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보는 마케터
요즘 출판사에 다닌다. 더 정확히는, 출판사가 만든 유아 브랜드에 다닌다. 광고회사서 내 타깃은 밀레니얼을 벗어난 적이 없는데. 애가 없는 스물다섯은 머리로 애를 낳는다. 육아 잡지를 몇 권씩 넘기고 장난감을 살피곤 한다.
덕분에 책상에 앉아 눈을 어디로 돌리든 즐겁다. 왼쪽엔 유아용 자전거가 색상 별로 세워졌다. 오른쪽엔 강아지 모양 캐리어가 나를 바라본다. 이런 근무환경을 사랑하게 됐다. 점심을 과하게 먹었다 치면, 한참 작은 킥보드를 끌고 사무실 이곳저곳 돈다. 그러면 더부룩함이 금방 가신다.
내 업무 중에는 그런 것도 있다. 따분한 오후에 팀장님께 들렀다가 자리를 뜬다. 다음 주 소개할 그림책을 골라오겠다고 한 것이다. 회사 근처에 마련한 공간으로 간다. 촬영을 위한 곳이지만 여느 가정집 냄새를 맡는다. 사무실의 적막함은 잠시 잊기로 한다. 보드라운 깔개 위에서 읽다 돌아온다.
이 출판사는 나에게 장발장을 처음 알려줬다. 은촛대와 식기를 들고 달아나는 삽화가 생생하다. <레미제라블>이 웅장한 음악으로 영화관을 뒤흔들었을진 몰라도, 나는 약간 잿빛으로 그려진 책만을 기억한다. 그래서 무언가와의 처음은 늘 신중해야 하나보다.
엄마는 네게 사준 책만 몇 천만 원어치라며 감사하랬다. 사실 여기 다니기 전에는 전집이 그렇게 비싼 줄 몰랐다. 지금 와서 떠올리니 여러 출판사 것으로 꽉 찬 책꽂이는 숲을 이뤘다. 친구들은 나랑 놀러 왔으면서, 책만 읽다 돌아가곤 했다. 정신 팔려 책을 낀 무릎에 대고 '나랑 노올자~'를 애타게 불렀다.
별의별 책들이 자꾸 집으로 배달된 사연은 이렇다. 엄마는 유치원 현장학습을 다녀와서 잔뜩 인상 쓴 날 발견한다. "애들은 다 아는데 나만 피터팬 몰라!" 하는 말에 당장 새 전집을 구입한다. 전래 동화는 빠삭한데 아차, 얘에게 세계 명작을 안 읽혔구나! 엄마는 분명 허둥지둥 이었을 테다.
그리곤 그것들을 목이 터져라 읽어준다. 기진맥진하여 끝! 을 외치면 속 모르는 어린 나는 바로 다음 책을 들고 나타났다고 한다. 유치원생 딸을 키우던 엄마 목은 자주 잠겼고 이따금씩 쇠 비린내를 맛봐야 했다. 그런 열렬한 모정은 잡학다식을 낳고야 만다.
정성 가득한 <대리 독서>로 키워진 몸은 요새도 그림책을 보며 자주 울고 웃는다. 세상이 변하면서 책도 변했다. 내가 다섯 때 읽던 책과 요즘 다섯이 읽는 책은 많이 다르다. 이를테면 담는 가치가 깊어졌다. 그래서 바닥이 오목하게 생겼다. 소속인으로서 말고 소비자로 애정 하는 책도 생겼다.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터와 협업, 북유럽 교육관을 그렸다니 뭐니, USP 보다 내용을 먼저 읽는 사람인지라. 어쩌면 마케터 자격 박탈이겠다. 내가 느끼는 대로 새롭게 샐링 포인트를 정의한다.
이를테면 이 책의 것은 문장 사이 필기체다. 제목처럼 모두 다른 삶을 담담하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지네 우체부가 다녀간 가족들엔 한부모 가정도 있고, 조손 가족, 입양 가족, 딩크족인 부부, 이혼. 재혼 가정까지 다양하다. 이걸 어른이 만든 단어들로 다시 적고 있으니 이유 모를 죄책감이 든다.
맨 뒤표지의 문장. <누구나 다르지만 이상하지 않아요>는 어쩌면 이상하게 바라보는 누군가를 꼬집는 아이의 말 같다. 다름을 틀림으로 보는 당신이 부끄러우라고, 책은 힘 있는 메시지를 더욱 해맑게 전한다.
눈치챘겠지만 그림책 독자는 아이만이 될 수 없다. 어떤 것은 어른의 고민, 처지 그리고 위로까지 다룬다.
악어 휴고는 오해당한다. '무섭고 잔인할 것이다, 잡아먹을 것이다.' 등으로. 원래는 요리와 뜨개질을 좋아하는 따뜻한 악어인데 동물들은 그를 따돌린다.
SNS를 통해 알다가 마주한 이들은 말한다.
'목소리가 되게 중성적이시네요.', ' 세 보였는데 엄청 여리구나.', '통금이 있다고? 네가?'
그동안 자신들이 상상한 내 모습을 단숨에 깨는 걸 꿈뻑꿈뻑 본다. 나도 저 악어가 될 뻔했다. 정말로 잔인한 건 이런 사실임에도 무책임한 모르쇠는 많다는건데.
동생이 생긴 첫째가 느끼는 질투는 어마어마하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첫째의 시선에서 본다. 이 책은 둘째가 만나는 처음, 그리고 첫째를 그렸다.
어느덧 오빠와 가까워진 아기 이야기는 남동생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보행기에 동생 얼굴을 박아버리고 도망친 첫째는 뒤늦은 반성을 한다. 자지러지게 울던 둘째도 나의 외출 중엔 누나를 찾는다. 꼭 책에 등장하는 남매처럼.
나를 가장 많이 울게 한 책.
어디까지나 내 예상이지만, 유경험자로서 이건 소아 ADHD 아동을 보여준다. 우유를 가득 따라주고파 넘치게 부어댄 탓. 그네를 세게 밀길 원하는 친구를 있는 힘껏 밀어준 탓. 공을 너무 세게 찬 탓.
그러다 원장실에 끌려간다. 소름 돋게도 과거 내 모습 그대로. 더 이상 표현이 다르거나 큰 아이들이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 그랬는지 먼저 물어주기를. 그러면 그들도 말해줄 것이다. 작은 머리는 생각보다 기특한 걸 굴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굴곡 투성이 미대 출신 마케터가 본 샐링 포인트는 별 것 없다. 그저 잡다하고 전략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이렇게 책도 팔고 장난감도 판다. 엊그제 부턴 생활용품도 팔게 되었다. 장난감 회사가 파는 생활용품은 어떨까, 떠올렸다. 노는 걸 책임지는 브랜드니까 놀기 위한 안전한 환경을 잘 알 테다. 혼자 한 생각인데 런칭 후 살핀 니즈도 대부분 그랬다. 나는 멋대로 기대를 쥐어주고 가버리는 이상한 출판사를 다닌다.
이번 주 책장에서는 어떤 걸 들어 올릴지 나조차 궁금하다. 내일은 월요일. 주말은 늘 기록으로 그새 가버린다.
출근길에 다시 브런치를 켜볼 여유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알리고자 한다. 스물다섯의 내가 유아가 되어 일하는 근황을.
행복하다.