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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Jun 23. 2023

 동생과 나

너는 침몰할 뻔한 배를 구한 선장이었다.

 퇴근 중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언니, 저녁 먹자!"

"응? 갑자기? 무슨 일 있니?"

"그냥, 날씨가 너무 좋다!"

"그래, 날씨 정말 예쁘다. 너 기분이 좋구나?"

오십 줄에 든 워킹맘 둘, 육아도 진즉에 마쳤고 남편들도 훈련이 거의 완성되어 그들을 위해 밥 차리는 일이 더 이상 의무가 아닌 우리 둘은  내가 사는 동네에 새로 생긴 '酒민센타'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붙인 작은 주점에 자리를 잡고 마주 앉았다. 솜씨가 좋은 오너 셰프가 푸짐하고 맛있는 안주를 내놓는 곳이다. 배도 고팠던 우리는 갑오징어무침과 명란계란말이, 그리고 차돌박이숙주볶음을 시키고 맑은 술도 한 병 청했다.

"오늘도 애썼지?"

"언니도 고생했어~~"

따뜻한 위로의 말이 술보다 달다.


 나보다 두 살 아래지만 먼저 결혼한 동생은 경상도 남자를 따라 대구로 가서 25년 동안 시부모님과 슬하에 삼 남매를 기르며 살았다. 살아온 시간들은 너도 나도 쉽지 않았지만 나보다는 분량이 더 많은 스토리를 가진 동생은 5년 전 가족 모두를 이끌고 친정인 강화도로 이주해 와 친정어머니를 모시는 중이다. 친정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단 일 년을 자칭 '해방된 민족의 자유'를 누렸을 뿐, 교통사고로 거동불편자가 되어 전동 휠체어를 타는 신세가 되어 혼자 살아가기엔 여러모로 걱정이 많은 상황이었다. 동생은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이 없다는 사실이 후회되고 서러웠고, 친정어머니에게만은 같은 후회를 하고 싶지 않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25년 동안 우리에게 봉사했으니 이제부터는  엄마에게도 그와 같이 해 드려라'라고 흔쾌히 허락하셨던 그녀의 시어머니는 암 진단을 받고 장남과 맏며느리 곁인 강화로 이주해 오셔서 작년에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나는 아직도 시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 생각하면 어머니도 불쌍하고 나도 불쌍하고. '야야, 에미야, 기도해라. 나를 얼른 데려가시라고 기도 좀 해라. 너무 아프고 힘들다'하시던 생각. 내가 울면서 내과 과장님께 진통제 좀 더 주시면 안 되냐고 했던 생각. 한데 아들 된 자는 자기 엄마가 그토록 고통스럽게 가신 줄도 모르더라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녀. 술잔을 드는 나.

"한 삼 년은 지나야 나아지더라. 삼 년 지나니까 눈물이 덜 나. 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어. 내가 지금 딱 보니까 네 머리에 네 시부모님이 씌워주신 화관과 네 자식 삼 남매가 씌워준 화관이 막 얹혀 있다."

울다가 웃는 동생.

"나는 언니가 몇 년 전에 나한테 해 준 말 때문에 버텼다....."

"응? 어떤 말? 하도 말이 많은 사람이라...."

더 크게 웃는 동생의 얼굴에 근심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고 느긋한 일인지.

"언니가 처음 나 이사 와서 몇 달이나 기다렸다가 입사한 개원한 병원 물리치료실에 간식 만들어 가지고 왔었잖아. 그때 언니가 나한테 그랬잖아......"


  물리치료사인 동생은 당시 강화에 새로 개원한 종합병원의 경력직 팀장으로 입사했다. 개원을 며칠 앞두고 준비 중인 동생을 응원하는 차원에서 동생과 그의 팀원들을 위해 간식을 만들어 찾아갔었다. 기억엔 아란치니였던 듯하다. 팀원들이 모두 맛있다고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가운데 동생은 내게, '자랑스럽고도 가슴 뭉클하고 눈물이 왈칵 났다'라고 했다. 지난 세월 25년 동안 타향에서 살면서 뭐든 혼자였던 시간들이 그렇게도 외로웠다고.


"동생아, 이제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얼마든지 너를 위해서 언니가 힘 보탤게. 함께 하는 삶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것인지 느끼게 해 줄게. 나는 부모가 아니어서 다 내어 주진 못하겠지만 네가 한 개를 내어 놓으면 나는 두 개를 내어 놓을 마음의 준비가 되었단다. 사랑한다."라고 내가 말했다고 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런 내용으로 대화방에다 답장을 적었던 기억은 난다. 소주 한 모금에 차돌박이로 숙주를 잔뜩 감아 젓가락으로 입에 가져간다. 달큼한 숙주의 즙과 고소한 차돌의 왈츠가 입 안에서 터진다.

 

 "그때 내가 근무했던 진료소 화단에 내가 좋아하는 노랑 장미 나무가 있었어. 거기로 발령받아 가자마자 화단을 정리하면서 꽤나 오래된 장미 가지들을 바짝 잘라내니 새순이 올라와 탐스럽고 색이 고운 노랑 장미가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내게 기쁨을 주었는데,  갑자기 메꽃(둥근 잎유홍초)이 동시다발로 훅 자라났다. 뭐든 타고 올라가는 이 메꽃 녀석의 습성이 내 사랑 노랑장미를 덮어 버릴 기세로 얽히고설키니 매일 뜯어내도 다음날이면 또 그만큼 자라 있더라고. 결국 내가 항복을 하고 자연의 순리를 그저 지켜보자니 장미는 기어이 메꽃넝쿨이 가자는 대로 이리저리 널브러졌더라."

