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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설 Aug 18. 2020

<바바둑>, 모성 신화의 안에는-①

사랑하는 마음과  없애고픈 마음은 어떻게 공존하는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바둑> 포스터

21세기의 호러 영화들에 순위를 매기는 해외 자료들에서 <바바둑>은 이제 빠지지 않습니다. 매체에 따라서는 1위의 자리에까지 오르기도 하고요. 특히나 2010년대의 호러들 중에서는 <유전>과 함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거론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유전>보다 <바바둑>을 더 좋아합니다. 호러로서 끔찍한 이야기를 더 뛰어난 테크닉으로 풀어낸 쪽은 <유전>이지만, 장르 안에 담아낸 주제의 깊이가 더 깊은 쪽은 <바바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바바둑>은 국내에서 극장 개봉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극장에서는 보지 못했습니다. 올해 CGV의 호러 기획전에서 상영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쉽게도 시간이 맞지 않아서 놓쳤네요. 대신 IPTV나 OTT 서비스에 올라와 있으니, 이 글을 읽고 관심이 생기셨다면 곧장 챙겨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왜 <바바둑>을 훌륭하다고 생각하는지 길게 이야기해볼 생각입니다. 이전에 썼던 글들보다 분량이 많습니다. 글을 두 편으로 나눌 텐데도 그렇습니다. 여유가 나실 때 천천히 읽어주시길 권해드립니다.


오나 도나스의 「엄마됨을 후회됨」에는 모성 혹은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기쁘게 끌어안는 동시에 격하게 밀어내는 모순된 감정에 빠진 수많은 여성들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토로합니다.

"작은 난쟁이가 와서 이렇게 말하죠. '좋아,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하지만 이번에는 아이들은 없어. 아이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단지 아이들이 없는 것뿐이야. 아이들은 절대 알지 못해.'"


"아들이 죽는 것, 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요즘에도 종종 해요. (...) 실제로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아마 난 죽을 거예요. (...) 하지만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어요."


이에 대해 오나 도나스는 "(...) 엄마들은 아이들은 사랑해도 자신이 부모임을 혐오하는 사실을 '감히' 시인했다"고 말합니다.


<바바둑>에서 아멜리아는 아들 샘에게 "그가 아니라 네가 죽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르겠어"라고 내쏩니다. 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그래서 여성 스스로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내면화하고야 마는 후회와 애증이라는 감정은 육체의 피로나 경제적 궁핍으로 쉽사리 치환되지 않는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바바둑>은 좋은 공포영화들이 으레 그렇듯 사회에서 억눌려 있던 담론들을 뛰어난 영화적 테크닉으로 풀어내는 작품입니다.


아멜리아는 싱글맘입니다. 샘이 태어나던 날 남편 오스카는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행동장애가 있는 아들의 육아를 홀로 도맡아야 하는 그녀에게는 곤경 자체가 일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자가 살고 있는 집에, 바바둑이 틈입합니다.


<바바둑>은 아멜리아의 영화입니다. 아들 샘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논의해볼 수 있겠지만, 영화의 초점은 분명 아멜리아에게 맞추어져 있죠. 예를 들어 영화에서 시간을 흥미롭게 다루는 두 장면, 즉 아멜리아가 잠들자마자 아침이 되는 패스트포워드와 조기 퇴근한 후 자기만의 시간을 즐기는 장면의 슬로모션은 관객이 그녀가 시간을 감각하는 방식을 동일하게 느끼도록 합니다. 잠이 부족한 아멜리아에게 밤은 얼마나 짧게 느껴지는가. 혼자 만끽하는 그 찰나의 여유를 그녀가 얼마나 달콤하게 받아들이는가. 관객은 그녀의 입장에서 봅니다.

아멜리아가 침대에 눕자마자 영화는 아침으로 빨리감기 해버린다

아멜리아가 겪는 고초들을 빠른 편집으로 확고하게 설정하는 <바바둑>의 초반부는, 그 자체로 심리 스릴러로 느껴질 만큼 탁월합니다. 샘의 존재는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과 일치하는데, 후에 지하실의 묘사에서 드러나듯 그녀는 7년 동안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샘은 자면서도 꼭 들러붙어 있고, 아침에는 항상 먼저 일어나 아멜리아의 잠을 깨우기 때문에 그녀는 잠도 부족합니다. 그네 위로 올라가는 데서 보이듯 샘은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는 아이인데, 이는 학교에 보내고 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급기야는 학교조차 샘을 온전히 이해하길 거부하며, 이는 고스란히 가정의 몫, 정확히는 아멜리아의 몫으로 돌아오죠.


한편 직업적 상황에서도 아멜리아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공과금도 제대로 못 낼 정도로 벌이는 마뜩잖으며, 상사인 베벌리는 그녀에게 불만이 가득한 듯합니다. 심지어 그녀는 일터에서조차 남을 돌봐야 합니다. 이는 프리랜서 작가로서 주체적으로 글을 썼던 그녀의 이전 직업과 날카롭게 대비되죠. 빙고게임 장면에서 허망하게 돌아가는 추첨 기계와 노인들의 생기 없는 얼굴은 무한정 반복되는 그녀의 돌봄 노동과 그 아무런 감흥도, 수확도 없는 속성을 절망적으로 드러냅니다(아멜리아가 돌보는 또 다른 인물인 로치 할머니와의 관계는 후반부에 역전되는데, 구원의 가능성은 이 반전에서 모색됩니다).

