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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의 이너콘서트 Jun 20. 2021

"달까지 가자"가 불편한 꼰대의 변명

장류진의 단편을 매우 인상 깊게 읽었던 터라,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얼른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을 했다.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용은 무엇에 관한 것인지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작가의 첫 장편인 <달까지 가자>는 세 명의 젊은 여성들이 직장의 고단함과 경제적 궁핍함을 이겨내기 위해 가상화폐에 투자하여 성공하는 유쾌한 이야기다. 장편소설이라기보다는 아주 긴 단편소설(?)이라고 해도 될 만큼 등장인물이나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한 편인데 그 덕분에 이전 단편과 연결된 이야기처럼 편하게 느껴지고, 또 빠르고 경쾌하게 잘 읽히니 책잡을 일은 아니다. 일상을 바라보는 섬세하고 날카로운 시선도 여전했다.


하지만 나는 책을 덮고 나서 이야기의 경쾌함 뒤에 찾아온 묘한 불편함에 시달렸다. 책을 읽은 지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그 불편함에 대한 생각을 쉽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 불편함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불편함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장류진의 단편집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었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앞서 내가 장류진의 글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한 것은 꼭 좋기만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당시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고 나서도 역시 오랫동안 생경하고 혼란스러운 기분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선 상황과 인물의 묘사를 이처럼 쉬운 일상의 언어로도 완벽하게 해내는 것을 보고 숨길 수 없는 질투심을 느꼈다. 얼핏 보면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벼운 글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포착된 장면과 감정은 섬세하고 훌륭했다. 둘째로는, 스토리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 직접 설명하기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난 후에 드는 낯선 느낌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꼰대의 언어로 바꾸어 보자면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지?' 정도.


하지만 작가와 같은 세대인 90년대생이 이 소설의 독자라면 소셜 미디어의 사진과 메시지에서 보이는 짧고 순간적인 서사에 공감하는 것이 익숙할 것이다. 그래서 소설에서도 삶의 의미나 무거운 메시지를 찾기보다 본인들이 겪고 있는 혹은 관심 있는 순간의 (토 달지 않은) 스냅샷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공감하고 열광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손절한 지 오래된 나에게, 장류진의 단편은 새로운 형태의 소셜 미디어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덕분에 난 트렌드에서는 정말 멀리 떨어진 사람이란 걸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이런 건 학원 가서도 못 배우겠구나 하는 탄식을 하기도 했다. 장류진의 소설을 '인상적'이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였다.


그러나 이번 장편 <달까지 가자>는 내 나름의 이해심이 통하지 않았다. 이삼십 대의 고뇌와 절망을 보여준 것도 좋았고, 회사와 집에서 일어나는 공감 가는 (그러나 정작 당하는 사람은 짜증 나는) 에피소드들도 재미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상화폐라고? 그리고 그걸로 대박이 난 세 주인공의 해피엔딩?


물론 독자가 공감을 하고 즐거움을 느꼈다면 이런 식의 결말도 좋다. 주인공의 대박 성공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세상에는 셀 수 없이 가볍고 유쾌한 통속 소설들이 넘쳐난다. 나 역시 그런 책과 이야기를 종종 즐긴다.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이 소설이 요즘의 한국 사회에서 주목받는 가장 핫한 작가의 소설이라는 점이다. 작가가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그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가 이 시대와 독자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재미는 있지만 그저 그런 가벼운 소설이었다면 그 작가를 주목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반대로 그 작가가 주목받는 작가라면 그 소설의 이야기를 가볍게만 바라봐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주목받는 소설가가 전하는 이야기의 결말인 '코인 대박'은 과연 어떤 의도를 담은 것인가? 난 쉽게 그 답을 알아낼 수 없었다. 이 상황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90년대생의 얘기를 잠시 해보자.


같은 90년대생인 임명묵 씨는 책 <K-를 생각한다>에서 90년대생을 가치관이 없는 세대 (책에서는 '가치의 부재'라고 표현했다)라고 했다. 90년대생은 앞 세대와는 달리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사회적 계층이 굳어져 있어서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절망에 시달리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 위해 이전의 가치를 부정하고 해체하는 건설적인 의미의 탈가치가 아니라 삶 자체의 의미가 축소된 가운데 기존의 모든 가치도 함께 사라져 버린 무가치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90년대생의 삶이 다른 세대에 비해 특별히 더 힘들다고 말하기는 어렵더라도 감정적으로 이들이 느끼는 분노와 좌절은 실체적이다. 개인주의적인 것 같으면서도 인터넷에서는 생각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간섭하려 하는 집단주의를 보인다.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는 것 같으면서도 미래의 불확실성을 낮춰주는 강력한 국가주의에 대해 편안함을 느낀다. 공정을 논하면서도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을 할 만큼 별로 도덕적이지도 않다. 공정이라기보다는 '공정감'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다. 계급 상승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욜로와 소확행이라는 이름으로 미래의 가치를 할인하여 현재를 소비한다. 이렇게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잃고 모순과 혼란 속에 '인생은 한강물 아니면 한강뷰'같은 한탕주의에 빠져 90년대생들은 코인에 열광하게 된 것이라고 임명묵 씨는 이야기했다.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도 이런 세대와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물론 이전의 글처럼 이 세대를 위로하거나 방향성을 제시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런 게 요즘 소설의 트렌드라는 걸 눈치챈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거기까지만 이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장류진 작가는 세 주인공에게 '코인 대박'이 나는 것으로 소설의 결말을 맺었다.


작가는 예전부터 '누가 3억 주는 소설'을 쓰고 싶었고 이번 첫 장편에서 '다해와 친구들에게 3억씩 나눠주는 이야기'를 쏘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은 꼭 설탕에 굴려서 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삶의 희망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젊은 주인공들이 오직 기댈 것이라고는 코인 대박 밖에 없는 상황으로 설정하고, '그래 너네 셋은 코인 대박이라도 맞아라!'라고 하며 설탕에 굴려 내오는 소설이 내게는 달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역사가의 저술이 '사건의 선택'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역사가의 주관적 의도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소설가가 그 장면과 인물을 그저 가만히 보여주기만 했더라도 이미 거기에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특히나 그 작가가 주목받는 작가라면 가벼운 이야기 속에 담으려고 했던 의도를 살펴야 할 것이다.


작가는 정말 단순히 가볍고 유쾌한 이야기를 쓴 것뿐일까? 만약 좀 더 나이가 있는 작가의 소설이었다면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풍자와 냉소를 담은 소설이라고 결론 내렸을 것이다. 한탕주의 외에는 다른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젊은 세대의 자화상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90년대생 작가의 글인지라 나는 그 '의도'를 섣불리 판단할 수가 없다. 출판사는 책 뒷면에 '출근길을 응원해주는 장류진의 경쾌한 목소리'라고까지 했다. 나는 그 응원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내가 나이가 든 탓인지도, 어쩌면 세상이 변하고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가벼운 이야기이거나 허무한 메시지일지라도 젊은 세대가 공감한다면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할 문학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이 작가를 관심 있게 보아야 할지, 아니면 이 소설의 의미를 좀 더 고민해야 할지 그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은 후의 '불편함'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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