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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Oct 08. 2024

나는 매일 아침 눈뜨면 죽음

집 앞이 장례식장이라서

 새벽 일찍 부릉부릉 큰 버스 후진하는 엔진소리와 삑, 삑, 삑.... 하는 경고음에 잠이 깨어 일어나면 천천히 기지개를 켜며 물 한 잔을 들고 베란다로 향한다.

 '저 집은 승화 첫 타임인가 보다. 일찍 출상 준비를 하네.. 유가족들 고단하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영구차를 향해 서서 경건하게 십자성호를 긋는다. 가톨릭 신앙인들은 누군가의 죽음을 소식 들으면 그의 영혼을 위하여 하느님을 자비를 청하면서 성호경을 긋는 것이 나도 습관으로 굳어졌다.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부디 영혼의 안식을 기도하면서 간 밤 장례식장 주차장에 가득했던 조문객들의 차량들을 건너다보며, '자녀들이 많은가, 그들이 출세를 하였을까, 망자가 생전에 덕을 많이 쌓았을까....'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와 내 가족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절로 갖는다. 기도 소리가 들리면 신앙인인 줄을 알게 되고 다툼 소리가 들리면 안타깝고 애절하게 우는 소리가 들리면 준비하지 못했던 이별인가 짐작도 해 본다.


 나는 길 건너가 장례식장인 이 집에서 16년째 산다. 큰길을 사이에 두고 매일 수시로, 밤낮으로 장례식장을 건너다보게 된다. 주차장에 차가 없고 불이 꺼져 있으면, '오늘은 돌아가신 분이 없네....' 하다가도 꽃집에서 온 화물차가 도착하면, '에고.... 누군가 방금 돌아가셨구나.....'하기도 하며 마치 비밀 요원이 목표 대상을 감시하듯 나는 매일 누군가의 장례를 지켜본다. 아파트 주민 중 누군가는 앞을 가리도록 담장을 치라고 민원을 넣기도 하고 매일 장례식장이 보여서 죽음을 너무 자주 생각하니 우울한 기분이 든다고 하는 이도 있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이라 혼자 몰래 혀를 찬다.


 최근 몇 주 전 사돈 어르신이 세상을 떠나셨다. 나이가 드시면서 인지 저하가 시작되었고 코로나를 앓은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심신의 전반적인 기능을 잃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이 불씨가 꺼져 가는 시간을 맞게 되었고 임종 면회를 오라는 연락에 다들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중환자실에 계시면서 강심제며 승압제를 써가며 생명은 그렇게 유지되었고, 다시 임종 면회 오라는 횟수가 몇 번 반복되다가 결국은 부고를 받았다. 사실 두어 번의 임종 면회를 거치면서 나는 의료인으로서, '준비하고 있어라. 다시 회복되시기는 어려우니 여차하면 재빨리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 준비라는 것은, 마음을 단단히 먹겠다는 준비도 있지만 현실적인 준비도 있다. 내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날 저녁에도 도시에 사는 남동생의 아내에게, '아이들 옷 입혀서 재우고 이틀 정도 지낼 가방 싸놓고 너도 옷 입고 있어라'라는 말을 했었다. 장례식장, 상조회사, 영정사진, 장례절차, 가족들이 몇칠을 장례식장에서 지내야 하니 갈아입을 속옷, 세면도구, 겉옷 등을 미리 가방에 싸두는 준비등을 말한 것이었다. 부모가 돌아가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준비 없이 일상을 지내다가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중환자실이나 요양병원에서 혼자 운명을 맞게 되는 경우가 흔해진 요즘이다. 사돈어른도 급한 연락을 받고 달려가니 몇 분 전에 운명을 하셨고 그 순간 가족들은 밭에서 고구마 수확을 하고 있었다는 씁쓸한 이야기도 내 마음에는 얹혔다.


 하늘 아래 생명을 부여받았으면서 동시에 죽음으로부터 제외되거나 피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인간이라면 외면할 뿐 누구나 아는 진리, 자신의 앞엔 언제나 죽음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면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라틴어로 호디에 미히 크라스 티비)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진리의 말씀으로 명심하는 구절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죽음을 구원의 희망이 시작되는 때라고 여긴다. 그래서 나 역시 삶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며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죽음 이후의 상황을 알지 못하니 죽음은 인간에게 두려운 순간이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닌 다른 세계로 넘어감이라는 신앙은 내게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삶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며 진지하게 삶을 살기 위한 희망이 된다. 덕분에 내 장례식은 가톨릭 장례 미사로 하고 입당 성가는 329번으로, 고별식엔 꼭 469번을 불러 주고 마침성가는 68번으로 불러 달라고 딸들에게 말하곤 한다.  죽음을 너무 멀리 두려고 하지 말자. 그렇다고 늘 죽음만 생각하느라 삶을 망치지도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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