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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지식박사 Mar 22. 2024

밀크 인 부산

홍예글방 시즌1(2022) - 글4

  요즘 일하고 있는 문화공간 ‘무사이’의 보스는 원대한 꿈이 있다. 부산의 모든 구에 무사이의 지점을 내는 것. 지금 일하고 있는 직원들이 각자 지점장이 되어 공간을 운영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며 ‘지금의 적자 문제를 해결한다면 말이죠…’하는 지당한 생각을 한 후엔, 그래도 정말 그렇게 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퀴어를 주제로 한 공간일 수도 있겠지. 상상이라도 해봤다.


  일단은 퀴어 책들을 팔아야한다. 대놓고 퀴어한 책과, 그렇진 않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게 퀴어가 등장하는 소설, 커밍아웃은 안 했지만 퀴어들은 다 아는 퀴어 시인의 시집, 퀴어 영화의 원작 소설, 외국 퀴어 작가의 그래픽 노블, 퀴어 단체의 팜플렛이 끼워진 자료집들이 매대에 놓여있고, 누군가 들르면 무심하고 느긋하게 책에 대한 진심어린 소개를 해주는 나. 독서모임도 하고, 북토크도 하고, 가끔은 공연도 할 수 있을 거다. 공연은 어쿠스틱 느낌으로!


  커피도 팔아야지. 객단가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물장사는 꼭 해야한다. 책은 마진율이 30%인데, 커피는 반대로 원가가 30%다. 왠지 모르지만 자신이 있다. 그래도 카페에서 일해보기도 했고, 커리어의 질풍노도 시절에 따 둔 제빵기능사 자격증도 있다. 시그니쳐 커피는 낮은 유리잔에 진하게 내린 에스프레소와 얼음 위에 견과류 크림을 올린 ‘너티(nutty) 크림 라떼’, 대표 디저트는 만들기도 쉽고 손도 잘 가는 버터롤과, 투명한 음료컵에 시트를 층층이 담아 하루 냉장 숙성한 뒤 숟가락으로 퍼먹는 ‘어제의 케익’. ‘어제의 케익’의 종류로는 ‘베스킨라빈스31’의 ‘슈팅스타’처럼 입 안에서 폭죽이 터지는 듯한 맛의 ‘빅 게이 웨딩 케익’이라는 메뉴도 생각해뒀다. 근데 빵 만들 공간이 있을까?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자. 안 되면 외주 주지 뭐. 상생도 중요하다.


  퀴어 굿즈도 팔아야 한다. 부산에 퀴어 굿즈 파는 오프라인 매장이 없으니까. 아마 서울에도 없을 걸? 전국에서 퀴어 굿즈 입점 문의가 오고, 입점 수수료에 약간은 거들먹거릴 수도 있으면 좋겠다. 수익률이 제일 좋은 건 아무래도 오리지널 굿즈를 제작해서 파는 거겠지. 이젠 다들 에코백 너무 많다지만, 그래도 예쁘면 또 다 사게 되어 있다. 아크릴 키링도 팔자. 스티커도 팔고, 양말도 팔자. 대량으로 제작하면 싸다. 재고는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로 처리하면 된다!


  장사가 잘 되면 직원도 많이 고용할 수 있겠지. 아웃팅 우려도 있으니 비퀴어 앨라이도 적절히 섞어서 채용해야할 테지만,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퀴어 당사자를 우선적으로 채용하면 좋겠다. 어쩌면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 센터 띵동’과 연계해서 자립이 필요한 청소년/청년 성소수자들을 채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언젠가 보았던, 고객의 주문 예의에 따라 가격을 다르게 받는 방식도 좋을 것 같다. 인사를 안 하거나, 반말을 하거나, 직원이 다른 일 하느라 주문 받을 준비도 안 됐는데 혼자서 메뉴를 소리치기 시작하거나, 전화를 받으면서, 이어폰을 끼고 주문하거나, 카드를 반쯤 던지는 사람들에겐 ‘추가 서비스 비용’을 반드시 받아내리라. 직원보호가 우선이다. 여기는 공동체이니까. 

  층고는 높았으면 좋겠다. 이상적인 카페의 모습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디트로이트의 ‘아스트로 커피’다. 남향 통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실내를 밝히는데, 빛이 내려오는 벽면엔 색색의 분필로 그린 대형 벽화가 있고, 그림이 주기적으로 바뀐다. 우리 공간에도 한쪽 벽면을 통으로 채울만큼 큰 벽화가 있으면 좋겠는데, 사실은 생각해둔 이미지가 있다. 바로 하비밀크의 웃는 얼굴이 있는, 형형색색의(그러나 촌스럽지 않은) 그림. 누군가 “저 벽화는 뭐예요?”하고 물으면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 저 벽화요? 설명해드릴게요. 저 벽화 속 인물은 하비 밀크라는 사람이에요. 저희 공간의 이름을 따온 사람이죠. 하비 밀크는 미국 최초의 게이 시의원이에요. 혹시 숀 펜이 하비 밀크 역으로 나온 2008년 영화 <밀크>를 보셨나요? 하비 밀크는 1978년에 1년 정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으로 재직했는데, 그를 시의원으로 만들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의 퀴어들이 힘을 모으고 결국 꿈을 이뤄냈어요. 하비 밀크의 이야기가 주는 영감이 있는데, 바로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는 거예요. 더이상 세상에 맞춰 나를 바꾸려고 하거나, 숨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잘못된 건 세상이고, 힘을 모으면 가능하다는 것. 이 공간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저 벽화를 그려넣었어요.”


  ‘그렇게까지 긴 설명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라고 생각하는 손님을 뒤로하고 나는 회상에 잠긴다. 무례했던 고향을, 답답한 가족을 탈출하려고 아득바득 공부해 서울로 대학을 갔던 스무 살, 그 때는 다시는 부산으로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다. 새로 사귄 퀴어 친구들과 함께 걸어가다 고등학교 동창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곳, 가족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있는 곳.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내 뿌리들을 잘라내고 서울로 가야 했다. 서울은 내게 약속한 자유를 주었고, 퀴어로 살아갈 수 있게 했고, 새로운 가족도 찾을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서울은 언제나 타향이기도 했다. 나는 내내 모르는 동네를 유랑했고, 누군가를 만나면 목에 힘을 주어 완벽한 서울말을 쓰려고 애썼다. 10년간의 서울살이가 이주가 아니라 유학이었다는 건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견디다 못해 내려온 부산은 따뜻했다. 변하지 않은 학원가와, 개천과, 바다가 있었다. 그 곳들을 걷는 동안 나는 위축되지 않았다.

  “저기… 주문 안 받으시나요?”

  벽화에 대해 물었던 손님의 눈치없는 재촉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문을 받는다. 커피를 내리고, 함께 주문된 ‘빅 게이 웨딩 케익’을 쇼케이스에서 꺼내어 손님 앞에 내 놓는다. 손님은 음료와 케익이 올려진 쟁반을 받으며 의외의 말을 한다. 

  “샌프란시스코랑 사실 꽤 비슷해요.”

  “네?”

  “부산이요. 제 2의 도시이기도 하고, 가끔 바다 냄새가 섞인 바람이 불어오기도 하고요. 전란 때마다 이방인을 받아들여온 역사도 있고. 그래서 그런지 눈치 안 보고 자기 살고 싶은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손님은 가볍게 인사하곤 자리를 찾아 앉는다. 나는 새삼스레 카페를 가득 채운 손님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는다. 


  열린 문으로 바닷바람이 들어온다.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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