는 앞으로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는 가장 쉬운 수단이 될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각자 다른 지문을 가지는데 이 지문이 변하지 않는다니, 이보다 효율적인 인증 시스템이 있을까?  


  하지만 지문도 변한다. 내가 독한 약품을 다루는 일을 했다면 독한 약에 지문이 닳아버렸을 지도 모르고, 손가락 끝을 데이거나 베이거나 하면 지문에 흉터가 질 지도 모른다. 난 몇 년 전 알바를 하다가 왼손 엄지손가락을 조금 베었고, 그 베인 자국은 흉터가 되어 지문을 가로지르는 한 줄을 남겼다. 이제 내 왼손의 지문은 전과 같지 않다. 이유는 모르지만 난 종종 손 안쪽 면에 허옇게 피부가 일어나 벗겨지곤 한다. 아마 지문 인식 기능이 불통인 이유도 한 차례 벗겨진 손가락 피부 때문일 것이다. 삶의 흔적이 지문에 추가한 모양 때문에,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와 같지 않듯 지문도 달라진 것이다.


  달라진 지문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람에 있어서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고유한 모양의 지문처럼 사람들이 오직 자신, 이라고 여길 수 있는 지표가. 객관적으로 그런 것은 없을 것이다. 사람은 매일 변하고 하다못해 몇 달 전에 등록해 둔 지문도 변해 버려서 휴대폰 잠금 해제가 안 되는 마당에,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난 몇 년 사이에 내 밋밋한 수험생의 낯이 많이 달라진 것을 매일 확인한다. 그럼 어떤 것이 나인가, 에 대한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베이고 닳으면서 모습이 조금씩 바뀌는 지문처럼, 살아가는 날들이 많아질수록 점점 난 내 본질에서 멀어져 가는 것일까.  


  그런 질문에 혼란할 때 마다 떠오르는 것은 지문이다. 한결같은 모양의 지문은 내 몸의 부분들 중에 가장 내 본질이 진하게 새겨진 자리겠지. 그 변하지 않는 고요한 흔적을 들여다보다 보면 이게 오늘도, 어제도, 10년 전에도 같은 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인생이 지문에 생채기를 내고 닳게 만든다고 해도 그 지문의 본래 모양을 없앨 수는 없다. 다만 그 안에 삶이 만들어 낸 내 모습을 이리저리 채워 넣는 것뿐이지. 그래서 가장 처음의 지문과 지금의 지문은 다르지만 서로 닮아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다르게 생겼지만 서로 닮아있듯이. 사실 본질은 그런 별 것이 아닌 존재였는지 모른다. 어떤 두 시점의 나를 비교해도 썩 닮아 있는, 달라지지 않는 그 모양.  


  가끔은 그 겨울의 지문이 그리워질 것 같다. 방향 모를 어딘가로 흘러가던 인생의 한 조각이었던 그 날의 증표이자, 밋밋한 낯의 어린 내가 회색빛 사무실의 붉은 인주를 손가락에 찍던, 그 날의 지문. 그 이후 나 그리고 지문이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몰랐지만,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던 미숙한 내가 그리워서. 그리고 그 앳된 모습과 지금의 모습에도 같은 모양이 있었으면 해서.




전여운 | 공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경제학도입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깨달음들을 기록하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떠오른 이야기들을 씁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생각들과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쓰는데, 그 글이 독자들에게도 재미있게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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