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예글방 시즌1(2022) - 글2
“헌신이라는 말 별로야. 헌신은 무슨 헌신이야. 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헌신이 아니면 무엇인가? 활동하는 단체에서 만난 친구 녀석의 저 말을 듣고는 입을 닫았다. 활동가로서의 삶을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지 몇이서 이야기하다가 나온 말이었다.
‘니가 뭘 알아. 활동도 열심히 안 하면서.’
속으로만 볼멘소리를 했다. 서운하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대꾸를 할 순 없었다. 헌신이라는 말에는 나도 막연하게나마 거부감이 있었다. 내 경우엔 이게 말이 헌신이지 사실은 노동착취라는 점 때문이었다. 나쁜 걸 좋은 말로 포장하는 걸 운동한다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근데 한편으로는 시민단체들의 지독한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도 생각하던 시기였기에, 돈으로 못 받으면 명예라도 챙기면 안되나 싶었다. 내게도 그런 인정이 필요했다. 헌신하고 있다고 좀 해주면 안되나 싶었다. 훌륭한 사람, 좋은 일.
“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는 말이 마음에 쿡 박혔다. 맞는 말이어서 더 그랬다. 아무도 부탁한 적 없는 일. 근데 그럼 이 짓을 왜 하고 있는 거야? 새빠지게 활동해도 정작 퀴어 대중은 관심이 없을 때마다 어렴풋이 했던 생각이었는데, 말로 직접 들으니 머리를 한 대 맞은 것만 같았다. 아무도 부탁한 적 없는 일, 그럼에도 원하고 필요할 거라고 추측해서 하는 일. 계몽, 꼰대, 엘리트주의 그런 것들. 근데 계몽이 없으면 사회 발전은 어떻게 해?
당시의 분노는 잊혀졌는데, 말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헌신’이라는 말을, 나처럼 그 말에 기대는 다른 활동가들을 생각했다. 어쩌면 위험한 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번아웃을 겪었던 때가 떠올랐다. 소진된 사람은 마음에 여유가 없다. ‘헌신’이라곤 하지만 뭔가 돌려받으려는 마음은 생기기 마련이고, 돌려받지 못하면 적어도 책임이라도 안 지고 싶어한다.
실제로도 그런 적이 많았다. 오래된 활동가들도 어쩌다 문제제기를 받으면 감정적으로 반응하곤 했다. 긴 시간 해온 헌신이 가장 먼저 자기방어의 수단으로 쓰였다(문제제기를 한 사람들은 헌신의 정도를 비교당했다). 문제제기를 받은 활동가들은 서러워하곤 했다. 나도 그랬다.
언젠가부터는 활동하는 게 힘들어 ‘헌신’이라는 말에 기대고 싶을 때마다 그 말을 떠올렸다. ‘아무도 부탁한 적 없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아무 것도 바라지 말자’. 위안은 안 돼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전한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퀴어들이 다들 자기에게 뭐가 필요한지 알고 살아갈까? 롤모델도 없고, 자라면서 들어온 얘기는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밖에 없는데, 어떻게 미래를 그릴 수 있는가.
나만 해도 그렇다. 어릴 적 케이블 티비에서 ‘퀴어 애즈 포크’를 보기 전엔 나 말고 동성애자가 또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고, 미국 게이 유튜버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기 얘기 하는 걸 보기 전엔 나도 당당해도 된다는 걸 몰랐고, 퀴어 커뮤니티에 ‘데뷔’하기 전까진 사람들 속에서 유리벽을 치고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몰랐다. 국경만 넘으면, 나와 같은 시간대에 이 지구의 어딘가에서는 동성결혼도 하고, 입양도 해서 ‘퀴어 정상가족’을 이루며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도 몰랐고, 그래서 그런 꿈을 꿀 수도 없었다.
무엇이 가능한지, 무엇을 꿈꿀 수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당연히 아무런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막연한 결핍감만이 해소되지 못한 채 차곡차곡 쌓인다. 그런 게 건강에 좋을 리 없다. ‘It Gets Better 프로젝트(미국에서 청소년 퀴어들이 자살하는 사건이 잇따르자, 청소년기를 지나온 어른 퀴어들이 청소년 퀴어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자신의 이야기를 유튜브 영상으로 공유하면서 시작된 글로벌 캠페인.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 유명인, 애플과 구글의 퀴어 직원 등 7만 명이 넘는 사람이 참여했다)’가 그렇게 히트를 쳤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삶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없다면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쉽게 버틸 수 없다. 어떻게 나아질 수 있는지, 꿈꾸는 미래와 지금 사이에 어떤 징검다리들이 있는지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아무도 부탁한 적 없는 일’이라기보단, ‘아직은 부탁할 수 없는 일’이 맞다. 그래서 한다. 이걸 꼰대라고 한다면? 흥칫뿡이다.
