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로니카의 참견 Dec 08. 2023

다리가 놓여도 교동도

강화도에 오면 시간 내서 둘러보아야 하는 곳(3)

 1990년 10월 23일 자로 첫 발령을 받았을 때 나는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병원 응급실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퇴직한 후 보건진료소장이 되기 위해 6개월의 신규 교육을 수료한 스물네 살 미혼이었다. 발령 첫날 나는 강화의 서북단 창 후포구에서 월선포구까지 페리호를 타고 교동도에 건너왔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근처에 서있던 어른에게, '택시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물었고, '아가씨 어디서 왔냐?'라고 되물으시는 어른에게, '강화요'라고 대답했다. 그땐 강화는 강화고, 교동은 교동이었던 시절이었다. 일제 강점기엔 교동이 '군'이었고 인구밀도가 높고 논이 많아서 교동도에서 일 년 농사지은 쌀로 '가평군민'을 일 년 먹인다고 할 정도였다. 쌀 값이 제법 잘 나갈 때였으니 교동도 사람들은 나름 윤택한 살림을 자랑하며 프라이드도 높았다. 그런 곳에 이십 대 중반의 젊디 젊은 미혼 진료소장이 되어 좌충우돌했던 시간들이 일제히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30년도 더 된 이야기를 풀어낼 마음이 든 것이 그날이다. 당시 함께 고생하던 보건지소 공중 보건의사 중 하나가 내게, '상록수에 나오는 채영신'같다고 했었다. 1930년대 쓰인 소설의 주인공과 비교되는 것이 싫어서 기분이 나빴던 생각이 난다. 돌이켜 보면 나는 채영신 같긴 했다. 학원도 어린이집도 없던 시절이었고 모내기철엔 이른 아침 들어 나가는 엄마가 세 살 된 아이를 진료소로 엎어다 놓고 갔다. 진료를 하면서 아이를 돌봐 주었다. 학교가 끝난 동네 어린이들이 진료소로 모여들고 아이들과 간식도 만들어 먹고 숙제도 보아주고 진료소 마당에서 놀기도 했다. 어떻게 그리 했을까? 젊음이 좋긴 했었다.



 지난 11월 중순에 주말 최북단 강화 교동도에 있는 '화해평화센터'에서 주관하는 평화 걷기 행사에 참가했었다. 한강 하구 평화 걷기 행사였고, 모처럼 가족이 다들 시간이 되어 남편과 딸 둘 가족이 모두 함께 했다. 교동도 대룡리~남산포~읍내리~월선포~상룡리까지 약 6km 구간을 걸었다. 날씨는 차고 매웠지만 하늘은 시리도록 파랗고 참가한 이들은 딱히 특정할 수 없는 남녀노소 이십 여 명이었다. 줄을 지어 걸었던 거리는 6km였지만, 이곳에서 북한과의 거리는 2.5km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새삼스럽다. 하루를 충만하게 보낸다는 보람과 기쁨으로 딸과 나란히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강 하구 갯벌이 갓 쑤어 놓은 도토리묵처럼 맨질맨질하다. 해안을 끼고 걷는 길 옆으로 촘촘히 무리 지어 난 갈대와 억새의 난무, 찬란한 햇살을 받아 쉬지 않고 반짝거리는 물결의 일렁임을 눈으로 즐기며 남산포구에 도착했을 때 내가 말했다.

"30년 전에 교동에서 3년 넘게 근무하면서 여기 이 남산포에서 행정선으로 응급환자 어지간히 많이도 실어 보냈는데 여기 많이 변했다. 마지막 행정선 띄웠을 때는 외포리에서 출발하는 행정선을 기다리는데 멀리 행정선의 경광등 불빛을 바라보면서 여기 이 자리에서 환자가 죽어가는 걸 안타깝게 바라본 적도 있었지..."

"아, 진짜?"

딸이 신기하게 포구를 둘러본다. 딸들에게는 이곳이 그저 신기한 바닷가일 뿐인 모양이다.

'그때도 이랬었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30여 년 만에 와보는 곳이니 기억 날리 없지만 옛날엔 이보다 규모도 작고 유일하게 있던 건물은 해경 초소 정도였었다. 지금은 심지어 간장게장과 매운탕이 주메뉴인 식당도 있었다!

세찬 바람이 옷깃을 후벼 파고드는 이 포구에서 북한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받는 민간인의 학살이 이루어졌었다는 사실을 그때도 지금도 몰랐다. 오염된 역사를 배웠던 우리 모두. 그 오류 가득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왜곡한 그 역사책을 기억하는 이들은, 마치 덮어 두는 것이 나을 것을 굳이 들추어내어 아프고 불편한 상처를 바라보는 듯 굳은 표정들이었다. 나는 엔도 슈샤쿠의 침묵의 비문이 떠올랐다.

'인간은 이토록 슬픈데 바다는 저토록 푸르구나....'

나는 내 마음에 세운 침묵의 비문에 이렇게 적어 본다.

'우리들의 마음은 이토록 쓰디쓴데 바다는 저토록 반짝이는구나....'


