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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green Sep 20. 2020

[애니메이션] <미라큘러스>에 등장한 자유의 여신

2015년 첫 번째 시즌을 시작으로 작년 12월에 세 번째 시즌을 종료한 애니메이션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의 한 장면입니다. 애니메이션 두 번째 시즌, 마지막 에피소드에 자유(파란색), 평등(흰색), 박애(빨간색)를 상징하는 프랑스의 국기가 등장합니다. 프랑스의 삼색기는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모자장식(cockade)의 색깔에서 유래한 것으로 시민의 힘으로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국민주권을 쟁취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의 ‘영웅의 날 2’편에서 파리 시민들이 악당인 검은 나비 일당에게 맞서는 장면인데요,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낭만주의(Romanticism)는 신고전주의(Neo-Classicism)와 함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던 예술운동이에요. 지난 글에서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그림을 통해 논리와 이성을 중요시하는 신고전주의의 특징을 알아봤는데요. 

https://brunch.co.kr/@borarosalia/8


오늘은 같은 시대를 공유하면서도 신고전주의자와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마주했던 낭만주의의 특성을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보며 알아보고자 합니다. 신고전주의는 이성의 통제 아래, 대상을 명확하고 질서 있게 묘사하는 것을 중요시하는데, 이러한 요소들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이성과 논리의 반대 지점에 위치한 감성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어 버립니다. 이성만을 강조하는 신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오히려 감성, 감수성, 상상력 등을 부각시키려는 태도가 등장하게 되었고 바로 이러한 움직임이 낭만주의를 촉발시켰던 것이지요. 주제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신고전주의가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화적/영웅적 서사 혹은 동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주로 다룬다면 감정적인 것들의 가치를 중시하는 낭만주의자들은 주로 문학 작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국적인 소재, 비합리적인 이미지들을 채택함으로써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260x325cm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와 함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입니다. 이 작품의 부제는 ‘1830년 7월 28일’로,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다시 재위했던) 복고왕정을 타도하기 위해 1830년 7월 파리에서 일어났던 7월혁명을 소재로 합니다. 한 손으로 당시 사용이 중지되었던 삼색기를 높이 치켜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총검을 움켜쥔 자유의 여신이 혁명에 참가한 다양한 계급의 민중을 이끌고 있습니다. 전면에는 군대와의 충돌 과정에서 사망한 시민들이 배치되어 있고, 화면의 오른쪽에는 화염으로 뒤덮인 하늘과 노트르담 성당이 보입니다. 7월혁명 당시의 혼란스러우면서도 흥분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외젠 들라크루아, <키오스 섬의 학살>, 1824, 419x354cm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보다 앞선 1824년작, 들라크루아의 <키오스 섬의 학살>은 1822년 그리스 독립운동을 보복하기 위해 오스만 투르크족이 키오스섬의 그리스인 주민들을 대학살했던 실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화면의 왼쪽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이 공허한 눈빛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가족들의 모습이, 화면의 오른쪽에는 터키 병사에게 나체로 끌려가는 여성 포로와 죽은 어미의 젖을 찾는 아기의 모습이 표현되었습니다. 인간의 내부에서 들끓어오르는 격렬한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실제 소재를 가져와 그림을 그린 것이지요.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162x128cm

낭만주의의 특성은 신고전주의 작품과 비교했을 때 더욱 명확히 드러납니다. 이 그림은 신고전주의 화가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이에요. 프랑스혁명을 이끌었던 급진파 인물 마라(Jean-Paul Marat)는 다비드의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는데요, 1793년 7월 13일 온건파 지지자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죽음을 다루는 태도를 보았을 때, 위에서 본 낭만주의자 들라크루아가 인간의 폭력성을 날 것의 상태로 격렬하게 보여주는 데 반해 신고전주의자 다비드는 차갑고 절제된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비드가 주인공을 세밀한 선을 통해 섬세하고 명확하게 그리고 있는 반면, 들라크루아는 뚜렷한 윤곽선보다 강렬한 색채의 효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낭만주의자로서, 어떤 대상의 정확한 묘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감정적 울림을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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