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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의 이너콘서트 Mar 17. 2021

사소한 차이, 끝나지 않은 논쟁

내 우유부단함의 기원

어느 일본 애니에 아이들이 교실에서 티격태격하는 장면이 나왔다. 한 아이는 우동에 들어있는 유부가 국물에 불기 전에 면 보다 먼저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 아이는 유부가 우동 국물을 충분히 흡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므로 면을 먼저 먹고 나중에 유부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다 건너편에 사는 나로서는 애당초 우동에 유부를 왜 넣는지조차 이해를 못하고 있는 터라, 유부를 먼저 먹을지, 면을 먼저 먹을지 고민하는 모습이 우습고 귀여워 보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아이들의 모습은 라면을 끓일 때 면을 먼저 넣는 게 맞네, 스프를 먼저 넣는 게 맞네 하며 싸우던 나의 어린 시절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라면 조리법에 관한 논쟁은 성인이 된 후에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면과 스프를 넣는 순서뿐만 아니라 계란을 넣는지 넣지 않는지, 계란을 넣는다면 국물에 풀 것인지, 면은 반으로 쪼개서 넣는지, 그 밖의 재료들은 첨가할 것인지 등과 관련된 수많은 난제(難題)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개인 취향의 문제로 정리되곤 했다. 


하지만 면이 먼저냐 스프가 먼 저냐 하는 논쟁만큼은 면발의 쫄깃함과 관련이 깊다는 점에서 개인의 취향을 넘어 과학적인 성격을 지닌 사뭇 진지한 논쟁이었다. 스프를 먼저 넣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이랬다. 라면 면발의 쫄깃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짧은 시간에 익히는 것이 관건인데 스프를 먼저 넣어서 끓이면 물의 끓는점이 높아져 더 높은 온도에서 끓게 되므로 면이 더 빠르게 익는다는 논리였다. 


사실, 이런 논쟁이 무색하게도 라면을 가장 맛있게 끓이는 공식적인 답안은 처음부터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로 라면 봉지 뒤에.  


- 농심 신라면: “물 550ml를 끓인 후, 면과 분말스프, 후레이크를 같이 넣고 4분 30초간 더 끓이면 

  얼큰한 소고기 국물 맛의 신라면이 됩니다.”

- 오뚜기 진라면: “물 550m에 건더기스프를 넣고 물을 끓인 후 분말스프를 넣고 그리고 면을 넣은 후

 4분간 더 끓입니다.” 


라면 제조사의 연구원들이 수 천 번 끓여 먹어보며 최적의 조합을 찾았을 테니, 그 경험에서 나온 조리법을 따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 테다. 하지만  주입식 교육을 통해 철저히 사회적 권위에 순응하도록 강요받으며 살아온 것이 억울한 나는, 굳이 이제 와서 라면 끓이는 것에서라도 내 주체성과 자아를 확인하려고 한다. 면이 먼저니 스프가 먼저니 하면서, 전문가의 조리법은 애써 무시하고 나의 눈대중과 젓가락으로 전해지는 면발의 촉감으로 그날의 조리 시간을 결정하려고 한다. ‘그 맛의 책임은 온전히 내가 진다!’


그런데 과연, 스프를 먼저 넣으면 끓는점이 높아져 면발을 더 쫄깃하게 끓일 수 있다는 주장은 과학적으로 맞는 말일까? 밝혀진 바에 따르면 스프를 넣은 물과 넣지 않은 물의 끓는점 차이는 고작 0.05 ℃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과연 그 작은 온도 차이가 면발의 쫄깃함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겠느냐며, 이것은 라면 조리법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결정적 반박이었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난, 단정할 수 없었다. 내 미각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순 없지만, 농심의 안성공장과 안양공장에서 각각 생산된 신라면을 맛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 라면의 달인으로 TV에 출연한 사람도 보았다. 그 정도의 미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0.05도의 끓는점 차이를 구분할 수 있지는 않을까!


미각이든 청각이든 그 안에 존재하는 미세한 차이를 구분할 줄 아는 능력자들이 세상에 널려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 사람들이 구분해 내는 차이의 정도를 조금도 느낄 수 없고, 또 어떻게 그 차이를 인식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으니, 그런 신기한 능력을 눈으로만 보고 믿어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기 그지없다.


단순한 답답함만으로 끝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첼로를 배웠는데, 선생님은 한 옥타브 안에 12개의 음을 등간격으로 배치한 피아노와는 달리 현악기는 순정률이라고 하는 음계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연주자가 그 음악의 조(Key)에 따라 손가락의 위치를 조금씩 조정해야 한다고 했다. 깊이 들어가면 멀미를 일으킬 수도 있는 얘기이니 아주 간략하게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피아노에서 같은 건반인  솔#과 이 첼로 현 위에서는 그 위치가 서로 미세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손가락을 아주 조금 꿈틀거리는 정도의 차이인데, 안타깝게도 난 그 차이를 알아챌 수 없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그 차이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냐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후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게 되면서 내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미세한 차이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방 안에서 나만 듣지 못하는 소리가 있다는 말인가!’ 

창피했다. 창피함은 열등감이 되고 이내 자신감 상실로 이어졌다. 작은 공연이라도 할 때면 무대에서 조율을 하기가 두려웠다. 첼로는 두 현을 동시에 그어 완전 5도 화음을 만들어 조율을 하는데, 저 앞 컴컴한 객석에 무표정하게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는 관객 중 누군가는, '어라, 아직 덜 맞았는데 왜 조율을 멈추는 거지?' 아니면 '튜닝을 그따위로 해 놓고 연주를 하겠다고?'라고 생각할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능력자들의 눈과 귀를 피하기 위해 무대 뒤에서 미리 조율을 완벽하게(?) 해 놓고, 무대에 올라가서는 조율을 하는 시늉만 하곤 했다.


이런 경험 덕분에 세상에는 나의 인식의 영역을 넘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예상보다 훨씬 더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좋은 의미에서는 겸손함이고 부정적인 의미에서는 우유부단함이라 하겠다. 0.05도의 끓는점 변화를 맛으로 느끼는 사람도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 것만 같다. 신라면 연구원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내가 라면 조리법의 논쟁이 끝났다고 단정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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