"메꽃이 나팔꽃 같은 그런 꽃 피는 거 맞지?"

"그래."

"와, 그거 나도 알지. 엄청 빨리 넝쿨을 뻗더라고"

"나는 그걸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전혀 다른 종류의 두 식물인 장미나무와 메꽃 넝쿨이, 마치도 언니와 동생처럼 착 감아서 한 몸 같이 엉켜있더라. 꼭 너하고 나 같다고 생각했어. 나는 강화를 벗어나지 않고 내내 여기서 살면서 이 지역에서 굳게 뿌리내려 든든히 서 있으니, 너는 이 메꽃처럼 강한 생명력을 발휘하면서 나를 감고 씩씩하게 청청하게 네가 원하는 대로 뻗어나갔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

동생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젓가락으로 연신 내 앞에 고기를 쌓는다. 나는 또 그걸 집어 동생 앞에 쌓는다.

"너무 좋다. 이런 날은 사실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야."

"나도 네가 멀리 살 땐 눈앞에 안 보이니 그 긴 세월 동안 답답하기만 했는데 가까이 살게 되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 엄마만 해도 그래, 항상 혼자 노심초사하고 뭘 살펴드리기도 버거웠다가 네가 이사를 와서 함께 사니 잠이 다 편하게 오더라."

"나야 뭐.... 엄마 하고픈 대로 해드리는 것뿐이지만 언니가 있어서 든든하다."

명란에 감싸인 부들부들한 노란 계란말이를 앞접시로 옮겨 안주를 준비하고 잔을 부딪치는 우리.


 문이 열리고 내 친구가 일행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오랜만이기도 하여 반갑게 인사를 했고 '내 동생이야'라고 인사를 시켰다. '못 보던 동생이네?'라는 말에 '대구로 시집갔다가 이사 왔어.'라고 설명해 주었다. '동생하고 이런 시간도 갖고 부럽다'라는 친구는 일행들과 내 옆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자마자, '너네 먹는 거 계산하지 마, 내가 계산할 거야'라고 한다. 동생의 눈에 금세 선망이 그득하다.


 "언니야, 나는 언니가 너무 부럽다. 나는 대구에서 청춘 시절 25년을 보냈는데 친하다고 할 만한 사람이 교회 집사 두어 명 정도야.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이 난 그 긴 시간을 뭐 하고 살았나 싶어... 강화에 오니 가는 데마다 언니를 다 알고... 나도 그 덕을 보고. 언니가 덕이 크다."

"여기서 오래 살다 보니 그렇지 뭐"

"난 대구에서 짧게 살았나 뭐.... 난 성격이 문제인 걸까? 아님 내가 너무 없이 살다 보니 여유가 없었을까?"

동생이 젓가락으로 갑오징어 하나에 무침 야채를 얹어 내 앞접시에 놓아준다. 나는 따뜻한 시선으로 동생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동생아. 25년. 긴 세월이지. 첫 애가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취업해서 간 세월이니. 아이 셋, 시아버님, 시어머님,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 남편. 그 모든 무게가 네 두 어깨에 얹혀 있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아버님과 네 남편이 하던 사업은 잘 되지 않아 집에 돈을 들여오지 못했던 그 긴 시간 동안 너 혼자 먹고 살 생활비와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교육비를 감당해야 했지. 좌절도 하고 분노도 했지만 그 절망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혼신까지 보태어 그 깊은 구렁에서 온 가족을 네 어깨와 머리에 이고 지어 세상 밖으로 밀어 올렸지. 그때 너는 선장이었다. 침몰할 수도 있는 위태로운 배의 선장이었다. 가장 먼저 도망치는 수많은 비겁한 선장들도 많은데 너는 드물게 배를 끝까지 지켜냈지. 너는 너희 가정이라는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제일 먼저 무게가 나가는 짐부터 바다로 던져야 했지. 체면, 품위, 사교적 인간관계와 자아성취 같은 가치들은 우선순위에서 가장 먼저 바다로 던져야 했겠지. 안 그러면 그걸 지키느라 배가 침몰하는 것도 모르고 우왕좌왕했을 테니까. 그 덕분에 기어이 너는 배를 지켰잖아. 네 배는 가라앉지도 파괴되지도 않고 굳건하게 다른 큰 바다로 힘차게 다시 출항했어. 이제 순항을 시작했고 네 배는 예전보다 훨씬 크고 견고하게 다시 정비되었잖아. 이제 어떤 풍랑에도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굳건하게 인생의 여정을 가게 될 것이고 배에서는 매일 기쁘고 감동적인 파티가 열릴 것이야. 동생아, 나는 네가 참 자랑스럽다.


 나는 마지막 잔을 들어 올렸다. 동생이 다시 계란말이 하나를 내 앞접시에 얹어 주며 묻는다.

"근데 내가 선장이면 남편은 뭐야?"

"선주지, 선주. 선주는 배 걱정을 안 해. 배가 내는 수익을 걱정하지, 선주는 배에는 안 탄다."

우리는 동시에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옆 자리의 친구와 그 일행이 궁금한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았지만 너무 긴 이야기여서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냥 '기분이 좋아'라고 말했다. '취했구먼?' 하는 친구에게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억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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