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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Oct 13. 2023

트라우마의 반대말

함께 성장 진행 중인 가족

 매년 폭염을 피해 느지막이 9월쯤 떠나는 여름휴가는 일 년에 단 한 번 가족이 온전히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올해는 순천 국가정원과 여수 밤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용산역 인근이지만 거리가 멀어서 주차료가 비교적 저렴한 공영 주차장에 주차를 했고 오르막과 건널목, 내리막과 구름다리를 거쳐 용산역에 들어섰고 설레며 기다린 끝에 순천행 KTX를 타고 전라도 순천에 입성했다. 부쩍 짧아진 해는 이미 넘어갔지만 일부러 고프게 만든 배를 안고 60년 노포로 최근 유명해진 '대원 식당'을 찾았다. 집에서 늘 먹는 한식을 일부러 돈 내고 먹는다는 것에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일하는 직원들 평균 연령이 65세이니 곧 맛이 변하거나 아예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나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미슐랭 별 하나" 식당처럼 그곳에 간 김에 들르길 잘했다. 역시 블루리본도 10개나 딴 이유가 있었다. 단번에 나의 입맛을 사로잡은 3년 된 굴 젓갈의 맛은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난다. 식사를 마치고 예약한 숙소가 있는 낙안읍성으로 향했다. 이미 날은 저물어 깜깜한 마을에 도착하니 낯선 곳인 데가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는 골목 앞까지 사장님께서 플래시를 들고 나와 맞아 주시니 마치 외갓집에 온 것 같이 안심이 되었다. 진짜 초가 민박에 들어가 고단한 하루를 느긋하게 마무리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니 한 방에서 넷이 함께 잠든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작년엔 두 딸이 십 대였을 때 이후 십 년 만에 제주로 가족여행을 떠났었는데 단 한 번도 낯을 붉히지 않고 즐겁게 여행했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도 기대가 높았다. 제주 숙소에서 블루 계열로 시밀러 룩을 입고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딸들이 유치원 시절 사진관에 가서 찍은 가족사진 이후 최근 사진은 없었으므로 찍는 내내 유쾌했었고 그렇게 나온 사진이 제법 멋졌다. 올해도 시밀러룩으로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그린으로 색을 정했는데 각자 바쁜 탓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옷을 정할지는 의논도 하지 못하고 일단 각자 알아서 챙겨 오기를 했다. 남편이야 내가 챙겨 입히면 되는 일단 남편과 내가 입을 옷만 고민 끝에 정했는데 막상 순천에서의 둘째 날 차려입은 옷들이 멋지게 잘 들어맞았다. 

순천만 국가정원 갯벌 야외무대에서

 사실 이 이야기는 여행 이야기는 아니다. 여행으로 비롯된 이야기이다. 사흘 간의 느긋하고 여유롭고 기분 좋은 휴가를 즐기고 마지막 날 우리는 여수 엑스포 역에서 다시 서울 용산역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탔다. 비행기나 기차를 몇 시간 정도 타야 하게 되면 나는 뜨개질거리를 가져가 시간을 보낸다.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내기에 그만한 것이 없다. 용산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남편은 휴대폰으로 야구를 보고 나는 뜨개질을 하고 두 딸은 찍은 사진들을 함께 보며 우리는 '익산역'을 막 지났다. 밖엔 비가 오고 있었고 서울에 도착하면 함께 저녁을 먹으며 뒤풀이를 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 일이 일어났다. 

"호텔 옷장 안에 가족사진 찍을 때 입었던 옷을 걸어 놓고 왔다!"

남편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착불택배로 보내 달라고 부탁하면 되니까...." 

"그 바지 주머니에 우리 차 열쇠가 들어 있어!"

눈앞이 캄캄했다. 용산에 세워놓은 차를 몰고 강화도로 가야 하는 상황인데 차 열쇠가 없다니. 일단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열차 사이 칸막이로 나가 호텔에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안내 멘트만 반복되는 호텔 프런트 직원들을 마음속으로 애타게 부르며 나는 열차와 열차 사이를 서성거렸다. 큰 딸이 내게 왔다. 1안, 2안, 3안..... 전화 통화를 위해 밖에 나온 나를 뺀 아빠와 두 딸들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 방법을 의논한 모앙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도 썩 내키지 않았다. 다행히 다섯 번째 시도에서 호텔 담당자와 통화가 되어 옷장을 확인해 보고 전화해 주기로 했다. 


