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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Apr 28. 2021

걸음이 빠른 키 큰 여자 이야기


대한민국 여성 평균 키를 훌쩍 넘는 나는 걸음 속도도 유난히 빠른 편이다. 부끄럽지만, 내 걸음 속도가 빠르다는 걸 비교적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 그간 함께 걸었던 많은 상대가 내 보폭을 맞추는 줄도 모르고, 타인의 배려를 당연시 여겼던 딱 그만큼의 무감함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단 한 번도 상대방의 걸음을 따라가기 버겁다거나, 숨이 차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3년간 등하교를 함께했던 친구가 그거 아느냐고, 네 걸음걸이가 너무 빨라서 사실 따라가기 벅찼다고 말하는 게 아니겠는가. 무려 3년을 헉헉대며 쫓아왔을 텐데, 나는 왜 눈치를 못 챘을까!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그날 이후로 나와 함께 걷는 사람들에게 혹시 내 걸음이 빠르냐고 물었다. 그런데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그걸 이제 알았냐며, 네 걸음 속도 진짜 빠르다고 울분 섞인 토로를 하더랬지…. 한동안 주변인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하곤 했다.



걸음걸이가 다른 사람에 비해 유독 빨랐다는 걸 자각하고 나서는, 의식적으로라도 천천히 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돌이켜보면 내 빠른 걸음은 신체적 요인보다는 심리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 그다지 달갑지 않은 습관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다리가 길어서 보폭이 큰 것도 맞지만, 그보다는 불안한 마음이 나의 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이를테면 타인의 시선에 대한 압박감이나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두려움 같은 것들이 커질수록 걸음의 속도도 빨라졌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키가 컸던 나는 어딜 가나 주목을 받았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빤한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동물원의 동물이 된 기분이었달까.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167cm를 찍었으니,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붙잡혀 키에 관한 얘기를 듣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의도가 칭찬이든 오지랖 넓은 걱정이든 무례한 관심을 숱하게 받는 건 불쾌하고도 지겨운 일이었다. 하지만 겨우 13살이었던 평범한 여자애가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수군대는 소리를 의식하면 시선을 회피하고 빠른 걸음으로 군중 속을 지나가는 게 나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래도 후로는 단련이 됐는지 간혹 길거리에서 “와, 키 ㅈ나 크네.” 같은 무례한 말을 들으면, 괜히 전화하는 척 핸드폰을 붙잡고 “으휴, 만한 게.” 하고 똑같이 위아래로 훑는 등 소심하게 응수해주기도 했다(속으로는 벌벌 떨고 있지마는).



엄마는 그런 나에게 앙칼진 면모가 있다며, 한편으로는 사내놈들한테 잘못 걸려서 맞고 오는 게 아닐는지 걱정하셨지만, 그렇다고 고개 숙이며 피하고 다닐 일은 아니었다. 객기래도 할 수 없지만, '무시가 답'이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힘은 길러놔야지...



아무튼, 딱 이만큼의 객쩍은 당당함과 여유를 가진 지금, 가당찮은 죄의식과 자기혐오의 산물인 무턱대고 빠른 걸음과 굽은 어깨 그리고 어색한 시선 처리를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만 신경 쓰느라 정작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로 옆에서 어떤 고충이 있는지는 보지도 못했으니, 이제라도 나로부터 주변으로 시선을 이동시켜야 했다.



고백하건대,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지’하고 원망했던 미운 자식을 끊임없이 격려하며 품어낸 부모님과 방어기제와도 같던 다소 이기적인 습관을 그 어떤 타박 없이 맞춰주던 친구들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동안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 같다.



키만큼이나 큰마음과 걸음만큼이나 빠른 눈치를 가졌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지난날에 대한 후회보다는 앞으로 올 날에 대한 기대가 더 큰 삶을 살아내고 싶다. 그러니 더는 나를 원망하지 않도록, 다른 데서 받은 상처를 소중한 사람에게 무심코 돌려주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오늘도 걸음을 늦추며 나와 주변을 차근히 살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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