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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Apr 09. 2021

우울에 노련한 관계

관계에는 감성 이상의 지성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게 자신의 슬픔을 털어놓고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길 바랐지만, 정작 나의 슬픔은 나누면 배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며  것은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혹여 티가 나더라도 타인의 걱정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몸서리치던 때가 많아,  ‘정말 괜찮다  안심시키려는 말버릇은 습관이 되었다.



산책하러 나가거나 영화를 보거나 기록을 하면서 잦은 우울은 혼자서도 금방 떨쳐내곤 했는데, 그래도 가끔 지독한 감기 같은 우울을 겪을  누군가에게 괴로운 속을 털어놓고 위로받고도 싶다.



상대에게 속내를 어디까지 드러내도 괜찮을지, 나의 슬픔을 감당할  있을는지 고민하지 않고 되돌아오는 반응에 실망하지 않아도 되는, 애정은 물론이거니와 우울에도 노련한 관계는 사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아닐까?






나에게는 몇 년간 거의 매일같이 연락을 주고받은 탓에 내 답장 속도와 내용만 보고도 나의 무기력함이나 우울함을 곧잘 눈치채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그래서인지 그 친구 앞에서는 몰래 그어 놓던 선의 경계가 자꾸 흐려지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연속적인 실패의 경험과 이상과 현실의 차이 그리고 관계의 단절 등 모든 악재가 한 번에 찾아와 도무지 혼자 힘으로 깊은 무기력함에서 헤어 나올 수 없던 근래에, 그 친구가 뜬금없이 이런 카톡을 보내왔다.



넌 우울할 때 옆에서 물어봐 주는 게 좋아,
아니면 우울함이 좀 지나가고 얘기하는 게 좋아?



‘아, 이 친구가 눈치를 챘나 보다.’


나의 길고도 티 내지 않는 우울함이 당혹스러워 제 딴에는 머리를 굴리고 또 몇 번을 헤아리며 문장을 완성해낸 티가 났다. 그 애정 어린 배려가 참 따스했는지, 나는 내 고민이 하소연처럼 들릴까 쉽사리 말하지 못한다고, 보통 내적인 문제가 많아 스스로 해결을 본 후에 말을 하는 편이라 적으면서도 눈물이 줄줄 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번만큼은 누군가 눈치채고 물어봐 주길 내심 바라고 있었나 보다. 결국, 답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전화를 걸어 그간의 사정을 토로했다.




다행히 우리는 우울함에 꽤 노련한 관계였다. 평소 질긴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잦은 감정 기복과 깊은 불안에 관해 이해할 수 있었는데, 덕분에 그는 나의 내면에 깊이 침투하지 않으면서도 슬픔에 잠식된 마음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줄 방법을 알았던 것 같다.




누구보다 내 고민을 이해한다는 태도, 정상적인 고민 상담이 뭔지 모르겠으니 같이 욕이든 하소연이든 대차게 해버리자는 쿨함, 그래도 함께 더 큰 미래를 그리지 않았냐며 지금 살아내야 할 이유를 조목조목 따져보는 유머러스한 현명함까지. 나에게 최적화된 그의 위로 방식이 내겐 퍽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는 장문의 메시지와 함께 해바라기 씨앗을 보내왔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해바라기는 홀로 우뚝 설 힘과 의지를 지닌 꽃 같다며, 돈도 들어오게 해주는 꽃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내가 해바라기를 좋아하는 줄은 또 어떻게 알고 센스 있게 골라 보냈는지! '척하면 착'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덕분에 한동안 '해바라기 키우기'는 나만의 유행이 되었다. 그리고 갖은 정성을 기울인 2주 만에, 힘겹게 올라온 새싹을 보며 내 삶의 의지도 다시 샘솟았다.




생각해보면 그 친구는 나에게 늘 울림이 되는 말만 전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우울이 수용성이랬다. 그러니 따뜻한 물로 몸을 씻으면 우울도 씻겨 내려갈 것이라고, 눈물도 함께 쏟아내라고 일러줬다.




대학 생활 중 제일 몸이 고생했지마는 가장 큰 기쁨이었던 졸업 전시에도 그는 고생했다는 말 대신 축하하고 수고했다는 말을 전했다. ‘고생했다는 말은 준비한 대부분의 순간을 즐기고 배웠을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 같다’라면서. 성취를 위해 나의 자유 의지로 벌인 일들에 ‘고생한다’는 말이 괜스레 듣기 거북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던 걸까. 너는 종종 내게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나보다도 정확히 아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계가 그렇듯, 우리도 처음부터 내면의 결이 비슷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취향과 성향이 많이 다르기도 했는데, 이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흥미로워했다는 게 관계의 특징이었다. 대화의 카테고리를 넓히면 넓혔지 좁힐 생각은 없었기에, 오랜 기간 상대의 세계에 더욱이 파고들며 자신의 사고를 확장하는 방식을 택해온 것이다. 그렇게 애정을 기반으로 한 완전하진 못해도 최선을 다한 이해는 서로의 우울을 노련히 위로할 수 있는 관계의 기술로 쓰였다. 누구에게나 통용되지 않아도, 서로에게는 통하는 순간들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때때로 관계에는 감성 이상의 지성이 필요하다. 상대의 시선에서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바라보고 내 세상도 보여주는 일, 그리고 서로에게 낯선 대화를 윤기 나게 만드는 감각이 바로 지성이 아닐까. 나는 그러한 지성을 이 친구를 통해 배웠고 같이 적용하고자 지금도 노력 중이다. 덕분에 서로의 인생에서 5분의 4 정도나 되는 세월을 같이 보내지 않고도, 가장 본인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역시 지성을 키우는 일에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다.! 평안에만 익숙한 우리네 관계가 서로의 불안과 우울에도 노련해지기 위해서, 이토록 다정한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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