문제는 그 ‘아직은’이다. 필요한 줄 모르니까 찾아오지도 않는다. 얼마 전 우연히 범일동에서 같이 술을 마셨던 게이가 무슨 일 하냐고 묻길래 홍예당 얘기를 했더니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재밌겠다!”나 “언제 또 모임 있어요?”가 아닌 “좋은 일 하시네요”. 들을 때마다 투명한 벽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홍예당엔 절대로 안 올 것 같은 뉘앙스. 순식간에 회의감이 밀려온다. 나는 왜 이 짓을 하고 있는가? 이렇게 대중과 유리되어 있어도 괜찮은 걸까? 정말로 내가 꼰대인 걸까?
인권단체에서 활동할 때 연애도 못하고 활동만 죽어라 하는 서로를 ‘동성애자’ 아니고 ‘인권애자’ 아니냐고 놀리곤 했는데, 웃으며 이야기 했지만 사실은 씁쓸하기가 짝이 없었다. 비퀴어의 세상에서 내쳐져서 퀴어 커뮤니티라는 곳에 들어왔는데, 여기서조차 ‘정상 게이’에 속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해 내내 조바심을 낸다. 그렇다고 정말로 정상 게이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범일동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서 시덥잖은 이야기 나누며 술값 낭비하고 싶지도 않고, 자야될 시간에 클럽에서 춤추고 싶은 욕구도 없다. 잘 꾸미고 운동해서 근육 만들고 여기저기 여행 다니면서 인스타 피드 관리 하는 그런 것도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럼 어떡해야 하나 싶지만, 그냥 그렇게 산다.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야 하는 건 아니다. 영원히 범일동이건 종로건 이태원이건 동경하기만 하면서 살겠지. 원하지도 않으면서 동경하는 건 또 뭘까. 그냥 술 안 먹고도 모일 수 있는 곳이, 시덥잖은 얘기 말고 영양가 있는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근데 그러고보니 홍예당이 바로 그런 곳인데, 참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는 게 문제다.
퀴어들도 모르는데 퀴어도 아닌 가족들은 더 모른다. 그런 게 사회를 바꾸겠냐고, 돈 많이 벌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 힘으로 사회를 바꾸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겠냐는 개똥같은 소리나 한다. 어쩜 그렇게 다들 전문가들이신지. 내가 퀴어지 니들이 퀴어니? 한 귀로 흘리려고 해도 속에서 열불이 나서 그렇게 잘 안 된다.
얼마 전엔 아빠가 “그런 걸 하기엔 니 나이가 너무 많다는 생각은 안 드니?”라는 소리를 했다. 취직해서 국민연금 착실히 부어둬야 나중에 늙어서 걱정이 없다는 거였다. 집은 안 살 거냐고, 아프면 어쩔 거냐고. 그런 걱정을 하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늙어서 일을 못하게 되면 집이라도 있어야 할 거고, 큰 병이라도 나면 병원비를 대야 할 테니까. 하지만 못 견디게 서운하고 화가나는 건, 그런 것들 말고도 필요한 것들이 더 있다는 걸 몰라준다는 점이다.
일터에서 하루종일 나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것, 신나게 퀴어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동료 퀴어들과 만나는 것, 동성애 찬성 혹은 반대 같은 한심한 이야기가 아니라 더 수준 높은 대화를 할 수 있고, 퀴어로서 나의 뿌리와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것, 사회가 허락한 좁은 퀴어의 삶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내 삶의 온전한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것,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변화의 주체가 되는 것. 이런 것들이 내게는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이고, 나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일단은 할 수 있으니까 한다.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할 수 있는 사람은 해야 한다. 신영복 선생님은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게 연대라고 했지만, 내내 비만 같이 맞아주는 것도 무책임한 건 똑같다. 같이 좀 맞아주다가,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얼른 편의점에 달려가 비닐우산이라도 사와야 한다. 어쨌든 비를 너무 오래 맞으면 감기에 걸리게 되니까. 감기 같은 것은 그냥 걸리지 않는 편이 제일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