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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 아니 와인에도 때가 있다

Chateau Bouscaut Blanc 샤또 부스꼬 블랑


나는 이과반이었지만 정작 수학을 매우 못했다. 이과 체질이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선견지명(?)에 의해 이과에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훗날 나를 비롯하여 형까지도 문과 체질이었음은 아버지마저도 인정하신 바 있다만)


맞지 않는 체질을 끌고 공과대학에, 공과대학원에, 전자회사까지 입사를 했으니 결국 이렇게 퇴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회귀본능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는 되지도 않는 결론을 내려보기도 한다.


물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없다. 오히려 감사하면 감사했지. 조금 다른 길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으며 그 또한 결과가 어땠을지 누가 알겠는가.


웃기는 사실은 가끔 학생시절 미처 깊게 파고들지 못했던 수학공부가 가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다. 나는 확률과 통계를 지독히도 못했는데, 아마 그때를 충실히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금에 와 사뭇 아쉽고, 어떻게 보면 두려웠나 보다.


그렇게 때를 놓치고, 순간을 충실히 보내지 못하면 후회가 남는다. 그리고 그 후회는 인간에게 주어진 망각이라는 선물로도 잘 지워지지 않더라.




아끼면 똥 된다는 말은 조금 결이 다르긴 하지만 어떤 와인에겐 그 말이 맞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날 식전주로 선택한 페샥 레오냥 화이트 와인은 순전히 2010년이라는 빈티지, 즉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과거에 탄생했고 지금까지 세월의 흔적을 조금씩 받아들여가며 변해왔다는 사실 하나로 선택을 했다.


유질감이 부드럽게 풀려있으면서도, 말린 과실, 효모,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된 목재 집의 안락하고 포근하게 감싸주는 듯한 안정적인 향.


게다가 와인의 컬러마저도 자연의 한 사이클이 저물어가는 석양의 이미지다.


모난 것들이 많이 둥글어져 밸런스를 이룬다.


얼핏 무기력해 보일지도 모르는 저물어가는 생명력이지만 이 와인은 지금이 가장 아름답다.



Chateau Bouscaut 2010 @몽고네

너의 세월을 들려주어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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