 남산포를 벗어나 우리는 행렬을 지어 읍내리로 향했다. 포구가 가까운 곳에 시장이 서고 성문으로 사람들이 드나들며 일제강점기까지 개성으로 인천으로 한양으로 포구에서 포구로 온갖 물류가 드나들고 쌓이던 이 번화한 터가 이제는 어색하고 조악한 억지춘향식의 문화재 복구 현장으로 자리 잡고 앉아 보는 우리를 또한 불편하고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차라리 30년 전 내가 작은 스쿠터를 타고 가정방문을 다니던 그 시절 허물어진 채 오래된 돌 아치의 성문만 남았던 그때가 더 운치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읍내리 성을 따라 시골 마을 작은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멀리 교동대교를 바라보이는 해안 나들길이 나온다. 우리는 줄을 지어 찬란한 햇살과 찬 바람,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송이송이 피워내 가며 나들길을 걸었다.    

2014년에 개통된 강화도 인화리와 교동도 봉소리를 잇는 교동대교를 멀리 앞에 두고 저 굽이를 돌면 대교가  놓이기 전 창 후포구에서 객선이 오고 가던 월선포구가 나온다.

 해안의 나들길을 따라 굽이를 돌아 도착한 곳은 낵  30년 전 주말마다 객선을 타고 드나들던 월선포이다. 월선포는 하점 창후 포구와 가장 가까운 거리이고 당시 선장님은 교동도에서 제일 큰 산인 화개산을 보며 배를 운전한다고 하셨는데 30년 전 내가 타고 출근길에 올랐던 배가 짙은 안개로 길을 잘못 들어 북쪽으로 넘어갈 뻔하여 비상이 걸렸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그저 옛날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로 붐비던 월선포 구는 그야말로 쓸쓸한 옛 영광을 그리워하는 노 배우 같았다. 내겐 추억이 가득한 장소이지만 더 이상 배가 다니지 않는 포구이니 매표소는 카페로 바뀌었고 해경 파출소는 그대로였지만 그저 지나가는 관광객이나 낚시꾼 네댓 명이 라면으로 끼니를 준비하는 느린 광경만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모여 서서 한강 하구의 지리적, 역사적, 군사적, 문화적, 경제적 가치와 우리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우리 후손을 위해 우리가 해야 일들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은 참으로 마음이 단단해지는 순간이었다.   

한강 하구의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 중요성 그리고 우리  미래를 위하여, 후손을 위하여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다.

 정오가 가까워지니 날씨는 따뜻해졌고 우리는 마지막 스퍼트를 올려 송암 박두성 선생 생가터로 향했다. 송암 선생은 일제 강점기 교동도에서 태어나 맹인들을 위한 한글 점자를 개발하고 보급하는데 평생을 바치신 분이시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송암 선생의 생가터는 아니었다. 그곳을 지나 산기슭 숲 속에 있는 '교동교회' 마당이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였다. 그곳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부역했다는 혐의고  있는 민간인들을 잡아 교회 안에 감금했다가 학살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그 누구도 내게 가르쳐 주지 않았던 아픈 역사였다. 평생을 강화에서 자랐고 3년을 넘게 공직자로 근무했던 지역의 숨겨진 아픈 역사를 듣는 시간은, 어쩐지 원치 않게 우연히 남의 고해성사를 엿듣는 느낌이 들어 불편하고 괴로웠다.



 

김밥과 어묵으로 요기를 하고 땅과 하늘과 인간이 화해하는 평화의 춤을 추었다. 그 누구도 어색해하지 않고 진지하고도 진심 어린 표정으로 서로를 안아주며 행복했다.


 그런 무서운 일들을 저지른 사람들이 실명으로 분명 존재하는데, 증인도 목격자도 있는데 단 한 가지가 존재하지 않아 그것을 바로 잡지 못한다. 그 없는 한 가지는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이다. 존재하지 않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또다시  무기력하다. 그 누구도 역사책에 적지 않았던 탓에 우리는 수업 시간에도 들어 본 적 없었던 민간인 학살이라는 아픈 역사를 알게 된 날, 나는 무고하게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었거나 또는 누군가를 살해해야 했던 이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고 오히려 누군가를 잃었다는 사실조차 입에 담으면 벌을 받았기에 비밀이 되어야 했던 시간들을 바로 곁에 방치한 채 살아가고  있었구나..... 지나간 73년 긴 세월 동안 가슴에 커다란 옹이가 박힌 채 몰래 아파하고 몰래 그리워해야 했던 평범한 이웃들의 고통을 마음에 담는다는 것은 공감할수록 나 역시 아팠던 시간이었다. 다행히도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낙엽을 밟으며 우리 모두는 평화의 춤을 함께 추었다. 손바닥을 땅에 대고 가슴에 대고 손을 하늘로 추켜올리며 빙빙 도는 춤은 아주 단순한 동작으로 반복되었지만 우리 모두가 땅과 하늘과 내가 화해하고 치유되며 평화를 서로와 나누는 좋은 시간이었다.


 교동도는 교동 대교가 놓인 이후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오랫동안 섬이었던 탓에 레트로 감성이 가득한 곳으로, 화개산 꼭대기에 설치된 전망대와 모노레일 그리고 화개정원이 코스이다. 하지만 내겐 30년 전 함께 살고 숨 쉬고 나누던 이들이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고향 같은 곳이다. 섬이었을 때에도 섬이 아니게  된 지금도 교동도는 무뚝뚝하고 거칠지만 은근한 매력 있는 곳으로 느리게 시간이 흐르는, 강화도에 오면 한 번쯤 들러 볼 만한 곳이다.  

 

 

작가의 이전글 제비꼬리 바라보며 서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