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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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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초란 Jan 09. 2022

마지막 날은 갑자기 찾아왔다.

나도 안다.

‘죽음’ 이란 단어와 처음 만났던 것은 언제였을까. 적어도 6살 이전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6살 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난 그때 이미 죽음의 사전적인 뜻을 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항상 죽음과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심장병을 앓고 계셔서 얼마 못 살 것이라는 소리를 평생 듣고 사셨다. 실제로 어린 내가 봐도 할머니는 자주 아프셨다. 자주가 아니라 할머니는 ‘아픈 사람’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었는데 할머니는 항상 구토를 하시거나 침대에 누워 계신다거나 어딘가가 불편한 모습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가 되셨으니 어렸을 때부터 오래 못 살 거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에 비하면 오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48살에 첫 손녀를 보고 54라는 나이에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빠의 결혼이 빨라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항상 나에게 다정하셨고, 당시의 난, 할머니는 우리 가족 중에 나를 제일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아픈 것에 비해 밝았다는 이미지가 있다. 친구들도 자주 집에 초대했고, 어린 나와도 같이 잘 놀아주셨고, 책 읽는 것도 좋아했다.(주로 추리 소설) 언제나 아픈 모습이었지만 아픈 것은 일상이었고, 할머니가 나를 사랑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날도 언제나와 같이 할머니는 방에서 구토를 하고 계셨다. 분홍생 세숫대야를 엄마가 들고 와 할머니의 얼굴에 받치고 있었다. 나는 유치원 버스시간에 늦을까 대충 인사하고 허겁지겁 문 밖을 나섰다.

분홍색 세숫대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얼굴이 내가 본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유치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아무도 없었다. 현관문이 열려있었고, 한바탕 난리가 난 듯한 집안의 모습. 조금 기다리니 할머니의 간병을 도와주시던 아주머니가 오셔서 할머니가 위독해 다들 병원에 갔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나는 혼자서 집을 지켰다. 


혼자서 덩그러니 있었다. 아직 어려 유치원에 가지 않았던 남동생은 당시 집에 있었기에 어른들과 같이 행동할 수 있었지만, 집에 있는 나를 챙길 여유가 누구에게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지도 몰라.’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감은 맞았다. 


다음날 도우미 아주머니를 따란 간 곳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나에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는 어른은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신 것이다. 


그 뒤로는 장례가 치러지고 정신없이 돌아갔다. 어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덩그러니 서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탓인지 나를 그렇게 사랑해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것도 이상했다. 여기저기서 슬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나는 덤덤했다. 난 왜 다른 어른들처럼 슬퍼하지 않는 것일까. 나 자신이 이해가 안 갔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일주일 뒤, 그날은 갑자기 찾아왔다. 

할머니가 없는 일주일의 일상을 보내고 나서야 할머니의 ‘죽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나에게 할머니의 마지막 날은 돌아가신 일주일 뒤였다. 그 뜻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날이 할머니가 나의 세상에서 사라진 날이었다.


‘진짜로 할머니가 없어진 거야.’

이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한 밤중이었기에 내 방 침대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할머니가 없는 세상을 혼자서 받아들여야만 했다. 충격적이고 슬픔과 동시에 놀라웠다. 할머니가 세상에 없어도 일상은 계속되고 있었고, 나는 내일도 유치원에 가야 한다. 

뭐지? 이게 말이 되는 세상인가?!


말이 되던 안돼던 시간은 흘러가고 나에겐 매일의 내일이 찾아왔다. 죽은 사람에게는 찾아오지 않는 ‘다음의 순간’이 살아있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온다. 무엇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구분 짓는가, 사후세계, 천국, 지옥, 환생 등등 종교계와 철학계 과학계가 다들 매달려 죽음에 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죽은 사람의 내일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름 아닌 그것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슬픈 일이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까지 6살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나도 놀랍다. 그래서인지 난 죽음을 좀 많이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블로그에 모두에게 찾아 올 마지막 날을 준비하기 위한 카테고리를 만들어 글을 지속적으로 써낼 정도로. 그리고 브런치에서도 ‘마지막 날’을 테마로 꼭지를 만들어 연재해 보려고 한다. 뭘 이렇게까지 일상 속에서 죽음을 계속 생각하는 놈이 다 있지?라고 생각할 만큼 난 항상 죽음을 염두하고 살아가고 있다. 


나도 안다. 준비를 아무리 해도 마지막 날은 갑자기 찾아온다. 갑자기 찾아올 수밖에 없다. 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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