무망하게 돌아가는 추첨 기계 클로즈업

마지막으로 그녀는 성적으로도 욕구불만족 상태입니다. TV에서 일련의 섹슈얼한 장면들을 보고 시작한 자위는 샘에 의해 중단되며, 이후 다른 커플들이 차 안에서 키스하는 모습을 곁눈질하는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오스카에 대한 생각과 함께 성적인 욕구가 떠올랐을 겁니다. 가능한 연애 상대로 등장했던 직장동료 로비는 중반 이후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샘은 환경입니다. 대표적인 대목이 샘이 그네 위로 올라선 후 차에서 울며 심통을 부리는 장면인데, 이때 카메라는 차 앞에서 두 사람을 함께 프레임에 잡는 한편 뒷좌석의 샘에게는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여기서 관객이 보는 것은 샘이라는 환경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아멜리아의 표정입니다. 영화 내내 샘은 작용하고 아멜리아는 반응하죠.

아멜리아에게 부과된 환경으로서의 샘

모자의 일상을 소개한 직후 곧장 동화책 「미스터 바바둑」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바바둑은 형체로 드러나고, 아멜리아의 몸과 마음을 잠식합니다. 그리고 샘을 죽이도록 충동질하죠.

샘은 어디선가 「미스터 바바둑」동화책을 찾아와 아멜리아에게 읽어달라고 한다

바바둑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바바둑은 아멜리아인가?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럼 바바둑은 외부에서 쳐들어온 악령인가? 예를 들면 오스카의 유령이라든가, 지하실에 들러붙어 있던 유령? 그렇게만 설명하기도 곤란합니다. 아멜리아는 어떤 식으로든 바바둑의 작용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샘이 지하실을 어지르며 놀다가 아멜리아에게 들킨 날. 이 장면은 영화에서 여러 모로 중요합니다. 우선 샘이 지하실에 몰래 들락거렸다는 것을 아멜리아가 처음 인지합니다(반면 관객은 오프닝에서 열쇠까지 제자리에 갖다 놓는 샘을 보았습니다). 아멜리아는 샘에 의해 지하실이 들쑤셔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둘은 격렬하게 다투고, 침울한 상태로 저녁을 먹습니다.

이때 아멜리아의 스프에서 유리 조각들이 나옵니다. 유리 조각은 샘의 스프에는 들어있지 않고 아멜리아의 그릇 안에만 여럿 들어있죠. 여기서 유리 조각이 관객에게 연상시키는 것은 첫 장면에서 샘이 장난감 투석기로 깬 유리창과, 아멜리아의 입 안을 해친다는 측면에서 이전부터 그녀가 앓고 있던 치통입니다. 다시 말해, 아멜리아에게 고통스럽게 가해지는 샘의 행위. 직전에 샘이 지하실을 어지른 것은 가장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물론 이것이 샘이 직접 유리를 깨 넣었을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샘의 그릇만 깨끗하다는 점 때문에 아멜리아는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식사 이후 자신이 아끼는 사진에 끔찍한 낙서를 해둔 것을 본 아멜리아는 샘과 다시 한 번 극단적으로 대립합니다. 이 장면에 이어지는 두 사람의 교차편집은 바바둑의 정체를 유추하는 데에 가장 결정적인 단서가 됩니다. 아멜리아는 치통을 느끼며 식탁에 앉아있고, 샘은 자기 방에서 옷장 문이 갑자기 열린 것을 보고 조심스레 다가갑니다. 부엌의 전등이 꺼졌다 켜지고, 벅시는 지하실 문에 대고 그랬듯 아멜리아의 다리를 할큅니다.

턱을 주무르는 아멜리아와 옷장에 다가가는 샘이 교차되는데, 샘이 옷장 위에서 발견한 것이 마치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힌 아멜리아의 두 눈과, 턱을 주무르는 그녀의 손인 것처럼 쇼트들이 붙어있습니다. 이때 아멜리아의 두 눈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쏘아보는 듯하죠. 샘이 비명을 질러 위층으로 올라가보면 옷장은 엎어져있는데, 그 위에 올려뒀던 동화책은 선반 위에 놓여있습니다.