 자리로 돌아와 기차 창을 흐르며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나의 맘이 급격히 우울해졌다. 하루 종일 입고 땀에 절은 옷을 옷장에 걸어 놓은 이유가 궁금하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울지 마,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거니까 울지 마"

남편의 말. 울지 말라는 남편의 말에 놀라 동시에 건너편 좌석에서 몸을 내밀고 내게 따뜻하고 다정하게,

"엄마, 이미 일어난 일이에요. 다 지나갈 일이에요. 울지도 말고 화도 내지 마세요."

딸의 말. 나는 울지도 화내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울거나 화내지 않으려니 뭐든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했다. 

 

 생각해 보니 오늘 남편이 자동차 열쇠를 여수에 두고 온 정도는 큰일도 아니었다. 나는 더 큰 일도 많이 저질렀다. 곰탕을 작은 불에 올려놓고 성당에 가서 미사를 참례하던 중 문득 생각나 그걸 수습하려고 달려간 사람은 남편이었다. 부동산 등기부 등본을 잃어버린 사람도 나였다. 결혼 10주년 선물로 남편이 5년 간 용돈을 모아 사준 다이아몬드 반지를 잃어버렸다가 1년 만에 되찾은 것도 나였다. 정면충돌 교통사고를 낸 것도 나였다. 그건 그저 지나갈 일이라기엔 감당하기 버거웠던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속마음은 까매졌을 망정 내게 단 한 마디도 비난이나 원망을 하지 않았다.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 사라지고 마침 호텔에서 전화가 왔다. 두고 온 옷도 확인했고 옷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자동차 열쇠도 확인을 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불러 준 주소로 착불 배송을 해주겠다고 했다. 열차는 쉬지 않고 달리고 달려 용산역에 도착하고 비가 오는 평일 오후 6시의 서울은 말할 수 없이 도로 정체가 심했다. 딸들은 전철을 타고 각자의 집으로 갔고 남편과 나는 택시 승강장으로 가서 줄을 섰다. 가까스로 양산으로 두 사람의 머리만 가린 채 앞으로 나가지 않는 줄을 서있는데 '엄마~!' 하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양산을 쓴 큰딸이 달려오고 있었다. 

"왜 아직도 안 갔어?"

"엄마, 택시 잡혔어요! 카카오택시로 강화까지 가는 차 호출 되었어요. 택시비도 결제했으니까 오면 그냥 타고 가시면 돼요"

나는 순간 이 아이를 낳던 날을 생각했다. 생후 3일 만에 안아달라고 울던 아이였고 13개월에 문장을 말하던 아이였다. 이 아이는 늘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2시간 30분을 넘게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 가족이 참 건강한 가족이구나.....'

위기가 있을 때마다 겨를이 없어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삼십 년 만에서야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 우리 가족이 참으로 건강한 가족이다. 아빠는 가장으로서의 의무와 책임 그리고 가족을 지키고 최대한 편하게 해 주려고 집중을 하는 어른 중의 어른 아내인 내게는 남자 중의 상남자다. 두 딸들은 그 누구도 불안과 두려움을 내색하지 않고 원망도 비난도 하는 법이 없이 긍정적으로 해결 방법을 생각해 내려고 집중한다. 그리고 누구라도 먼저 힘을 내고 돕도 덜어준다. 고생도 기쁨도 나누기를 마다하지 않는 가족이니 이 얼마나 건강한가.

'우리 가족은 나만 잘하면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가족대화방에 딸이 톡을 올렸다. 

'길이 너무 막혀서 피곤하시겠어요. 아빠 이따가 차 가지러 가시려면 너무 늦을 텐데 어떻게 해요ㅠㅠ'

카카오 택시 앱으로 우리의 이동 경로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빠도 엄마도 아이들도 그렇게 위기를 대응하고 스스로의 멘틀을 관리하고, 고통을 인내하기도 하고 또한 가족이 모두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하면서 우리 가족은 성장하는 중이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 서럽기에 앞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가족 구성원과 함께 할 때 느긋하고 행복하다는 것이, 마치 어떤 국가고시에 합격을 한 기분이었다. 살아오며 맞는 위기의 순간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는 대신 성장의 기회가 되어 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생 사는 맛이란 이런 것인가 생각도 들었다. '트라우마의 반대말은 성장'이라는 것을 다시 새기며, 아마도 올 해의 휴가는 특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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