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로비에는 수많은 TV 브라운관을 쌓아 만든 18.5m의 거대한 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백남준 작가의 작품 <다다익선>으로, 1986년 미술관을 개관하면서 나선형의 로비 공간이 뉴욕에 위치한 구겐하임 미술관의 공간 구성과 유사해 보일 수 있다는 염려를 해소하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또한 작품이 완성된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 개최되었던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하지요. 작가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기리는 개천절–10월 3일을 의미하기 위해 1,003대의 TV 브라운관을 사용하여 탑을 쌓음으로써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스포츠 행사를 통해 새로운 시대로 발돋움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1,003대의 TV가 한데 모여 하루에 8시간 정도 영상을 상영하다 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TV를 포함한 각종 부품이 노후화되어 자주 고장 났고, 2002년에는 누전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가동이 중단된 적도 있어요. 이후 몇차례의 수리 및 교체가 이루어지다 2018년 2월, “화재나 폭발 위험이 있는 누전 상태”라는 정기안전점검 결과에 따라 지금까지 가동이 전면 중단된 상태입니다.
지난 8월, 한 뉴스에서 <다다익선>의 복원 현장을 방문했는데 가림막으로 가려진 내부에서는 높이 쌓아 올려졌던 TV를 조심스럽게 해체하여 상태를 점검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국내외 전문가들이 조사와 연구를 계속하고 있음에도 <다다익선>의 복원은 그렇게 쉬운 과정이 아니라고 해요. 가장 큰 문제는 원래 작가가 사용했던 TV 브라운관의 생산이 오래전에 중단되어 고장이 나서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 것들을 대체할 수 있는 동일한 제품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지요. 이와 관련하여 백남준 작가는 생전에 ‘TV의 생김새는 상관없고 화면만 잘 나오면 된다’는 태도를 취했다고 해요. 하지만 원형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과연 그 작품이 원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전문가들이 제시한 여러 가지 복원 방법 중, 저는 기존의 TV 브라운관을 LCD나 LED 모니터로 바꾸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작가가 사용한 초기의 TV 브라운관이 가지는 불룩한 외형을 작품의 원본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대의 평평한 화면에서 예전의 향수를 느낄 수 없겠지만, 사실 백남준이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했던 비디오아트는 TV라는 ‘매개체’보다 그 화면이 담고 있는 ‘영상’을 통해 더 강렬한 의미를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백남준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보스텔(Wolf Vostell) 역시 TV를 예술의 소재로 활용합니다. 그런데 1963년작 <텔레비전 데콜라주>는 백남준과 마찬가지로 TV를 설치한 작품이지만 보스텔은 TV를 그저 하나의 오브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같은 해, 백남준은 독일 중부에 위치한 부터팔(Wuppertal)의 파르나스 갤러리(Galerie Parnass)에서 첫 번째 개인전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을 개최했는데요. 백남준은 전시장 곳곳에 TV를 설치한 후 자석을 사용하여 브라운관에서 송출되는 이미지를 왜곡시켜 보여주는 영상 예술을 선보였습니다. 보스텔의 TV는 당대 새로운 기술로 만들어진 다른 물건으로 대체하더라도 (상대적으로) 큰 의미 변화는 없어 보이지만 백남준은 TV 내부 회로를 조작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비디오(video)’ 요소가 필수적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백남준이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 기억되는 것이겠지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 중 가장 대규모로 알려진 <다다익선>은 2022년 재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대중들에게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 어떠한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을지 궁금해지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