이 장면은 샘에게 물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바바둑의 존재를 아멜리아와 결부시킵니다. 그럼으로써 저녁 동안 쌓인 그녀의 스트레스가 처음 초자연적으로 폭발하는 섬뜩한 광경을 만들어냅니다. 이 일련의 일들이 같은 날 일어났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겠죠. 샘이 지하실에서 마술 연습을 하는 동안 아멜리아가 스프를 만드는 장면을 인서트함으로써 영화는 그 단서를 관객들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툼 직후, 고통스러워하는 아멜리아와 책장 위에서 유령을 보는 샘

그러니까 만약 바바둑이 아멜리아의 몸과 마음을 장악해 모든 문제의 원흉인 샘을 죽이게끔 만드는 악령이라면, 바바둑과 관련된 징후들은 「미스터 바바둑」이 나타나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습니다. 오프닝에서 샘은 그 꿈을 '또' 꾸었다며 아멜리아를 깨우고, 모자의 거리감은 침대와 식탁 양 끝으로 멀어진 두 사람을 잡은 직각 쇼트들에서 암시되죠. 아멜리아는 말을 듣지 않는 샘이 자신을 안으려고 하자 "하지 마!" 하고 발작적으로 반응하고, 클레어와 생일파티에 대해 이야기하는 도중 치통을 느낍니다. 그리고 벅시는 지하실 문을 긁습니다.


여기에 「미스터 바바둑」을 읽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이 책의 첫 문장은 '만약 바바둑을 입에 올리거나 본다면, 너는 바바둑을 없앨 수 없어'입니다. 꿈이나 징조로만 예감되던 바바둑이 단어로서 처음 발화되고 (책이라는) 실체로서 처음 눈에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장면에서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바바둑(으로 상징되는 것들)은 결코 없앨 수 없으며 평생 안고 가야 할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구두점을 찍죠.

다시 말해 이 동화책은 영화의 밑그림이자 복선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가장 물적인 형태의 악령 그 자체이기도 한 겁니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아멜리아와 샘이 함께 보는 바바둑은 이 동화책밖에 없기 때문입니다(악령에 씐 아멜리아는 스스로를 볼 수 없고, 마지막에 그녀가 바바둑을 몰아내는 동안 샘은 계속 눈을 질끈 감고 있습니다).


이 물적인 악령이 모습을 드러내자, 곧 바바둑의 시점 쇼트도 등장합니다. 자위행위가 방해 받은 뒤 다시 샘을 재운 아멜리아가 침대에서 책을 읽는 동안,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가는 카메라는 마치 몰래 살금살금 움직이는 누군가의 시선을 그대로 체현한 듯합니다. 이상한 낌새를 챈 그녀는 고개를 들고, 카메라는 멈춰 서죠. 이것이 두 번 반복됩니다.

독특하게도 이 영화는 두 모자뿐 아니라 바바둑에게도 시점 쇼트를 부여하는데, 후반부에는 시선의 주인을 바바둑으로 명백하게 특정 가능합니다. 따라서 상술한 쇼트를 바바둑의 시선으로 추측하는 것이 아주 이상하진 않을 겁니다.

이로써 아멜리아와 샘 사이에서, 집(특히 지하실)에서, 그리고 아멜리아의 입 속에서 미묘한 공기로만 존재하던 바바둑은 마침내 완벽하게 외부적인 실체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멜리아는 살아있는 외부 존재를 어렴풋이 느끼고, 카메라는 이를 움직임으로 증명합니다.

바바둑의 시점 쇼트

이는 얼핏 이상한 흐름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명백히 아멜리아의 내부에 존재하던 악령이 물적이며 외부적인 형태를 띄게 되었는데 아멜리아는 이를 모르고, 나중에는 이 악령이 다시 아멜리아의 몸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면서 파국을 맞기 때문입니다. 왜 아멜리아의 욕망은 악령이라는 또 다른 형태로서 발현되어야만 할까요?


<바바둑>에서 인물들의 상황이나 심리를 포함한 다양한 요소들은 양가적입니다. 샘에 대한 아멜리아의 마음이 그렇고, 샘의 역할이 그렇습니다. 애와 증, 보호본능과 살인충동, 들쑤심과 해방. 오스카의 죽음과 샘의 탄생, 그리고 이로 인한 (샘에 대한 아멜리아의) 인정과 부정. <바바둑>이 인상적인 것은 샘을 사랑하면서도 그가 사라지기를 강렬하게 원하는 (특수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주 잘 이해되는) 아멜리아의 심리를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낸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장면이 샘이 학교에서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면서 아멜리아가 호출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그녀의 곤란은 집에만 국한되지 않음이 드러나는데, 그러면서도 그녀는 교사들이 샘을 '그 아이'라고 부르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후반부에 기이한 방식으로 반복됩니다. 지하실에서 오스카를 만난 아멜리아는 '그 아이'만 데려오면 둘이 함께할 수 있을 거라는 유혹을 받지만, 그에 대해 샘을 '그 아이'라 부르지 말라며 뒷걸음질칩니다. 바바둑을 아멜리아의 내면에서 발현한 무언가로 본다면, 여기서 아멜리아는 자신이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의 입에서 가장 갈망하는 일이 말해지도록 하는 동시에 그것을 한사코 부정하고자 합니다.

아멜리아는 심리적으로 강한 분열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스카의 죽음에 잇따른 비극들을 인정하는 데에 늘 실패하죠. 그러니까 그녀는 욕망을 실현하는 데에 그 욕망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바깥에서 그녀를 밀어주어야만 추동력을 얻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글에서 남은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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