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파티드 vs. 무간도
'어라, 꽤 괜찮네?'
무간도를 리메이크한 디파티드를 보면서 나쁘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무간도와 비교해서 보면 더 재미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기억도 가물가물해지던 차에 내친김에 앉은자리에서 무간도까지 한 번에 몰아서 봤다. 그렇게 쭉 이어 보고 나니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디파티드는 나름 잘 만든 리메이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호평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편집상의 4개 부문을 휩쓸기는 했지만, 리메이크 영화가 그 정도 상을 받을만한 것인가 하는 논란도 일으켰다. 내 개인적으로도 무간도의 감성적인 스토리라인을 더 선호하기는 하지만 오늘은 이 두 영화에 어떤 시선의 차이가 있는지의 관점에서 중립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
무간도는 각 인물들의 감정에 집중하여 스토리가 전개된다. 경찰의 스파이 역할인 진영인(양조위 분)은 경찰학교를 졸업도 하기 전에 중간에 스파이로 발탁이 되는데 그때부터 경찰을 떠나 무려 10년 간 삼합회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된다. 감독은 왜 진영인이 10년이나 스파이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보스인 황지성 국장과 통화 내용을 통해 진영인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간신히 견디고 있다는 정도만 관객에게 보여준다.
반면 디파티드는 각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집중한다. 그렇다 보니 냉정하고 차가운 느낌마저 든다. 영화 초반에 설리반(맷 데이먼 분)이 마피아에 연루되는 과정과 새로 부임한 빌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를 경찰 쪽 스파이로 발탁한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데, 나는 이것이 두 영화의 차이를 가르는 시발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서양인의 입장에서 단순히 눈치가 빠르고 똑똑하다는 이유만으로 스파이로 선발이 된다는 무간도의 설정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디파티드에서는 빌리의 복잡한 가족사를 설명하고, 집안에 갱단 출신이 있었다는 설정을 넣어 경찰에서 정상적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보여주려 했다.
무간도에서 진영인이 삼합회에 잠입해 지낸 시간은 무려 10년인데, 이 역시 미국 사람들의 정서에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설정이었을 것이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10년의 지옥 같은 시간을 1년 정도의 짧은 시간으로 대체해 버렸다.
이런 설정의 차이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정서적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서양에서는 항상 '나(I)'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지만 동양에서는 '우리(We)'가 중요하다. EBS의 '공부하는 인간'이란 다큐멘터리에서 중국과 한국의 학생들을 인터뷰해보면 한결같이 '부모님과 가족 때문에' 자신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미국 학생들은 100%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중심으로 답변을 한다. 그 이야기에 엄마나 아빠가 등장할 틈은 전혀 없다.
이런 문화적 차이를 고려할 때, 아시아 관객들에게는 무간도에서 진영인이 왜 10년이나 고된 스파이 역할을 감내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궁금해할 수는 있으나)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큰 거부감은 없다. 그 이유가 개인적인 사정이든 아니면 조직을 위한 대의든 알 수 없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이런 설정을 서양 사람들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무려 1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경찰서에는 한 번도 출근 못한 경찰의 스파이 진영인과, 같은 시간 동안 갱들의 고단하고 비루한 삶은 별로 겪어보지 않은 삼합회의 스파이 유건명. 진영인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황지성 국장에게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정신과 치료까지 받는다. 경찰 내에서 승승장구하는 유건명도 자신이 삼합회라는 갱조직의 일원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이 긴 시간 동안 마주해야 하는 괴로운 현실과 정체성의 혼란은 그야말로 무간지옥에서의 삶과도 같다.
디파티드에서도 두 주인공의 정체성의 혼란에 집중했다고 하는 얘기도 있는데,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등장인물 개개인의 심리적 갈등을 부각하려고 했다기보다 상황의 부조리, 즉 주변 상황에 떠밀려 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냉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간도의 클라이맥스에서는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차분하면서도 슬프게 마주한다. 지난 10년간의 고통과 혼란을 기억하며 이제 그 과거의 시간 밖으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두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너무나 멋지게 그려냈다.
(유건명) 과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이제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진영인) 좋아. 법정에서 얘기해. 기회를 주는지 보자고.
(유건명) 날 죽일 생각인가?
(진영인) 미안하지만, 난 경찰이야.
(유건명) 그걸 누가 아는데?
이 장면은 아주 짧은 대사를 통해 주인공들의 욕망과 자신들이 처한 상황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주는 최고의 명장면이라 생각한다.
반면 스코세이지 감독은 마지막 옥상에서 마주하는 두 주인공의 장면을, 심리묘사보다 각자의 상황을 돌파하려고 하는 두 욕망의 충돌로 묘사했다. 그래서 장면 시작부터 숨어서 기다리는 빌리와 문을 열고 옥상으로 올라오는 설리반의 대립구도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대화에 담긴 내용도 화난 두 주인공이 쏟아내는 분노와 긴장감뿐이다. 아쉬운 장면이기는 하지만, 설리반의 심리적 갈등이 애초에 영화에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장면에서 무간도의 대화를 차용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설리번) 총이나 내려. 돈은 주면 되잖아!
(빌리) 뭐라고?! (총으로 얼굴을 가격한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동양적 정서가 가득 담긴 무간도를 리메이크하려고 했던 미국인 감독의 입장에서 서양인의 정서에서 수용할 부분과 수용할 수 없는 부분이 무엇인지 분명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것은 비단 영화나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상의 일반적인 경우를 살펴보더라도 마찬가지다.
흔히 문화와 사상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시대'라고 하는 것은 그 문화와 사상이 태생한 특정 지역(혹은 국가) 안에서의 시대를 말한다. 언제나 서구 중심의 역사 속에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 문화와 사상이 지금 이 시대에 보편타당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철학자 최진석 교수도 철학이라고 하는 이념과 지식을 수입한 한국의 철학자들이 비슷한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수입된 기성품으로서의 철학 이론을 진리로 수용하는 사람들은 시선이 구체적인 현실에 닿지 않는다. (중략)당연히 믿고 있는 이념을 구체적인 세계에 부과하려고만 하지, 구체적인 세계 속에서 새롭고 적절한 전략을 생산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유나 활동의 범위가 이론을 품고 있는 자기에게로 축소된다.
최진석 <탁월한 사유의 시선>
남의 것을 배우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수용할 것이며 어디에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주체적이고 새로운 고민을 해야만 한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무간도의 대본만 보고 영화는 보지 않았다고 하는데(본인이 아니면 스태프들이 보았겠지만 ^^) 그런 뒷이야기보다 중요한 것은, 스코세이지 감독 자신도 원작에서 수용할 것과 수용할 수 없는 것, 또 자신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주체적으로 명확히 설정하여 원작과 차별화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주체적인 입장에서 기존 영화를 해체하고 새로운 영화로 창조해 낸 감독의 노력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면, 디파티드를 단순한 리메이크 영화라고 치부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